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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2인자가 아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하다." - 라인홀트 메스너
유제프 예지 쿠쿠치카(Józef Jerzy Kukuczka. 1948년 3월 24일 ~ 1989년 10월 24일)
1. 개요
폴란드의 산악인.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산악인 중 한 명이며 세계 산악사에 불멸의 신화로 남은 위대한 산악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의 8,000미터급 고봉 14개를 완등한 산악인이다. 에베레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산소로 올랐으며, 로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계 등정이나 신루트를 개척하며 라인홀트 메스너의 기록과 한 달 차이 불과한 1988년 10월 13일에 등정을 완료했으며 등정기간은 메스너의 반에 불과한 7년 11개월 14일이었다.
70년대부터 히말라야에서 드라마틱한 등반을 한 메스너에 비해 히말라야 진출도 늦고 14좌 달성도 늦은데다 동구권 산악인이었던지라 초기에는 메스너에 비해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고 또 아직까지 살아있는 메스너와 달리 80년대에 죽은 인물이라 메스너에 비해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2] 메스너보다 위대하다 칭해질 수 있는 몇 안되는 산악인 중 하나. 메스너나 쿠쿠츠카 모두 알파인 스타일[3]을 추구했지만, 쿠쿠츠카는 메스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등반했으며,[4] 또한 모두 다 신루트, 동계 등정이라는 것이다.[5] 특히 K2의 벽은 그가 남벽을 등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현재까지 재등되지 않았다.
2. 상세
1948년 폴란드의 공업도시 카토비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죽을 때까지 실롱스크 광산의 전기 기술자로 일했다.막대한 후원을 등에 업고 등반을 했던 서구의 산악인들과 달리 그는 상대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지 못한 공산국가 폴란드의 산악인이었고, 또한 동구권의 산악인이었기 때문에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등반을 해야했다.
안전한 외제 카라비너를 얻을 수 없어 소방대에서 사용하는 무쇠 카라비너를 사용했고, 아이젠은 동네 주물 공장에서 제작했다가 등반을 하기도 전에 모두 버려야하기도 했다. 피켈을 잃어버렸다가 공산당의 조사위원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범행을 자백해야 했던 적도 있다.[6]
그는 돌로미테를 좋아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진짜 장비를 볼 수 있는 꿈의 나라"[7]였고 서구의 부유한 클라이머들이 버리고 간 카라비너와 하켄을 회수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외 고산 원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카트만두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유가 "서방 원정대가 버리고 간 중고 장비들을 반 값에 사들일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라고 밝혔다.
마칼루 등정 때는 단독으로 북서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신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했는데 등정시비가 붙었다. 정부 연락 장교가 그가 마칼루를 등정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 이 등정 시비는 정확히 8개월 후 1982년 한국 등반대[8]에서 그가 마칼루 정상에 놓고 온 무당벌레 장난감을 가지고 내려오면서 해결됐다. 이후 정부 연락 장교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빚어진 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듯 미칠듯이 열악한 상황에서 79년 로체를 무산소로 등반하는 것을 시작하여 그야말로 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80년대는 폴란드 등반대의 최전성기로 폴란드 산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자바다 대장 이래 예지 쿠쿠츠카, 크쉬스토프 비엘리츠키, 보이텍 쿠르티카, 안제이 초크,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츠 등은 이 시기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다.
에베레스트 남벽 신루트를 개척 등정하였고, 마칼루는 단독으로 북서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신루트를 개척하는 등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세우게 된다.
K2 남벽은 86년도에 초등된 이후 36년이 지난 2021년 현재까지도 재등되지 않고 있다. 1988년 10월 13일, 결국 그는 7년 11개월 14일만에 14좌 등정을 완료한다.
