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국의 군인. 로버트 클라이브와 함께 영국의 인도 식민화 정책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2. 일생
쿠테는 1726년 아일랜드의 리머릭 주 킬몰록에서 태어났다. 그는 1744년 제27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고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1746년 1월 17일 포커크 전투에 참가한 그는 전투를 기피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포커크에서 가지고 있던 군기들을 에딘버러로 가지고 간 것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군대에서 쫓겨났다. 이후 쿠테는 1749년 메노르카 섬에 근무하던 제37 보병연대 소위로 재입대했고 1755년 제39 보병연대 대위로 승진한 후 연대와 함께 인도로 파견되었다.1756년 로버트 클라이브 소장이 지휘하는 영국군에 가담한 쿠테는 1767년 2월 4일 캘커타 전투에서 선두에 서서 벵골 토후국 군대를 기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작전은 비록 실패했지만 윌리엄 요새를 탈환하는 것은 달성했고,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현지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클라이브와 윌리엄 요새의 지휘권을 놓고 마찰을 빛었고, 클라이브는 이때부터 쿠테를 싫어했다.
1757년 6월 23일, 쿠테는 플라시 전투에 앞서 열린 전쟁 평의회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지지했다. 이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 토후국 군대가 와해된 후, 쿠테는 벵골 토후국군과 연합했다가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아 분견대를 이끌고 600km 이상 추격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쿠테는 인도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중좌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한동안 지내던 쿠테는 1759년 1월 10일 제84 보병 연대를 이끌고 영국에서 출발해 10월에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인도에 있는 모든 영국군을 지휘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클라이브는 몹시 분노했고 그의 지휘를 받는 걸 거부했다.
1760년 1월 22일, 쿠테는 완디와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그는 퐁디셰리로 패주한 프랑스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클라이브가 몬슨 소령에게 퐁디셰리 공방전을 맡기고 그는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쿠테는 이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몬순 대령에게 맡겼고, 몬슨 소령은 1761년 1월 16일 퐁디셰리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쿠테는 벵골에 있는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의 지휘를 부여받았고 벵골 나와브 미르 카심과 그의 부하 사이의 심각한 분쟁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1762년 영국으로 돌아가던 쿠트는 도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섬 총독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영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보석으로 장식된 검을 하사받았다. 쿠테는 1770년에 인도로 돌아왔으나 마드라스 자치 정부와 갈등을 빛고 6개월 만에 떠났고 1779년 1월 인도 방면 영국군 총사령관 겸 중장으로서 인도에 돌아왔다. 그러던 1780년, 마이소르의 통치자 하이다르 알리가 영국의 마이소르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강한 불만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쿠테는 군대를 모아 이에 맞섰고, 1781년 6월 1일 포르토 노보에서 알리의 군대를 5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쿠테는 1782년 아르니에서 알리를 상대로 또 한 번 승리를 거뒀으나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쳤고 1783년 4월 28일 마드라스에서 병사했다. 향년 5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