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90c23, #c8102e 20%, #c8102e 80%, #990c2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제1공화국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카를 레너 | 미하엘 마이어 | 요한 쇼버 | 발터 브라이스키 | |
제3대2 | 제5대 | 제6대 | 제5대2 | |
요한 쇼버 | 이그나츠 자이펠 | 루돌프 라메크 | 이그나츠 자이펠 | |
제7대 | 제3대3 | 제8대 | 제9대 | |
에른스트 슈트레루비츠 | 요한 쇼버 | 카를 바우고인 | 오토 엔더 | |
제10대 | 제11대 | |||
카를 부레슈 | 엥겔베르트 돌푸스 | |||
연방국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
엥겔베르트 돌푸스 | 쿠르트 슈슈니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
제2공화국 | ||||
초대2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카를 레너 | 레오폴트 피글 | 율리우스 랍 | 알폰스 고르바흐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요제프 클라우스 | 브루노 크라이스키 | 프레트 지노바츠 | 프란츠 프라니츠키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빅토르 클리마 | 볼프강 쉬셀 | 알프레트 구젠바우어 | 베르너 파이만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6대2 | |
크리스티안 케른 | 제바스티안 쿠르츠 | 브리지테 비어라인 | 제바스티안 쿠르츠 | |
제28대 | 제29대 | |||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 카를 네하머 | }}}}}}}}} |
오스트리아 제16대 총리 요제프 클라우스 Josef Klaus | |||
<colbgcolor=#D81E05><colcolor=#fff> 출생 | 1910년 8월 15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케른텐 | |||
사망 | 2001년 7월 26일 (향년 90세) | ||
오스트리아 빈 | |||
국적 | 오스트리아 | ||
임기 | 오스트리아 재무부 장관 | ||
1961년 4월 11일 - 1963년 9월 20일 | |||
오스트리아 총리 | |||
1964년 4월 2일 - 1970년 8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81E05><colcolor=#fff> 학력 | K.ö.St.V. 알름가우 잘츠부르크[1] (졸업) 빈 대학교 (법학 / 박사) | |
가족 | 배우자 에르네스티네 제이발트[2]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정당 | [[오스트리아 인민당| 인민당 ]] | ||
약력 | 국가노동조합 노동회의소 근무 독일 국방군 복무 잘츠부르크 주지사 오스트리아 재무부 장관 오스트리아 인민당 당수 오스트리아 총리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오스트리아 재무부장관과 총리직을 역임했다.2. 생애
1910년 케른텐에서 유명한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티롤의 주도인 클라겐푸르트에 위치한 가톨릭 신학교에 다녔다. 이후 빈 대학교의 법학부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빈 대학교 재학 당시 유대인 교수를 쫓아내는 학생 운동을 한 바 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파시즘 정권 하에서 국가노동조합의 노동회의소에서 법률 자문가로 근무하다가, 1938년 안슐루스가 일어나자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침공을 위해 징집되어 그 유명한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 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동부전선에서 여러 공훈을 세우지만 1945년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몇달간을 지냈다.전후에는 포로 수용소에서 잡범으로 풀려나 잘츠부르크의 할레인에서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얼마 안가 오스트리아 인민당에 입당한 그는 지역당의 대표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1949년 잘츠부르크 주지사직까지 올랐다. 이후 1961년까지 무려 12년동안이나 잘츠부르크 주지사를 맡았다. 1961년 오스트리아의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당시 소련과의 거래를 잘 조율하여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1964년 알폰스 고르바흐가 사퇴하자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올랐다.
1966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예산 문제로 크게 다퉈 사민당 내각 구성원이 전원 사퇴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았지만, 오히려 동년 총선에서는 역풍이 불어 그가 속해있던 인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에 클라우스 총리는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21년만에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파기하고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다. 요제프 클라우스 총리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언론 개혁, 예산 개혁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특히나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스 총리의 인기는 별로 좋지 못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가 그가 추진했던 언론개혁 때이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 성향의 언론인들이 언론 개혁을 통해 힘을 얻으면서 클라우스 총리의 나치 부역 문제 등이 수면위로 떠올랐고, 또 클라우스 총리의 불통 면모, 68 혁명 등 사회적인 분위기에 겹쳐 1970년 전후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제1당에 오르는 일이 일어났다. 비록 딱 1석 차이로 사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클라우스 총리가 오스트리아 자유당과 연정을 시도할 수는 있었으나, 클라우스 총리는 이를 국민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의 총리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1970년 정계를 은퇴했지만 이후 31년이나 더 살면서 무려 90살까지 장수했다. 죽을때까지 강연과 학술회의를 진행하면서 꾸준히 정책 조언자로 활동하다가, 2001년 노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조국전선| 조국전선 ]] | 1936 - 1938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8 | 안슐루스로 정당 해산 |
| 1938 - 1945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강제 해산 |
[[오스트리아 인민당| 인민당 ]] | 1945 - 2001 | 입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