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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16:44:37

연주 구원전


1. 개요2. 배경
2.1. 다시 일어난 황건적2.2. 태산, 발해군 전투
3. 전개
3.1. 황건군은 연주로3.2. 조조의 구원

1. 개요

황건적이 재기하여 연주를 공격하고 연주자사 유대를 살해하지만 조조에게 격퇴당한다.

2. 배경

2.1. 다시 일어난 황건적

중평 말년(188~189년) 후한이 크게 혼란한 가운데 황건적이 다시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다. 곽대(郭大)를 비롯한 황건적 잔존 세력은 서하(西河) 백파곡(白波谷)에서 다시 봉기하여 태원(太原)을 공격했고, 하동 백파(白波)에서 일어난 황건은 남흉노의 선우 어부라와 연합하여 하남과 동군을 공격했다. 마상(馬相)과 조저(趙抵)는 황건의 기치를 내걸고 사천(四川) 면죽(綿竹)에서 봉기하여 여러 고을을 공략했는데, 그 세력이 빠르게 익주(益州)의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하의(何儀)와 하만(何曼) 등 여남과 영주(潁州)의 황건군은 수만 명씩 갈피(葛陂)에 집결하여 다시 들고일어나 서원의 하군 교위 포홍(鮑鴻)을 격파했다. 청주와 서주에서 봉기한 황건군은 100만 대군으로 청주, 서주, 연주, 기주를 돌며 싸움을 벌였다.

2.2. 태산, 발해군 전투

191년(초평 2년)에 청주에서 황건군 30만이 들고 일어나 태산군(太山郡)울 공격했다. 그러나 태산 태수 응소(應卲)가 훨씬 적은 수의 군사로 필사적으로 저지하여 수천 명이 희생되고 북쪽으로 밀려나 황하를 건너 발해군으로 들어갔다. 30만 군사는 흑산군과 연합하려 했으나 공손찬에게 격파당해 수만 명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후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갖추며 병력을 다시 모았다.

3. 전개

3.1. 황건군은 연주로

192년(초평 3년)에 황건군은 대충 머리수 100만을 채우고 연주를 공격하여 임성(任城)의 국상(國相) 정수(鄭遂)를 살해하고, 동평(東平)으로 밀려 들어갔다. 임성국과 동평국은 모두 연주에 속해 있었다. 연주자사 유대(劉岱)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鮑信)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무리가 백만이라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사졸들은 투지가 없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적의 무리들이 서로 뒤따르는 것을 살펴보건대 군에 치중(輜重)이 없고 오로지 약탈로 조달하니, 군사들의 힘을 비축하여 먼저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저들이 싸우고자 해도 싸우지 못하고 또한 공격하려 해도 공격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세력이 필시 흩어질 것이니, 그 후 정예병을 뽑아 요해지를 점거하고 들이친다면 가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3.2. 조조의 구원

유대가 죽고 난 후 진궁(陳宮)이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주(州)에 주인이 없고 왕명(王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저 진궁이 가서 주(州) 사람들을 설득케 하시고, 명부(明府-주목, 태수 등에 대한 존칭)께서는 뒤이어 와서 주목에 오르시어 천하를 거두는 데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는 패왕(霸王)의 업(業)입니다.[1] "

진궁이 (연주의) 별가, 치중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州)에 주인이 없소. 조동군(曹東郡-동군태수 조조)은 명세지재(命世之才-세상을 바로 잡을 인재)이니 만약 그분을 맞아들여 주목으로 삼는다면 필시 생민들을 평안케 할 것이오."

포신 등이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겼다.

이에 포신은 주리(州吏-주의 관리) 만잠(萬潛) 등과 함께 동군으로 가서 조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는 진병하여 수장(壽張-동평국 수장현) 동쪽에서 황건적을 공격했다. 포신은 힘써 싸우다 전투 중에 죽었고 가까스로 이들을 격파했다.

조조가 보기 천여 명을 이끌고 전지(戰地)를 시찰하다 갑자기 적의 둔영에 맞닥뜨려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이 뒤이어 전진했다.

황건은 도적이 된 지 오래고 여러 차례 승세를 탔으므로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조조의 군사들은 오래된 군사가 적고 신병(新兵)들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기에 전군이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친히 장사(將士-장병)들을 순시하며 상벌을 분명히 권하니 군사들이 다시 기세를 떨쳤다.. 그 기세를 이어 토격(討擊)하자 적들이 점차 꺾이어 물러났다. 이에 적이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예전에 제남(濟南)에서 신단(神壇)을 허물어뜨렸을 때는 그 도(道)가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아 그대가 도를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다시 미혹(迷惑)되었구려. 한(漢)의 운수가 이미 다하고 황가(黃家)가 설 것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은 군(君-그대)의 재능과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조조가 격서(檄書)를 읽고는 이를 꾸짖으며 욕했다.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

포신의 상(喪)을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포신의 형상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곡(哭)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해 제북(濟北-연주 제북국)에 도착하자 (황건적들이) 항복을 청했다.
[1] 이 부분의 발언을 잘 생각해보면 진궁은 앞으로 작금이 난세인만큼 정치와 군사가 패도로 가야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