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EA1><colcolor=#fff> 유상규 劉相奎 | |
출생 | 1897년 11월 10일 (39세 사망) |
평안북도 강계군 | |
사망 | 1936년 7월 18일 |
자녀 | 3남 |
본관 | 강릉 유씨 |
호 | 태허(太虛) |
묘소 | 망우역사문화공원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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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시대 의사
유상규는 일제시대에 의사로 지내던 조선의 엘리트였다. 당시 우리나라 의사의 수를 추산한다면, 의학교와 부속의학 강습소 출신 212명,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53명, 일본 등지 유학을 통한 의사 10명을 합해 약 275명이었다.[1]2. 약력[2]
- 1897년 평안북도 강계군 출생-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 1919년 3.1운동 참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에서 근무
- 1920년 흥사단 입단
- 1923년 일본 생활
-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복학
-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 조수
- 1930년 조선의사협회 간사. 경성제대 의대 약리학교실 박사과정
- 1932년 경성의학 전문학교 외과 강사
- 1936년 세균감염증으로 별세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3. 가족[3]
아버지 유영성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유상우와 이복동생 유상의가 있다.강계지역에서 한의사로 이름난 유상규의 할아버지 유신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신진은 상인 조직 상무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지역 유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유상규는 이화사범학교를 졸업한 이애신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첫째 아들 공섭은 유상규의 죽음 이후,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호적에는 둘째 아들 옹섭이 장남으로 올라 있다.
4. 생애[4]
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 강계군 명신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신학교를 1916년 3월 졸업한 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1기로 입학한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 4년동안 안창호의 비서, 그리고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으로 일했다.(당시 교통국은 독립운동 자금을 가져오는 비밀통로였기에, 확실한 신뢰없이는 맡을 수 없는 자리였음)상하이 임시 정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내분으로 인해 그는 1923년 6월, 일본으로 이동하여 1924년 1월까지 노동자들과 동거하며 토목, 비누공장 일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의 노동 생활은 유상규가 1926년 5월 1일 '동광'의 창간호부터 8호까지 연재한 글인 '방랑의 일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5]
1924년 1월 15일,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22일만인 1924년 2월 6일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다.(체포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검속으로 추정)
1925년 4월 13일, 6년 만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27년 3월 23일 졸업한 뒤 그해 이애신과 결혼하였다. 이후 1928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임명되는데, 이는, 이미 교수였던 경성의전 동급생 백인제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의 오자와 교수 지도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1936년 박사학위 '약리학적 입장에서 관찰한 Roentgen선 작용에 관한 일고찰에 취하야'를 작성한다.
5. 사회 참여[6]
그가 학업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흥사단 소속 모임인 수양동우회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흥사단 활동에 대한 기록은 '동우회 사건'[7]에 대한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이 단체의 기관지 동광(東光)의 발행에도 관여하고 기고도 하였다. 그가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은 27편으로 확인되는데, 위생을 포함한 건강 강조, 미신 및 주술 배격, 안락사 지지, 여성의 독립 강조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또한, 그는 의사단체를 만드는 데에도 관여하였다. 1930년 2월 21일 한국인 의사와 치과의사로 구성된 조선의사협회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간사/서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대중을 상대로 의학강연회의 연사로 나서며 적극적인 사회참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 글을 통해 본 유상규의 사상[8]
유상규는 1924년 귀국한 뒤, 일본에서의 노동 체험을 담은 '방랑의 일편'을 시작으로 1936년 사망 전까지 의사로서, 지식인으로서, 민족운동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다. 잡지와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은 현재까지 27편이 발견되었다. 그는 초기에 '태허'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이는 발행 초기 당시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9]그의 유고는 내용상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 개인의 경험과 회고를 담은 글
- 보건의료에 대한 인식과 제도 등의 개선에 관한 글
- 지식인으로서 당대 사회에 대해 비평한 글
그의 글은 상당수가 전근대적 의식과 제대에 대한 개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보건의료와 관련된 글에서는 의료제도와 의사에 대한 신랄하게 비판하고, 환자와 언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또한, 적즉적 안락사에 대한 내용과, 이혼에 대한 생각을 밝히며 당시로서 주장하기 힘든 급진적인 입장도 서슴없이 내비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값싼 동족애[10]
당시 의사들은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당시 가난하여 진료를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는데, 언론은 의사들을 향해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편다며 비난했고, 또한, 의사들이 "병인을 진단하기 전에 빈부를 진단하는 악습이 있는가? 없는가?"라며 추궁하기도 했다.[11] 심지어는 의사가 매춘부보다 못하다는 모욕적 비난이 1면 사설로 나오기도 했다.하지만 의사회 역시 근본적으로 이익단체였고, 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될 리가 없었다. 뻔뻔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의사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유상규는 이러한 언론의 기사와 사설을 읽고 화가 많이 났다. 1935년 신간 '개벽' 제4호에 글을 실었는데 논조가 벼르고 벼른 느낌이었다. 언론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의 화살을 의사들에게 돌리며 매도한다며 분개하였다.