그리고 89년 로체의 남벽을 등반하던 도중 8,350m 지점에서 자일이 끊어지면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지금까지 8,000m급 산에 그와 같은 횟수의 동계 초등을 달성한 인물은 시모네 모로[9] 뿐이다.[10] 또한 2021년 현재까지 8,000m급 산에 가장 많은 루트를 개척한 인물이다. 현재는 많은 산악인들이 8,000m급 산의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도전을 했고 또 많은 루트가 개척되었기에 이 기록 역시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3. 한국과의 인연
한국 등반대와의 인연이 조금 있는데 위에 서술된 마칼루 등정의 의혹을 해결해 준 것도 있고, K2 등정 당시 하산길에서 헤매고 있다가 6,800m 지점에서 한국 등반대에게 구출된 적이 있다. 그의 동료였던 피오트로프스키는 하산 중 추락사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 자일은 카트만두에서 한국 등반대에게 구매한 자일이었다.4. 등반사
로체 : 79년 10월 4일 무산소 등정에베레스트 : 80년 5월 19일 남벽에 루트 개척 등정
마칼루 : 81년 10월 15일 단독으로 북서릉 배리에이션 루트 개척 등정
브로드피크 : 82년 7월 30일 서릉 등정
가셔브룸 : 2봉 84년 7월 17일 북봉과 중앙봉을 지나가는 신 루트 등정
가셔브룸 : 1봉 83년 7월 1일 동서릉 루트 개척 등정, 83년 7월 23일 서남벽에 루트 개척 등정
다울라기리 : 85년 1월 21일 북동릉으로 동계 초등
초오유 : 85년 2월 15일 남동벽에 루트 개척후 동계 초등
낭가파르바트 : 85년 7월 13일 남동벽(루팔벽)에 루트 개척 등정
칸첸중가 : 86년 1월 11일 동계 초등
K2 : 86년 7월 8일 남벽에 루트 개척 등정
마나슬루 : 86년 11월 10일 북동벽에 루트 개척 등정
안나푸르나 : 87년 2월 3일 북벽으로 동계 초등
시샤팡마 : 87년 9월 18일 서릉에 루트 개척 등정
89년 10월 24일 로체 남벽에서 사망
[1] 출처 : [2] 사실 한국에서 메스너를 알만한 사람은 쿠쿠츠카를 모르기 힘들다. 일반인들은 기껏해야 박영석, 엄홍길 정도만 알고, 더 이전 사람인 고상돈이나 허영호까지는 잘 모른다.[3] 캠프를 설치하는 현대식 등반이 아니라, 자신의 식량은 물론 침낭 및 장비 모두를 들고 오르는 방식의 등반을 말한다.[4]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이자 홀링테크닉의 창시자인 발테르 보나티는 쿠쿠츠카가 14좌 등정에 사용한 장비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 이런 열악한 경제적 여건은 동구권 산악인, 특히 폴란드 산악인들의 숙명에 가까웠다.[5] 메스너는 신루트 6회에 단독 등정 2회, 쿠쿠츠카는 신루트 10회, 4번의 동계 등정, 단독등정 1회로 스타일에 약간 차이가 있다.[6] 폴란드 입장에서 피켈은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라 산악회의 소유였고, 산악회의 정식 재산 목록에도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 과거 가난했던 한국 산악인들도 사고가 나서 실신한 뒤 깨어서 가장 처음 한 말이 "내 피켈 무사해?" 였다고 하니 어느 나라나 똑같은 모양이다.[7] 돌로미테는 알프스 동부에 있다.[8] 허영호 대장이 직접 가지고 내려와서 의혹을 해소했다.[9] 시샤팡마, 마나슬루, 가셔브룸 2봉, 낭가파르밧 동계 초등.[10] 근래까지 남아있는 동계 미등봉은 낭가파르밧과 K2였는데 2016년 2월 26일 시모네 모로를 포함한 3인의 다국적 원정대가 낭가파르밧의 동계초등을 성공시켰다. 그 어렵다던 K2도 2021년 1월 네팔 셰르파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동계 초등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