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02:00:39

유상설

파일:유상설.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0년 11월 1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모현리
(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488번지)
사망 1943년 12월 26일 (향년 53세)
전라남도 장성군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90년 11월 1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모현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48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때 신경식(申耕植)·유상순(柳相淳)·고용석·정병모 등의 마을 유지들과 함께 이곳의 고유 풍속인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박승화(朴承化)의 집앞 냇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담을 나누었다.

이때 그는 고용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를 알려주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자 한편에서는 「대한독립기」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마을 주민에게 연락하여 2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위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모현리 일대를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일본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동자 검거를 시작하게 되자 그도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1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유상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