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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07 22:05:05

이준(조선)

{{{#white 이 준(李 浚)
자(字) 동지(洞之)}}}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관향 원주(原州)
출생 선조 12년 1579년 9월6일
사망 인조 23년 1645년 3월26일
호(號) 귀래정(歸來亭)
관직 형조좌랑(刑曹佐郞)
예조좌랑(禮曹左郞)
운산군수(雲山郡守)
안흥첨사(安興僉使)
의주부윤(義州府尹)
배(配) 정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슬하 2남 4녀
1. 개요2. 일생3. 가족4. 추모5. 참고문헌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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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이준(李浚)이고 자(字)는 동지(洞之)이고 호(號)는 귀래정(歸來亭) 또는 둔정(遯亭)이다.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이영화(李英華)의 현손(玄孫)이요 아버지는 참판(參判) 이연복(李延福)이다.

2. 일생

아버지 이연복(李延福)과 정부인(貞夫人) 인천채씨(仁川蔡氏) 채구징(菜九澄)의 따님 사이에서 2남 4여 중 2남으로 선조(宣祖12년)己卯 1579년9월6일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 금여(金輿)에서 태어났다.
이준(李俊)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천성(天性)이 정의감(正義感)이 강하고 세상 그릇됨을 한탄(恨歎)하여 의분심(義奮心)이 넘쳤으며 지략(智略)이 훌륭했다.

1597년(丁酉) 선조(宣祖 30)에 왜적(倭敵)이 또 들어왔을 때 사촌누이 조실(曺室 曺長日의 처)과 한실(漢室 韓得宗의 처)이 왜적(倭敵)의 침범(侵犯)으로 순절(殉節)함에 깨달은 바가 있어 창의(倡義). 결진(結陣)하였다, 그리고 강진(康津) 성산(城山)의 길목을 굳게 막아 많은 적도(敵徒)를 모조리 죽인 공(功)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기록되었다.(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록 됨)

1600년(庚子) 선조(宣祖 33)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히고, 1606년(丙午) 선조(宣祖 40)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정(僉正)으로 도총부(都摠府)에서 일하였다.
1607년(丁未) 선조(宣祖 41)에 함경도(咸鏡道) 북병영(北兵營)에 배속(配屬)되었을 때 만주(滿洲)의 건주위(建州衛)에서 일어난 여진족(女眞族)의 추장(酋長)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일당(一黨)이 북변(北邊)을 침범(侵犯) 약탈(掠奪)하니 이준(李俊)은 군량(軍粮). 기장(器仗)을 보급(補給)하려고 북포대(北砲臺)에 들어가 9일 동안 싸워 끝내 물리쳤다.

1608년 비변사(備邊司)에 돌아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그리고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으로 근무했던 1612년(壬子) 광해(光海 4)에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들고 나와 이제남(李悌男)이 무고(誣告)로 죽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해를 입으며 원로대신(元老大臣) 이항복(李恒福). 이원익(李元翼)이 귀양(歸鄕)가는 등 정국(政局)이 소란함에 병(病)을 핑계 삼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광양(光陽) 구포(鳩浦)에 정자(亭子)를 짓고 귀래정(歸來亭)이라 이름 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려 했다.

