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신문 기자, 작가, 기업인, 언론인, 출판인이자, 제지업자, 신문 경영자, 지방의회 의원, 사회 사업가이며 대한민국의 기업인, 출판인, 제지업자, 공무원이다. 춘천 지역에서 신문기자, 언론인,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그밖에 그는 춘천상공회의소, 강원도상공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 본부의 강원도지역 대표로도 활동했다.자(字)는 규삼(圭三), 다른 이름은 한복(韓復),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일본식 이름은 리겐간푸(李原漢復, 이원한복) 또는 리바라간푸(李原漢復)이다.
1. 생애
1919년 매일신보 춘천지국에 입사해 신문기자로 활동하고 뒤에 매일신보 춘천지국 총무, 춘천지국장, 강원지사장 등을 역임했다.춘천 신연강 다리 개통 운동에 동참하여 춘천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토목국과 당국을 찾아가 설득하는데 참여했고, 경춘선 철도 유치 운동에 참여하여 춘천과 인근 화천, 양구, 인제, 가평 지역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경춘천 개통에 참여해줄 것을 설득했다.
1927년 9월 춘천면협의회 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고 1929년 춘천면 면협의회 의원 선거에 재선, 1927년 9월부터 1931년 5월 3대, 4대 춘천군 춘천면협의회 의원이었다. 1931년 4월 춘천읍 승격으로 초대 춘천읍협의회 의원이 되고 그해 5월 2대 춘천읍협의회 의원 선거에 재선, 1935년 3대 춘천읍협의회 의원 선거에 재선되었다.
1939년 춘천상공회의소 창립 회원이자 초대 평의원에 선출되고, 1946년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본부 초대 대의원에 선출됐다.
1919년 5월 21일 매일신보사에 입사, 춘천지국 기자, 총무, 매일신보 특파원, 매일신보사 춘천지국장, 1933년 7월 19일 매일신보사 강원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20년대에는 청년단체에도 참여 춘천청년동지회, 동일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33년 동선인쇄소를 창업, 대표이사가 되고, 1937년 강원약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 취체역이 되었다. 이외에도 춘천금융조합 평의원, 반도제지주식회사 취체역 등을 역임했고, 교육 활동에도 후원하여 춘천공립보통학교 후원회 위원, 춘천제2공립보통학교 기성회 위원, 1933년 정명여고 후원회 이사, 춘천여고 후원회장 등 지역내 각급 학교의 후원회, 기성회 위원으로 학교 운영 참여 및 후원활동을 했다.
1945년 해방 후 반도제지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이 되고, 1946년 조선상공회의소 설립발기인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25일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본부 의원(강원도 지역구 대표)에 선출되었다. 1948년 강원도선거관리위원회 후보위원, 1950년 강원도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다. 6.25 전쟁 중 실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