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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13:36

제임스 롱스트리트

<colbgcolor=#003458><colcolor=#fff> 주오스만 제국 대사
제임스 롱스트리트
James Longstreet
파일:James_Longstreet.jpg
출생 1821년 6월 8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지필트 카운티
사망 1904년 2월 1일 (향년 83세)
미국 조지아주 개인스빌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복무 미군 (1842~1861)
아메리카 연합군 (1861~1865)
최종 계급 중장
참전 멕시코 전쟁
남북 전쟁
서명
파일:제임스 롱스트리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전쟁 이전2.2. 남북전쟁2.3. 전후

[clearfix]

1. 개요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는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육군의 장군이다. 로버트 E. 리 장군의 오른팔이자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의 부사령관이었다.

2. 생애

2.1. 전쟁 이전

182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지필트 카운티에서 부유한 네덜란드계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청년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관후보생 시절의 롱스트리트는 나쁜 성적과 문제많은 규율에 인해 웨스트포인트 56명의 사관후보생 순위에서 54번째였다. 허나 동급생들 중에서 인기가 매우 많아 조지 피켓, D. H. 힐, 존 포프, 조지 H. 토머스, 윌리엄 로즈크랜스, 율리시스 그랜트 등 이후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친구로 두었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롱스트리트는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의 명예소위로 임명되어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크게 활약했다.

2.2. 남북전쟁

이후 그는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인 남부로 귀환했고 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의 최고선두 부대인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에 배치된다. 이 전쟁에서 그는 제2차 불 런 전투,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치카무가 전투, 앤티텀 전투 등 수십번의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특히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당시 중요거점인 마을 프레데릭스버그를 북군이 일단 점령하게 놔두고 마을 후방에 있는 고지인 '마리의 고지(Marye's Heights)'에 있는 돌장벽을 북버지니아군의 엄폐물로 사용하여 북군의 번사이드 장군과 후커가 지휘하는 포토맥군의 진격로를 완벽히 차단하는데에 큰 공을 세우는 등 당시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됐던 장군이기도 하다. 허나 롱스트리트는 전쟁 초반부터 습관이었던 "지각"(late) 때문에 일부 몇몇 전투에선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고 너무 과감히 공격하여 아군에 손실만 보는 등 좋지 않은 습관이 항상 전투를 불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1863년 7월 3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이 크게 패할 때 그는 리가 명령한 돌격에 반대했고, 패배 이후 서부전선으로의 이동을 신청한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북부 침공 계획 자체에 반대했고, 한참 전인 챈슬러스빌 전투 이전부터 자신의 부대를 서부전선의 브랙스턴 브래그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늦게나마 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롱스트리트의 계획을 승인한 것이다.

1863년 8월 중순 서부전선에 배치된 롱스트리트는 치카모가 전투에서 북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의 실수를 정확하게 찌르며 승전에 크게 공헌한다. 허나 얼마 안 가 서부전역의 남군 테네시군 사령관인 브랙스턴 브래그와의 갈등으로[1] 독자적으로 병력을 지휘하여 철도 요충지이자 동부 테네시 연방주의자들의 거점이었던 녹스빌 공격에 나서게 된다. 앰브로즈 번사이드가 이끄는 녹스빌의 북군이 채터누가를 포위중이던 브래그의 남군을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와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계획한 이 공격을 반대했는데, 곧 북군 지원군이 몰려들 브래그의 채터누가 포위가 약화되면서 채터누가와 녹스빌 두 곳에서 모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롱스트리트의 우려는 그대로 적중하여 그의 녹스빌 공략은 번사이드에게 막혀 실패했고, 채터누가의 포위를 푼 그랜트가 녹스빌을 구원할 준비에 나서면서 후퇴를 강요받았다. 롱스트리트의 휘하 병력은 동부 테네시에서 겨울을 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북버지니아군에 합류한 롱스트리트는 1864년 5월 윌더니스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지만 전투 중 아군인 머혼 여단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게 된다. 1864년 가을 롱스트리트는 전선에 재배치되지만 얼마 안 가 애퍼매톡스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은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에 항복하게 되고 리 장군과 코트하우스에서 항복조약을 함께하게 된다.

2.3. 전후

전쟁 이후 롱스트리트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이사하였고 그레이트 사우저 & 웨스턴 손해보험회사의 사장이 된다. 허나 결국 이 사업은 실패하였고 이후 여러 사업에도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대부분이 실패하고 만다. 롱스트리트는 옛 친구 그랜트의 도움으로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지만, 존슨은 옛 남부연합 수뇌부 중 사면해줄 수 없는 사람 세 명으로 데이비스 대통령과 리, 그리고 롱스트리트를 꼽았을 정도로 롱스트리트를 경계했다. 1868년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급진파의 도움으로 롱스트리트 등 옛 남군 장교들은 사면받고 정치 등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롱스트리트는 그랜트를 지지했고, 그랜트는 취임 직후 롱스트리트를 연봉 6,000달러를 받는 뉴올리언스 세관 조사관(surveyor of customs) 자리에 임명해 주었다.

전후 그는 공화당 지지자이자 남부 재건(reconstruction)의 옹호자가 되었는데, 사관학교 시절 이래 그의 오랜 친구였던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며 승승장구한 것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부의 공화당 옹호자를 가리키는 멸칭인 스캘러와그(scalawag)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남군의 옛 동료들로부터 변절자로 비난받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리가 남군의 명예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남부에서는 더욱 평가절하되었다. 심지어 1873년에서는 뉴올리언스 경찰과 흑인 민병대를 이끌고 인종차별주의 백인 반군과 대처하기도 했다. 이후의 공화당 정권에서 롱스트리트는 여러 직책에 지원했고, 주 오스만 제국 대사, 철도위원 등 여러 공직을 거치게 된다. 노년의 롱스트리트는 다른 퇴역 장군들처럼 회고록을 남기고 1904년 2월 1일 조지아 주 개인스빌에서 사망하였다.


[1] 다만 이건 롱스트리트 탓이 아닌게 브래그는 자신의 성깔 때문에 부하 장군들과의 갈등이 전쟁 내내 심해서 사이가 좋았던 부하 장군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다. 브래그를 겪어본 치텀은 다시는 브래그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브레킨리지는 결투를 신청할 뻔 했다. 화를 쉽게 내는 다혈질이었으면서 원칙주의 경향이 얼마나 심했던지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에는 군경력 초기, 서부 개척지의 작은 부대에서 브래그가 중대장을 하고 있던 시절, 브래그는 부대의 병참장교도 겸직하고 있었는데, 중대장으로서 중대를 위한 추가 장비 신청을 올리고는 병참장교로서 거절했다는 야사가 실려 있다. 브래그의 상관은 이 사실을 알고는 브래그에게 "맙소사, 너는 부대 내 모든 장교와 싸우더니만, 이젠 네자신과도 싸우는거냐?"라고 외쳤다고. 뿐만 아니라 1847년 가을에는 그가 지휘하던 병사 중 한 명이 브래그의 침대 밑에 12 파운드짜리 포탄을 넣고 터트렸다. 다행히도 브래그는 천운이 도왔는지 상처를 입지 않고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