1623년(癸亥) 인조(仁祖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국(政局)이 뒤바뀌면서 예조좌랑(禮曹佐郎)으로 특배(特拜)되었고 이어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배수(拜受)하였다.
1623년(甲子) 인조(仁祖 2) 벽동군수(碧潼郡守)를 배수(拜受)하여 병갑(兵甲)을 수선하고 화약을 만들어 저장하였으니 그 치적(治績)의 성명(聲名)이 높았다.
1626년(丙寅) 인조(仁祖 4)에 다시 비변사(備邊司)에 들어가 이듬해에 익찬(翊贊) 이인거(李仁居)가 횡성(橫城)에서 역모(逆謀)의 뜻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음에 이 토벌(討伐)에 공(功)을 세워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1등에 기록되었다, 이어 군적사(軍籍使)가 되어 호남과 영남 각 진영(鎭營)과 군현(郡縣)의 군적(軍籍)을 점검(點檢). 규찰(糾察)하였다.
1629년(己巳) 인조(仁祖 7)에 안흥진(安興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배수(拜受)받고 이듬해에 명나라에 반란(反亂)을 일으킨 유흥치(劉興治)를 토평(討平)하는 조명(朝命)이 내림에, 이준(李俊)은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의 중군(中軍)이 되어 오도(五都)의 주사(舟師)를 영솔(領率)하고 그를 쳤다.
1631년(辛未) 인조(仁祖 9)에 선천부사(宣川府使)를 배수(拜受)하여 검산산성(劍山山城)을 쌓고 6월 오랑캐 보기(步騎)가 압록강(鴨綠江)의 얇은 여울을 골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정주(定州).가산(嘉山).박천(博川) 및 선천(宣川)에 들어와 한인(漢人)들을 짓밟고 빼앗아감에 이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정상(情狀)이 관찰사(觀察使) 민성휘(閔聖徽)와 순무사(巡撫使) 이명웅(李命雄)에게 치보(馳報)한바, 순무사(巡撫使)는 조정(朝廷)에 상계(上啓)하여 명나라에까지 이첩(移牒)하였던 치적(治績)이 있었다, 이듬해에 임금이 접반사(接伴使) 김대덕(金大德)을 시켜 이준(李俊)의 치적(治績)을 가상(嘉尙)하는 유서(諭書)와 함께 수의(繡衣) 한 벌을 내리는 은고(恩故)를 입었다.
1634년(甲戌) 인조(仁祖 12)에 부정(副正)이 되었고 1635년(乙亥) 1월20일 춘신사(春信使)의 망명을 받아 곧바로 심양(瀋陽)으로 떠나 그해 4월15일에 돌아왔다.
이때 후금(後金)의 세력(勢力)은 크게 강성(强盛)해지더니 정묘호란(丁卯胡亂)이후 우리나라에 터무니없이 많은 세폐(歲幣)를 요구해왔다, 그동안 신득연(申得淵)을 보냈으나 쫓김을 당하였고 김대건(金大乾)을 보냈으나 그 요구(要求)를 감당(堪當)하지 못했다, 이쯤 되니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시양(金時讓)이나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도 상소(上疏)하여 “옛 한당(漢唐)의 예(例)를 들어 강약(强弱)이 부동(不同)이면 세폐(歲幣)를 면(免)치 못한다.”고 간(諫)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겨우 사형(死刑)을 면하고 귀양(歸鄕)을 갔고 임금이 친히 후금(後金)의 무례(無禮)함을 다스리겠다고 개성(開城)까지 나아갔으나 사신(使臣)으로 갔던 김대건(金大乾)이 후금(後金)에 건너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오니 임금도 비로소 두려움이 생겨 박로(朴𥶇)를 춘신사(春信使)로 삼고 나경회를 부사(副使)로 하여 필목(匹木) 800필, 표피(豹皮) 60장, 수달피(水獺皮) 300장, 상화지(霜華紙) 800권을 보냈던 일이 있었다.
이준(李俊)은 심양(瀋陽)에 들어가서 후금(後金)의 칸(汗)을 접반(接伴)하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두 장수(將帥)를 사리(事理)와 도의(道義)로 잘 구슬리고 금은(金銀)과 각궁(角弓)등과 같은 것은 우리나라 토산(土産)이 아니라고 설득(說得)하여 세폐(歲幣)를 크게 줄였고, 또 후환(後患)을 달래는 성과(成果)를 거두었으며 돌아올 때 후금(後金)이 이준(李俊)에게 준 선물까지도 모조리 나라의 군수(軍需)로 입고(入庫)하여 국방(國防)에 대비하도록 간(諫)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에서 종2품 의주부윤(義州府尹)의 자리를 수직(守職)하는 교지(敎旨)를 배수(拜受)하였다.
