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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23:45:18

윈필드 스콧 핸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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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필드 스콧 핸콕
Winfield Scott Hancock
파일:1000000012670.jpg
본명 윈필드 스콧 핸콕
Winfield Scott Hancock
출생 1824년 2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빌
사망 1886년 2월 9일 (향년 61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복무 기간 1844~1886
학력 노리스타운 아카데미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2.2. 남북전쟁2.3. 남북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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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빌에서 태어나 당대 존경받던 군인인 윈필드 스콧의 이름이 붙여졌다. 육군사관학교에 입대했고 1844년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초기엔 인디애나 준주에서 복무했으나 멕시코 푸에불라에 배치되어 전선에 투입되었고 멕시코시티 등 주요 도시에서 멕시코군과 전투를 치렀다.

전후 대위로 진급했고 플로리다주에서 복무하다가 3차 세미놀 전쟁에 참가했다. 이후 몰몬교와의 전쟁인 유타 전쟁에도 투입되었다.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휘하에서 복무했다. 이 때 버지니아 출신 루이스 아미스테드 등 여러 남부 출신 장교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들 남부인들은 남북전쟁 발발 후 남부연합군에 참가하여 핸콕의 적이 되었고, 특히 아미스테드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핸콕을 상대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는 영화 게티즈버그에서도 주 소재 중 하나로 나온다.

2.2. 남북전쟁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으로 참전했고 준장으로 진급해 포토맥군 휘하 보병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반도 전역 당시 윌리엄스버그 전투에서 반격을 주도했으며 이 때 상관 조지 매클렐런으로부터 최고(superb)였다는 극찬을 받고 'Hancock the superb'라는 별명이 생겼다. 앤티텀 전투당시 제2군단소속 제1보병사단장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성큰 로드를 사수했다.

하지만 프레드릭스버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조셉 후커의 본대를 엄호하다가 부상을 입고 부대역시 큰 피해를 받았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해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전투 첫날 제1군단장 존 F. 레이놀즈가 샤프슈터의 저격에 전사하자 조지 미드는 제2군단장 핸콕을 보냈다. 핸콕은 당시 군단장들 중 서열이 낮은 편이었지만 미드는 핸콕을 신뢰해서 포토맥군 좌익 전체의 지휘를 맡겼다. 핸콕은 기대에 부응해 세메터리 언덕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후퇴하는 대신 게티즈버그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여 게티즈버그 승전의 발단이 되었다.

전투 둘째날에는 세메터리 릿지 방어를 맡았고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연방군 좌익 공격에 맞서 지원군을 보내고 A. P. 힐의 중앙 공격을 훌륭한 지휘로 막아내는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미네소타 제1보병연대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전열이 안정된 뒤에서는 세메터리 언덕 동측에서 북군 포병대를 공격하는 주발 얼리의 사단을 막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서 얼리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셋째날에는 피켓의 돌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위치에 있었다. 핸콕은 돌격에 앞서 남군 포병대가 대규모 포격을 쏟아붓는 와중에도 말에 타고 휘하 병사들을 독려했다. 옛 친구인 루이스 아미스테드 준장은 돌격을 이끈 남군 장교들 중 하나였고, 결국 부상당해 이틀 뒤 사망했다. 핸콕 또한 오른쪽 허벅지에 중상을 입었지만 전투 끝까지 후방 이송을 거부했다. 전투 승리 뒤 핸콕은 승전의 최대 공로자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미국 의회의 공식 감사(Thanks of Congress)를 받았다.

하지만 핸콕은 부상 복귀 뒤 이전의 활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윌더니스와 스폿실베이니아 전투에서는 활약했지만 콜드 하버에서는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명령한 전방 돌격 끝에 휘하 제2군단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피터스버그를 조기에 함락시킬 기회를 잡았지만 동료 장군 윌리엄 F. '발디' 스미스의 판단에 따랐다가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피터스버그 전역에서는 림즈 스테이션 전투에서 상당한 패배를 당하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핸콕은 1864년 11월 지휘권을 내려놓고 후방에서 징병, 필립 셰리든의 뒤를 이은 셰넌도어 계곡 방어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랜트는 핸콕을 두고 남북전쟁에서 독립적인 지휘권을 가지지 않은 모든 장군들 중 가장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고 평했다.

2.3. 남북전쟁 이후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의 범인인 존 윌크스 부스의 공범들을 사형시키는 총책임자였다. 메리 수랏 등 상대적으로 죄가 가벼운 공범자들을 사형시키는 것을 꺼렸지만, 결국 군인으로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정규군 소장으로 승진한 핸콕은 서부 미주리 군관구를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샤이엔 부족과 협상에 임했으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등 부하들의 자극으로 인해 잘 풀리지 않았고, 핸콕이 버려진 샤이엔 마을을 불태우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남부 군정을 맡은 필립 셰리든의 강경한 정책에 불만을 가지면서 셰리든이 서부로, 핸콕이 남부로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핸콕은 셰리든보다 훨씬 남부 백인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로 구 남부연합 지지파에게 칭송받았지만 해방노예들과 공화당 급진파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핸콕은 민주당 내에서 큰 지지세를 얻었고 이후 10여년에 걸쳐 잠재적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다.

그랜트가 대통령이 되고 공화당 급진파가 정권을 잡은 뒤 핸콕은 남부 군정 대신 다코타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도 원주민 부족과 협상을 맡은 핸콕은 초기에는 잘 풀렸지만 1870년 이후부터는 마리아스 학살(Marias Massacre) 등으로 인해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한편, 옐로스톤 지역으로 탐사대를 보내면서 옐로스톤 보호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옐로스톤의 핸콕 산은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1872년 조지 미드가 사망한 뒤 핸콕은 군내 최선임 소장이 되었지만 그랜트 대통령은 규모는 크지만 한직인 대서양 군관구로 핸콕을 이동시켰다. 핸콕은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1877년 철도 파업 진압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큰 사건 없이 조용했다.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1881년 전미총기협회장이 되었으며 188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