1934년 7월 21일, 남부 지방에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였고 당시 언론은 재해를 신속히 보도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며 구호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수재 의연금품 모금에 나서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유상규는 언론을 비판하며 그해 10월 '신가정'에 '값싼 동족애'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다.
그가 기고한 글에서 두가지가 신기하다고 하였는데, 그 하나는 신문사들이 두 달간 수만 명에게서 정력적으로 모은 의연금 누계가 서울 외곽 별장들 중 가장 작은 한 채의 값보다 많지 못하고, 그즈음 흔히 보는 금광 졸부들의 첩으로 들이는 기생 한 명의 몸값 만큼도 못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언론이 걷는 의연금품이 엄청난 손해와 수만 명의 이재민을 다 구해낼 듯이 떠들고 비참한 광경을 화보로 알리던 지면에 '7월에 백중달'같이 시절을 즐기는 화보를 내보내면서 마치 구제가 끝났다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었다. 그는 언론의 이중성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였다.
8. 죽음[12]
1936년 7월 18일, 발가락 세균감염증으로 인해 급사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박사 학위 통과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나의 신체를 연구 재료로 해부해다오"라며 유언을 남겼다. 사망 이틀 뒤인 1936년 7월 20일 경성의전 교정에서 장례가 거행되었다.그의 죽음에 대해 조선의사협회는 조선의보에 영정사진을 게재하고, 조사(弔辭)를 싣고, 그의 박사학위를 게재하였다.
백인제는 "실로 제 일생에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으리 만치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통곡하였다"고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 또한, 훗날 페니실린이 나왔을 때, 조금만 더 빨리 나왔다면 유상규가 치료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였다.
안창호는 1938년사망 전, "평소 아들같이 여기던 유상규 군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고, 실제로 두사람의 묘는 나란히 조성되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강남에 도산대로와 도산 공원을 만들면서 1973년 안창호의 묘를 도산공원에 이장하였고, 그의 유언은 무시되고 말았다.
[1]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2]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3]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2009). 식민시대 지식인, 유상규(劉相奎)의 삶의 궤적. 의사학, 18(2), 157-172.[4]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5]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2009). 식민시대 지식인, 유상규(劉相奎)의 삶의 궤적. 의사학, 18(2), 157-172.[6]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7] 동우회 사건은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검거한 사건으로,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181명의 지식인이 검속되었다. 유상규가 사망한 뒤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일제의 공판 증거자료에 유상규의 흥사단 활동 내용이 나온다.[8]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2009). 식민시대 지식인, 유상규(劉相奎)의 삶의 궤적. 의사학, 18(2), 157-172.[9] '동광'은 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띤 잡지였기에 실제로 1927년 8월 정간되었다가 1931년 속간되었고, 이후 1933년 1월 폐간되었다.[10] 조형근. (2022). 우리 안의 친일 - 반일을 넘어 탈식민의 성찰로. 역사비평사.[11] 동아일보, 1933.11.12.[12]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