성명 | 양성춘(楊成春) |
생몰 | 1875년 ~ 1910년 1월 23일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부 |
사망지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양성춘은 1875년생이며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했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뒤 연해주에서 사업을 성공시켜 연해주의 한인들 사이에서 유력자로 손꼽혔다. 190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開拓里) 대한인거류민부장으로 공립신보(共立新報) 발간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08년경, 김춘성(金春成) 외 1명이 개척리로 건너와 수일 숙박 후 노브키에프스크로 출발하려던 차에 부근 한인에게 거동 이상자로 붙잡혔다. 양성춘은 이들의 소지품을 조사하였는데 이사청(理事廳)에서 발급한 여권과 일본어로 꾸며진 서류 다발 등이 있었다. 이에 양성춘은 이들을 일본인 밀정으로 판단하고 처단했다.1909년, 양성춘은 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의 응접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계동학교(啓東學校)에서 재류 한인 대회를 열고 한인거류민회(韓人居留民會)를 조직하여 러시아 관헌에 인가를 받았다. 한편 1907년경 정순만이 이상설의 심복으로서 연해주로 망명해오자, 그는 정순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정순만을 블라디보스토크 민회 총무 겸 서기로 임명했다. 정순만은 이를 바탕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창간해 한국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1910년 4월 24일자 <대동공보> 기사는 이러한 양성춘을 “마음이 공평 정직하여 동포 사회에 공익을 극력 도모하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양성춘과 정순만은 곧 독립운동 방향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상설과 정순만 등 양반 출신 망명자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시킨 뒤 황제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들은 비밀조직을 창설하고 러시아 행정당국에게 고종 망명 계획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연해주에 정착했던 양성춘 등 평민 출신 한인들은 이상설 등의 계획을 무의미하다고 여겼고,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해 그들로부터 급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한인 사회의 내막을 전하는 것에 불신을 품었다.
그러던 1910년 1월 23일 낮 거류민회에서 한인 사회의 내부 알력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충돌했다. 그날 저녁, 정순만은 양성춘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찾아온 동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나뉜다. 하나는 정순만이 자신의 견해를 묵살한 양성춘에게 강한 적의를 품고 권총을 갖고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오늘 거류민회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일이 너무 분하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외치며 양성춘을 살해했다고 한다.
다른 설은 정순만 본인이 재판 과정에서 밝힌 진술에서 비롯되었다. 정순만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성춘은 정순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분노와 절망에 빠진 정순만은 휴대한 권총을 빼들고 “이렇게 탁한 세상에 생존할 바에야 지금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양성춘이 자살을 막으려고 권총을 뺏으려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권총이 오발됐으며, 불행하게도 총알이 양성춘의 아랫배를 맞히고 말았다. 정순만은 양성춘이 숨을 거두기 전 가족에게 "이 일은 사고로 난 것이니 복수하려 들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설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순만이 권총을 갖고 양성춘의 집에 찾아왔고, 양성춘은 정순만이 쏜 총탄에 아래쪽 배를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순만은 1910년 11월 초 3개월 금고형 및 정교회 사원에서 참회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출옥한 정순만은 1911년 6월 21일 양성춘의 친형 양덕춘과 아내 전소사를 만났다. 전소사는 “무슨 이유로 너는 내 남편을 살해했느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고, 정순만이 머뭇거리자 도끼를 꺼내들어 정순만을 쳐 죽였다. 이 두 번의 살인 사건으로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 등은 러시아 헌병대로부터 정순만 암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자 다른 곳으로 망명해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양성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