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여지연(呂止淵) |
생몰 | 1883년 6월 21일 ~ 1961년 2월 26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1] |
사망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여지연은 1883년 6월 21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련극(石鍊極)·박하빈(朴夏彬) 등의 동지와 함께 성주면 경산동앞 도로상에서 많은 군중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독립선언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김교훈 등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기독교계 지사들이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조직하자 그도 이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또한 1919년 음력 8월 정상진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상해에 가고자 하나 자금이 없어 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자금을 마련하여 줄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전북 김제군에 거주하는 송시용의 토지목록을 담보하고 초처면장(草處面長)의 도장을 만들어 사용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20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공인·공문서위조죄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성주군의 자양서당(紫陽書堂)에서 청소년교육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으며,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2월 26일 성주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여지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성주여씨의 집성촌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