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9 22:00:45

조지 피켓

조지 에드워드 피켓
George Edward Pickett
파일:1000137482.jpg
출생 1825년 1월 26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사망 1875년 7월 30일 (향년 50세)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복무 미합중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최종 계급 아메리카 연합군 소장
복무 기간 1846~1865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미국-위그노 혼혈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성장했다. 이후 184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제8보병연대소속 소대장으로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가해 차풀텔펙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승리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롱스트리트와 절친이 된다.

1849년 대위로 진급해 윈필드 스콧휘하에 있었으며 전후 결혼해 워싱턴, 오리건 준주에서 복무했다.1859년 영국과 워싱턴 준주의 밴쿠버섬 샌후안제도를 두고 발생한 영토 분쟁인 돼지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후 미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남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하며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을 지지해 고향인 리치먼드로 돌아와 버지니아군 제1군단 소속으로 북군과 전투를 벌였다. 1861년 소령, 몇 달뒤 대령으로 진급했고 다음 해 준장으로 진급했다.

반도 전역에서 여단장으로 첫 전투를 치렀고 자신이 진두지휘한 두번의 돌격으로 북군의 방어선을 뚫었다. 이 과정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바로 복귀했다. 복귀 후 앤티텀 전투에 참가했다. 롱스트리트 휘하에서 존 벨 후드와 함께 서퍽 전역에 투입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당시 둘째 날 늦게 도착했고 7월 3일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로버트 E. 리가 피켓의 사단과 펜더, 히스 3사단에게 돌격명령을 내렸고 피켓은 세메레티 힐을 탈환하기 위해 돌격했다.[1] 하지만 북군은 이미 3면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남군도 엄폐물이 전혀 없는 개활지에서 돌격했으므로 돌격은 실패했고 1만 2500명 중 6,555명이 사상, 포로가 되었고 여단장 2명이 전사 1명도 포로가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뉴번, 버지니아 피터즈버그 공방전등 여러 전투를 치렀으나 모두 북군에게 패배하고 1865년 북군에게 생포되었다. 율리시스 그랜트에게 사면받고 1875년 간종양으로 사망했다.

3. 여담

그의 사촌인 헨리 히스는 사관학교 1년 후배이며 남북전쟁에 참전해 소장까지 올랐다.

돌격을 지시했던 로버트 리를 경멸하는 발언을 했으며 죽을때까지도 리를 경멸했다.


[1] 이를 피켓의 돌격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