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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19:14:39

이재관(1920)

파일:이재관(192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야스모토 자이칸(安本在官)
경헌(敬憲)
본관 함안 이씨[1]
출생 1920년 11월 4일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월치마을 197번지
사망 1986년 9월 2일 (향년 65세)
경상남도 고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11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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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20년 11월 4일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월치마을 197번지에서 아버지 농포(農圃) 이보환(李寶煥, 1902. 2. 9 ~ 1965. 1. 5)[2]과 어머니 전주 최씨 최성남(崔聖南, 1901. 1. 14 ~ 1961. 4. 12)[3] 사이에서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월치마을 97번지로 이주했다.

일본 도쿄농업공예학교 재학 중이던 1939년 2월, 도쿄도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에서 시마네현립 마스다(益田) 농림학교(島根縣立農林學校)[4]에 재학 중이던 같은 마을 친구 이상호[5]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재일학생동지회(在日學生同志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뒤 동지들과 함께 다른 동지를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1939년 11월 도쿄도에 있던 심재인(沈載仁)의 하숙집에서 심재인을 비롯해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과 만났는데, 이날 박근철이 같은 학교 일본인 학생인 테라사키 유키오(寺埼行雄)에게 구타를 당한 뒤 "조선인이면서 건방지다"라는 민족을 멸시하고 깔보는 질책을 듣고는 스스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며 호소하였다.

이때 이들 4명은 조선이 일본에 비하여 문화수준이 낮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사람에 대하여 교육을 시행하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관청의 상석(上席)은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고, 급료도 내지인에게는 조선인의 곱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소학교도 내지인은 모두 입학시키고 있으나 조선인은 불과 몇 할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으며 졸업자의 취직도 조선인에 대하여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모든 영달(榮達)도 불리하게 되어 있다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멸시당하는 원인을 여러 방면으로 파악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차별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조선인들이 분발하여 일어나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떠나 독립해야 된다고 각오하며 모든 것을 민족적으로 관찰함에 이르렀다.

이후 이들 4명은 테라사키 유키오가 행한 행동의 부당함을 규탄하며 조국을 가지고 싶은 자의 비애를 느꼈고, 이에 스스로 실력을 양성해 조선인의 독립을 도모하고자 협의, 결정하여 차후 삼인정신(三人精神)이라 칭하며 삼삼인단(三三人團)을 창설했다. 또한 지금 상태로서의 조선민족의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성공의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떨쳐 일어나 실력을 양성하고 동지를 모으는 시기에 대해서 토의, 결정한 뒤 심재인의 제의에 대해서는 배신자는 목을 베는 것도 불사할 것이라 맹세했다.

그러던 1940년 4월,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에서 심재인이 자신이 재학 중이던 이사하야 농업학교의 신입생 입학 자축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 이상호·이상만·박근철 등을 비롯해 박응구(朴應九)·이호(李虎)·김상훈(金相勳)·김민남(金敏男)·고연하(高蓮河)·정진근(鄭鎭根)·송병홍(宋柄虹)·손병주(孫炳柱)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 이들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6]이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당분간은 스스로의 자질을 향상하도록 하고 각자의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해 조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재일학생단은 국내에서도 조직활동에 들어갔고, 80여 명의 동지를 모으는 데 이르러 각 지역에 조직망을 갖추기도 했다. 또한 일본 제국의 교육정책 및 농업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40년 8월 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비밀리에 만나는 등 총 6회에 걸쳐 다가올 조국독립에 대해 의논하고 독립의식을 길렀으며, 도쿄도 및 우츠노미야시에 있던 재일학생단의 본부 및 도쿄도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 우에노 공원 등을 거점으로 활용하여 심재인·박응구·김상만·박근철·이상호·정덕수(丁德秀) 등과 함께 국내와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몇몇 동지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던 중 심부름을 시켰던 아이의 실수로 도중에 동지들 간의 연락 관련 문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필 이를 당시 예천경찰서 고등계에 조선인 형사로 있던 타카마츠가 입수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국내와 일본에 있던 동지 80여 명이 전부 제거되어 예천경찰서 등 각 경찰서의 유치장에 구금된 뒤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그 뒤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고, 1942년 11월 13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43년 4월 7일[7]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86년 9월 2일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1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판사공파(判事公派) 23세 재(在) 항렬.[2] 자는 찬여(贊汝).[3] 최주순(崔鑄淳)의 딸이다.[4] 1948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농림고등학교, 1949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고등학교 농업부, 1967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농림고등학교 등의 이름을 거쳐 1996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산업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08년 폐교되었다. 한편, 1953년 분리된 시마네현립 마스다(益田) 쇼요(翔陽) 고등학교는 지금까지 존재한다.[5] 같은 마을에 같은 함안 이씨 집안 사람이다. 다만 족보상 이재관은 판사공파(判事公派) 23세 재(在) 항렬로, 운포공파(雲圃公派) 25세 상(相) 항렬인 이상호와는 32촌 지간이며 이재관이 이상호에게 할아버지 뻘이 된다.[6] 1939년 11월 심재인과 박근철·이상만·이재관 등이 조직한 삼삼인단(三三人團)의 점조직이다.[7]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4월 8일 또는 5월 7일로 기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