1636년(丙子) 인조(仁祖 14)에 후금(後金)은 용골대(龍骨大)를 사신(使臣)으로 보내 나라의 이름을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써서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으라고 요구(要求)함에 이준(李俊)은 상계(上啓)하기를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땅에 황제(皇帝)가 둘이 없다.”하여 후금(後金) 사신(使臣)의 목을 벨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도 척화(斥和) 상소(上所)에서 “이준(李俊)의 말에 예의명분(禮義名分)이 뚜렷하다.”하였고, 삼사(三司)가 서로 상소(上疏)하니 300이 넘는 상소(上疏)로 척화여론(斥和與論)이 들끓었다, 이와 같이 이준(李俊)의 강직(强直)한 척화론(斥和論)이 장차 국방에 위협이 될 두려움이 있다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임경업(林慶業)으로 바꾸었음에 이준(李俊)은 마음껏 척화운동(斥和運動)을 하게 되었다.
그해 12월에 용골대(龍骨大)가 이끄는 호군(胡軍)이 경성(京城)에 들어와 1637년(丁丑) 1월19일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당하는 부끄러움을 보았고 이 해 2월13일 호군(胡軍)이 물러갔고, 심양(瀋陽)으로 가는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두 학사를 보내면서 시(詩) 한 수를 주었는데 “한(一)마디 말로 대의(大義)를 붙들었으니, 만(萬)번 죽어도 이것이 영광(榮光)이로다. 이제 그대들 심양으로 잡혀간 뒤, 우리나라에 해와 달이 더욱 밝으리.” 라고 했다.
이 해 8월에 안주목사(安州牧使)의 조명(朝命)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성하지맹(城下之盟)의 치욕(恥辱)을 부끄럽게 여겨 귀래정(歸來亭)에 숨어 지냈다.
1638년(戊寅) 인조(仁祖 16)에 영변부사(寧邊府使)의 교지(敎旨)가 내리면서 임금의 타이름이 너무나 은근함에 감격(感激)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부임(赴任)했다.
1640년(庚辰) 인조(仁祖 18)에 동궁(東宮)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오니 이준(李俊)은 숙천(肅川)에서부터 호위(護衛)하여 모셨다.
1641년에는 철산부사(鐵山府使)를 배수(拜受)하고 1642년에는 춘천부사(春川府使) 겸(兼) 강원도방어사(江原道防禦使)를 배수(拜受)하였다.
1644년(甲申) 인조(仁祖 22)에 명나라 북경이 반군(叛軍)에게 함락(陷落)되었다. 명(明)의 마지막 황제(皇帝) 의종(毅宗)이 자살하니 이준(李俊)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귀래정(歸來亭)을 둔정(遯亭)이라 고치고 숨어 살았다.
1645년(乙酉) 12월3일 집에서 돌아가실 적에 자손(子孫)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길 비록 멱악(幎握) 한 조각이라도 청나라 명주는 사용하지 말고 우리나라 천에 물을 들여 쓰도록 일렀으며 시신(屍身)도 선영(先塋) 가까이 묻히기를 삼가여 국치(國恥)의 한(恨)을 풀지 못하고 죽은 원통한 뜻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3. 가족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슬하(膝下)에 2남4여를 두셨으니 첫째 아드님은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여절교위(勵節校尉) 정시(廷蓍)이고 둘째 아드님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사복시정(司僕寺正) 철장(鐵杖)이다.
첫째 사위는 손각(孫珏)이고 둘째 사위는 진사(進士) 파평(坡平) 윤멱(尹塓)이며 셋째 사위는 김성원(金聲遠)이고 넷째 사위는 도사(都事) 청송(靑松) 심총(沈摠)이다.

4. 추모

강진(康津) 향유(鄕儒)들이 월강사(月岡祠)에 배향(配享)하였다가 뒤에 해남(海南) 영산사(英山祠)로 옮겨 모시었다.
유집(遺集)1권(一卷)있음.

5. 참고문헌

한국학자료포털
해남군지 상(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군지 하(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원주이씨대동보(1991)
원주이씨 강릉공파의 인물과 유산(비천당/김성태 저/2021)

6. 기타

1623년(인조1) 윤10월 22일에 인조가 원주이씨 이준을 통훈대부행벽동군수로 임명하는 문서 고신(告身)과 1635년(인조13) 9월 19일에 인조가 원주이씨 이준을 통정대부행인동도호부사로 임명하는 문서 고신(告身)이다. 이 문서는 해남 영산사(英山祠) 유물관에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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