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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2:16:40

이봉포

파일:이봉포.jpg
제2대 주독 청국공사
정체 李鳳苞
간체 李凤苞
영문 Li Fengbao
중국식 독음 리펑바오
단애(丹崖)
출생 1834년
청나라 강소성 숭명현
사망 1887년 (향년 53세)
청나라 강소성 숭명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1862-1889).svg
학력 가정교육
직업 외교관, 정치가, 기술자, 학자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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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외교관, 기술자. 주독 청국 공사를 지냈으며 청나라 해군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생애

1834년 강소성 숭명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서양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수학과 제도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1863년 강소여도국에 들어갔다. 이때 영국인 선교사 존 프라이어와 함께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다수의 군사기술 서적을 번역하며 특히 독일의 선진 야포기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이때 <극로백포탄조법>, <극로백포병약법>, <극로백포준심법>, <극로백포설> 등을 국내에 들여와 청에서 최초로 크루프 야포를 소개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크루프식 야포를 대대적으로 수입하여 기존의 영국제 암스트롱포를 대체하게 된다. 1871년 강소순무 정일창의 추천으로 증국번이홍장이 만든 강남제조국에 들어가 7년간 지도제작을 담당하였다. 1876년 정일창이 복건순무 겸 성정대신에 임명되자 복주선정국으로 이임하였으며 마가리 사건이 발생하여 프랑스와 협상할 때 청국 대표인 이홍장을 보좌하였다.

1877년, 이홍장과 정일창의 추천으로 복건선정학당 해외유학생 감독에 임명되어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홍장 이봉포에게 철갑선 구매, 수뢰 구매, 헨리-마티니 소총 구매, 독일과 영국의 청국 유학생 관리, 광산전문가 육성 등의 임무를 주었다. 1878년 8월, 이봉포는 영국공사 곽숭도와 이홍장의 추천으로 제2대 독일공사로 임명되었다. 취임 직후 영국으로부터 엡실론, 제타, 에타, 세타 등 4척의 문자선 구매를 신임 영국공사 증기택과 같이 지휘하였다. 공사로 재임하며 1878년 10월 27일부터 1879년 1월 21일까지 3개월간의 견문을 담은 <사덕일기>를 편찬하였다.

1879년 일본의 류큐 왕국 합병에 충격받은 이홍장의 지시로 순양함 구매를 지시받아 영국으로부터 초용(超勇)과 양위(揚威) 등 렌델식 순양함 2척을 구매하였다. 이때 이홍장에게 유럽 각국의 철갑선 제조가 둔화되었음을 보고하고 철갑선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군함을 수리할 부두와 포대, 그리고 쾌선과 수뢰를 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철갑선 구매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1880년, 이홍장은 오스만 제국을 위해 영국에서 건조하고 있던 철갑선을 자신들이 대신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으나 영국은 철갑선이 청나라에 갈 경우 다시 러시아에 인도될 수 있다고 우려하여 이를 거절했다. 영국으로부터 철갑선을 구매하려는 이홍장의 계획이 좌초되자 주청 독일공사 막스 아우구스트 폰 브란트가 독일에서 구매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고 이것이 성사되면서 청나라는 독일로부터 2척의 군함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이다. 정원과 진원이 진수된 불칸조선소를 일찍이 수차례 참관한 바가 있는 이봉포는 구매과정을 총지휘하였다. 이봉포는 초기에 프랑스제 철갑선 구매를 타진했으나 폰 브란트 공사의 주선 이후 독일로 갈아타게 된다. 같은해 이홍장으로부터 수뢰 50구를 구매하도록 지시받기도 하였으나 증기택은 수뢰의 기술적 신용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3국 대신을 겸임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외국 무기 수입사업을 지휘하였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2등 참찬인 기술자 서건인과 함께 일하였다. 1882년, 어뢰정 건일과 건이, 순양함 제원의 추가 발주를 계약하였으며 어뢰무기를 교육하기 위한 기술자들을 중국에 초빙하여 교육시키는 사업을 맡았다. 1884년 제원호의 설계상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청불전쟁이 발발하여 정원과 진원이 청나라에 인도되는 것이 지연되자 이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현대적인 무기 거래에 대해 무지했던 문인들이 이봉포가 독일로부터 60만 냥의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기에 이르렀고 이홍장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이봉포는 허경징이 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오스트리아 헝가리 주재 6국 공사에 임명되면서 독일 공사직을 박탈당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북양수사학당에서 일하였으나 뇌물 수수 의혹이 끊이지 않자 견디지 못하고 은퇴하여 고향인 강소성 숭명현으로 낙향해버렸다. 이후 근대군사기술에 대한 저술과 번역에 종사하였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1885년 번역되어 해권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해전신의>가 있다. 이후 여순에 군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하며 1887년 6월에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