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발트 폰 뮌처 Oswald von Münzer · オスヴァルト・フォン・ミュンツァー | |
인물 정보 | |
<colbgcolor=#eee,#222> 신체 정보 | 남성, ???cm, ?형 |
생몰년 | ? |
가족 관계 | 불명 |
국적 및 소속 |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군 |
최종 계급 | 은하제국군 상급대장 |
최종 직책 | 은하제국 사법상서 |
최종 작위 | 불명 |
미디어 믹스 정보 | |
성우 | 오디오북 시모야마 요시미츠[1] |
[clearfix]
1. 개요
은하영웅전설에서 언급되는 역사 속 인물. 을지판에서는 오스왈드 폰 뮨츠아로 번역되었는데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원인인 듯하다. 작중 비슷한 유형의 오역으로 '암리츠아'라고 번역한 암릿처, 그릴발츠아로 번역한 알프레트 그릴파르처가 있다.강직한 성격의 인물로 작중 시기에는 명군을 모셨던 명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 영향으로 정전이나 외전 모두에서 뮌처가 단독적으로 언급되기 보다는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를 언급하면 같이 언급되는 형태이다.
2. 생애
다곤 성역 회전의 후일담에 잠깐 등장한다. 당시 헤르베르트 대공의 실책으로 제국군이 동맹군에 참패함에 따라 황제와 제국의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감히 황태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원정함대의 참모였던 고틀리프 폰 잉골슈타트 중장이 모든 책임을 독박쓰고 비밀군사법정에 소환되었다. 결과는 헤르베르트의 죄목까지 뒤집어쓴 사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군법회의였기에 변호인을 붙여주었는데 그 인물이 뮌처였다. 근데 뮌처가 변호인으로 지목된 이유가 가관인데 그가 평소에 잉골슈타트와 사이가 아주 안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뮌처가 잉골슈타트를 제대로 변호하지 않을 것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를 변호사로 선임한 것이다.하지만 그런 높으신 분들의 의도와는 달리 뮌처는 사적인 원한을 잠시 접고 성심성의껏 잉골슈타트를 변호하며 마지막 변론에서 '이 패전이 일개 참모에 불과한 피고(잉골슈타트)의 전횡 때문이라고 하며 그에 대한 죄를 묻는다면, 개인에 권력이 집중된 조직과 그를 방임한 각 분야 책임자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고 원정군 지휘부를 통렬히 규탄하였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잉골슈타트를 헤르베르트 대신 죽이기 위한 명분을 만들 요식행위였던 이상 잉골슈타트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뮌처는 이때도 사형이 아닌 종신형으로 감형해야 한다고 끝까지 반발했지만 사형을 막진 못했다. 이후 잉골슈타트는 하전입자 광선총으로 총살이 집행되던 날 아침 형장에 설 때, 입회인으로 참석한 뮌처를 바라보며 감사의 뜻으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총살된다.[2] 나중에 뮌처가 잉골슈타트를 변호하고 원정군 지휘부를 규탄한 발언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뮌처는 "탄핵자 뮌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잉골슈타트가 사형된 이후, 뮌처는 높으신 분들에 찍혀 유배를 당했다. 본래 중장 계급으로 제도방위 사령부 참사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해임당하고 변경의 경비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 뒤 현지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뮌처에게 있어 행운 아닌 행운이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그가 유배당한 뒤로 제도 오딘에는 '검붉은 6년'이라는 피바람이 불며 제위계승 경쟁의 여파로 수많은 사망자와 망명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은하제국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은 제23대 황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즉위했을 때, 황제는 뮌처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사법상서(법무부장관) 직위를 제수하고 맹인이 된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으며, 제국 내에 만연한 범죄와 각종 부정부패를 일소하게 하였다. 뮌처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프리드리히 3세 말기 이후 지속된 제국의 정치 혼란을 끝내는 데 일조하였다.
