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07-12 11:33:58

응대여류

고사성어
응할 대답할 같을 흐를

1. 겉뜻

말대답이 물 흐르는 듯하다.

2. 속뜻

언변이 유창하다는 뜻이다.

3. 유래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 제나라에 서면(徐勉)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학문을 좋아하는 데다 6살 때 제문(祭文)을 지을 정도로 천성이 매우 총명하여 주위에서는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18살 때 국자감[1]의 학생이 되었는데, 그를 본 국자감 좨주(祭酒)는 그가 장차 재상이 될 것이 틀림없다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2].

서기 502년 제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소연양나라를 세워 제위에 오르니, 그가 곧 무제(武帝)다. 무제는 등극하자마자 서면을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임명하고 국정을 도맡기다시피 했다. 서면은 임금의 그와 같은 신임에 깊이 감사하며 전심전력을 다해 보필했다. 당시 양나라는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와 한창 전쟁을 하는 중이었으므로, 서면은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로 공무에 파묻혀 살았다.

"그렇게 무리하시다가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가능한 한 자주 집에 들어오셔서 휴식도 취하셔야지요."

집안 식구들이 이처럼 걱정했으나, 서면은 결연히 말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 가정을 잊은 사람이니, 내가 죽고 나면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그의 책상 위에는 처결해야 할 공문서가 항상 수북이 쌓여 있었고 잠시도 쉴새없이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누가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들여 대화를 하는데 그 말대답이 물 흐르듯이[3]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지만 한번도 공직자로서의 자세가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며, 부하들에게는 근엄하면서도 항상 관대하여 신망이 높았다.
[1] 수나라 때 중국 주요 도시에 설치된 이후 청나라 때까지 기능한 중국 역대 왕조의 중앙 최고학부 교육기관[2] 徐勉字修仁,東海郯人也。祖長宗,宋武帝霸府行參軍。父融,南昌相。勉幼孤貧,早勵清節。年六歲,屬霖雨,家人祈霽,率爾為文,見稱耆宿。及長好學,宗人孝嗣見之歎曰:「此所謂人中之騏驥,必能致千里。」又嘗謂諸子曰:「此人師也,爾等則而行之。」年十八,召為國子生,便下帷專學,精力無怠。同時儕輩肅而敬之。祭酒王儉每見,常目送之,曰:「此子非常器也。」每稱有宰輔之量 - 南史/卷60[3] 應對如流(응대여류)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