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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1 12:43:35

윌리엄 그레이(제13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13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윌리엄 그레이
William Grey, 13th Baron Grey de Wilton
성명 윌리엄 그레이
William Grey
생몰년도 1508년경 ~ 1562년 12월 1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윌튼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체션트
아버지 제9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에드먼드 그레이
어머니 플로렌스 헤이스팅스
형제 조지, 토머스, 리처드
아내 메리 서머셋
자녀 아서, 호노라, 윌리엄
직위 제13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칼레 수비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남작, 군인. 거친 구혼 시기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메리 1세 시기 칼레 수비를 맡았으나 끝내 프랑스군에게 빼앗겼다.

2. 생애

제9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에드먼드 그레이와 랄프 헤이스팅스 경의 장녀 플로렌스 헤이스팅스의 네번째 아들이다. 151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세 형 조지(? ~ 1515), 토머스(1497 ~ 1518), 리처드(1507 ~ 1520)가 잇따라 작위와 영지를 계승했지만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고, 그가 1520년부터 제14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으로서 가문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바았다. 1529년 11월 3일 헨리 8세에 의해 처음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었다.

1544년 초대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 경의 지휘 아래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그는 몽트뢰유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후 기병대 사령관에 선임되었다가 1545년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에게 자리를 넘기고 불로뉴의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546년 샤티용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하는 등 군공을 세웠으며, 왕으로부터 보상과 승진을 약속받았지만 1547년 1월 헨리 8세가 사망하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6세 재위 첫 해인 1547년, 윌리엄은 어린 왕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대신 통치하는 호국경을 맡은 에드워드 시모어 휘하 원정대에 가담하여 기병대 대장을 맡였다. 1547년 9월 10일 핑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기병 돌격을 감행해 대승에 일조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후 회복된 뒤 9월 22일 흄 성을 인도받는 행사에 참여했으며, 9월 28일 에드워드 시모어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에드뭐드 시모어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그는 베릭 총독, 동부 변경의 관리인, 북부 지역의 사령관으로서 스코틀랜드 전선에 남았다.

1548년 4월 18일, 윌리엄은 토머스 팔머와 함께 다시 국경을 넘어 헤딩턴으로 진군하여 점령하고 철저히 요새화했다. 6주 동안 방어 시설을 개선한 후, 그들은 수비대 2,500명을 남겨두고 진군하여 달키스 일대를 약탈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 에든버러 주변 6마일을 황폐화한 후 베릭으로 돌아갔다. 1549년 여름 잉글랜드 각지에서 특별세 부과에 반발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그 해 7월, 그는 기병과 보병 1,500명을 이끌고 옥스퍼드셔로 파견되어 그곳의 질서를 회복하고 반란을 사주한 사제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이후 웨스트 컨트리로 진군하여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과 함께 가톨릭 신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데번과 콘월을 평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51년 에드워드 시모어가 중신들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체포되었을 때, 윌리엄은 에드워드 시모어의 지지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에드워드 시모어가 처형된 후 석방되었고, 왕의 총애를 되찾은 뒤 칼레 수비대장에 선임되었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했을 때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함께 제인 그레이를 잉글랜드 여왕에 옹립하려는 시도에 동참했으나 실패했다. 그렇지만 메리 1세는 1553년 7월 21일에 그를 비롯한 단순 가담자들을 사면한다고 선언했고, 그는 그 덕분에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57년, 프랑스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손잡고 자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잉글랜드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칼레 침공을 준비했다. 윌리엄은 이 사실을 감지하고, 현재 칼레에 주둔한 병사가 너무 적어서 증원군이 없으면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소규모 분견대만 파견되었고, 그에게는 1,000명 가량의 병력만 주어졌다. 여기에 한 겨울에 접어들면서 칼레와 그 주변 기옌 일대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그 해 12월 1일, 윌리엄은 뷔지니에 주둔한 프랑스 분견대를 기습 공격해 섬멸했다. 그러나 12월 22일 프랑스 대군이 아베빌에 진군했고, 윌리엄은 칼레 총독 토머스 앤트워스와 함께 메리 1세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긴급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구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1557년 12월 31일부터 칼레를 포위했다.

윌리엄은 칼레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지만 병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1월 6일 칼레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잉글랜드 정부는 급히 3만 가량의 병력을 동원해 해안으로 신속히 이동하도록 했고, 메리 여왕은 1월10일 군대에게 됭케르크로 건너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합세해 기옌을 구원하고 칼레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영국 해협에서 해상 폭풍이 발생하는 바람에 함대가 파괴되거나 조난당했고, 결국 기옌은 운명에 맡겨졌다. 그는 1,100명의 병사와 함께 기옌 성으로 들어가서 맞서 싸웠지만, 제2대 기엔 공작 프랑수아 1세이 동원한 포병대의 맹공을 받고 방어선이 붕괴되자 결국 항복했다.

기즈 공작은 윌리엄을 피에르 스트로치 원수에게 넘겼고, 스트로치는 다시 라 루슈푸코 백작에게 넘겼다. 윌리엄은 2만 크라운을 지불할 때까지 포로로 남아 있어야 했고, 이로 인해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고, 윌튼에 있는 그의 옛 성이 매각되었다. 윌리엄은 1558년 4월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선출되었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길버트 데식 경이 그의 선출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1559년 1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휴전이 맺어진 뒤, 윌리엄은 프랑스 측의 비밀 평화 제안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

1559년 12월 베릭 주지사, 스코틀랜드 변경 관리인, 그리고 타인데일과 레즈데일의 보안관을 맡았다. 1560년 2월 27일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 개신교 귀족들이 스코틀랜드 내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잉글랜드군이 개입한다는 내용의 베릭 조약이 체결된 뒤, 윌리엄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대규모 프랑스군에 맞서 스코틀랜드군을 돕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군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1560ㄴ녀 3월28일, 윌리엄은 제9대 볼턴의 스크로프 남작 헨리 스크로프, 제8대 퍼시 백작 헨리 퍼시와 함께 보병 6천 명, 기병 2천 명을 데리고 트위드 강을 건넜다. 그 해 4월 4일, 스코틀랜드 개신교 영주들이 프레스턴펜스에서 그와 합류했다.

하지만 당시 개신교 영주들의 병력이 매우 부실했고, 리스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압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결국 윌리엄은 리스를 포위만 했을 뿐 섣불리 공성전을 벌일 엄두를 못 냈다. 이후 평화 협상이 이어졌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윌리엄은 대포를 리스 시내에 퍼부어 굴복시키려 했다. 1560년 4월 30일, 리스 시내 3분의 1이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수비대가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했고, 시간을 질질 끄는 윌리엄에 대한 불만 제기가 군내에서 갈수록 빗발치자, 윌리엄은 5월 7일 리스를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장교 절반과 병사 800명이 참호에서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윌리엄은 프랑스군의 역습으로부터 진지를 완고하게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리스를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560년 7월 7일 리스에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에서 동시에 철수한다는 내용의 에든버러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윌리엄은 베릭의 총독이자 두 국경의 관리인이 되었다가 존 포스터에게 중앙 국경 관리인을 양도했다. 1560년 12월, 그는 베릭에서스코틀ㄹ내드 대사를 접견하고 최선 요새를 직접 보여줬다. 1561년 현역에서 물러난 뒤 남쪽으로 내려갔고, 1562년 12월 14일 하트퍼드셔 월섬 인근 체션트에서 사위 헨리 데니의 집에서 사망했다. 이후 지역 교구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