더불어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주장하며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의 20여 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단 1번도 동맹으로 먼저 쳐들어가지 않게 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거리의 폭거'(tyranny of distance)라는 개념을 들어 우리 은하의 3분의 1 수준까지 팽창한 인류를 무력으로 통일 지배하는 것은 어렵다고 진언했고,[3]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도 이러한 뮌처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유행성동맹 침공 계획을 파기했다.[4][5]
이후 제24대 황제인 코르넬리우스 1세 재위 시기까지 사법상서의 지위에 있었으며,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6] 하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맹을 정벌하겠다'고 선언하자 성격대로 꼬장꼬장 대들며 반대했다. 하지만 황제가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않자 결국 사표를 집어던졌다. 깜짝 놀란 코르넬리우스 1세가 제국원수봉을 수여하여 회유하려 했지만 당시 원수 직위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졌던 시기라서[7] 회유에 실패하였고 뮌처는 그대로 낙향하였다. 이후 행적은 언급되지 않는다.
3. 기타
다나카 요시키가 참고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중국 전한 시대에 행적이 비슷한 인사로 원앙이란 인사가 있다. 원앙은 매우 강직하고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한고제(유방) 시절부터 공이 큰 주발에 대해 '공에 비해 신하로서 너무 교만하게 행동한다'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했기에 당연히 주발과는 원수지간 수준으로 사이가 나빴다. 그런데 이후 주발이 모함을 받아 반란 혐의자로 조사를 받았는데, 원앙만이 주발에겐 죄가 없다며 끝까지 변호했기에 주발은 혐의를 벗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앙은 이후에도 매우 강하게 직언을 하다가 그 때문에 칼에 맞고 암살당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점을 보니 점쟁이가 "당신은 대체 얼마나 원한을 많이 산 겁니까? 당신을 죽이려 올 자객들이 엄청 많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까지 있다.[1] 은하영웅전설 Die Neue These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2] 잉골슈타트는 전투가 패전으로 끝난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사이가 최악이던 뮌처가 상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준 것이 나름 고마웠던 모양.[3] 우연찮게도 동맹의 아버지 응웬 킴 호아도 '거리의 방벽'이라고 비슷한 말을 했다. 이쪽은 제국과의 거리가 멀어 제국이 쉽사리 동맹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앞으로 1세기 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 이후에도 거대한 야심과 재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할 것이라 했는데 과연 1세기 뒤 다곤 성역 회전이 벌어지면서 실현되었고, 그 이후로도 코르넬리우스 1세나 본편의 라인하르트같은 능력과 야심이 모두 뒷받침되는 자만이 성공하거나 성공할 뻔했다. 심지어 라인하르트조차 동맹군이 제국령 침공작전으로 대폭 약화된 것을 이용했던 것이지, 만약 동맹이 제국과 군사력의 균형을 이어갔다면 섣불리 동맹 정복을 시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4] 그리고 또 다곤 성역 회전 당시 너무 많은 제국군 희생이 있었다. 총병력의 91%가 날아간 상황에서 장교단의 희생도 컸을 것이고 패전 후 검붉은 6년으로 혼란스러워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즉위했을 당시 다곤 성역 회전의 여파는 아직 수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패배한 제국은 그 피해를 복구하는데 10년이나 걸렸는데 이 때는 다곤 성역 회전 후 나라가 6년간 개판이었던지라 아무리 짧아도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이후로 10년, 심하면 그로부터 몇년 더 걸려야 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시기의 제국군은 재위 중기까지도 피해복구에나 신경써야 할 처지였을 것이다.[5] 물론 이건 제대로 대가리가 굴러가는 경우에나 그렇고 은하제국은 황제가 까라면 까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막시밀리언 요제프가 마음만 먹었다면 동맹 침공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국에는 다행스럽게도 막시밀리언 요제프가 제대로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6] 코르넬리우스 1세는 선황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중용한 인재들을 그대로 유임했고 뮌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7] 코르넬리우스 1세는 소함대 지휘관에게도 제국원수봉을 수여했을 정도로 원수 계급을 남발하였다. 코르넬리우스 1세가 동원한 동맹군 원정함대의 원수의 수가 무려 58명이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가 직접 통솔하는 부대는 원수 2개 소대"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