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가 톰이랑 동급인 줄 아는 자백남. 학교 다닐 때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수재. 영국 해리옷 와트 대학에서 보험계리학 석사를 마치고 미국 보험계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보험 전문가로 한국에 돌아와 플러스손해보험 상품개발팀에서 계리사로 활동 중. 입사하자마자 내놓은 상품마다 대박을 치며 빠르게 승진, 젊은 나이에 상품개발팀 선임 자리까지 꿰찬,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남자. 하지만 알고 보면, 헤어진 전처들에게 연봉급 위자료를 세 번씩이나 플렉스한, 지갑도 영혼도 탈탈 털린 최악의 남자.
오죽하면 남들은 한번 당하기도 어렵다는 이혼을 세 번씩이나 당했을까 같은 오죽하면 남들은 한번 해주기도 어렵다는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해줬을까 같은, 편견 덕에 세 번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그래도 꿋꿋하게 자신의 이혼 경력을 당당히 밝히고 사는 소신 있는 꼴통이다. 사연이 없었던 건 아니다.
첫 번째 이혼은 결혼관이 달라서였고 두 번째 이혼은 세계관이 달라서였고 세 번째 이혼은 인생관이 달라서였다.
누군가는 그깟 가치관 때문에 이혼까지 하냐고 하겠지만 부부 문제는 부부만 안다고, 순간순간마다 지옥 같은 치열한 전쟁과 인생을 건 고민 끝에 내린 결단들이었다. 누군가는 한번 해봤음 됐지 뭘 또 결혼을 했냐고 하겠지만 적당히 연애만 하다 끝내긴 싫어서 지옥인 줄 알지만 이번 지옥은 저번 지옥보단 낫겠지 믿으며 내린 용단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 실패(?)를 했고, 전처, 전전처, 전전전처와의 이혼 사유 들먹이는 그런 쓰레기는 되기 싫어서 꼴랑 자존심 하나로 위자료만큼은 거하게 질렀다가 개털이 됐다. 그래서 친구란 놈들한테 술 좀 얻어먹었더니 나보고 호구란다. 내가 호구면 자식땜에, 부모땜에, 체면땜에, 돈땜에,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놓고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니들은 더 한 호구거등?!
오기가 생겼다. 그래. 니들은 어쩌나 보자! 매달 이만칠천구백원에 이혼 후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보험이 있다면?? 니들은 이혼 안 하고 배길 것 같니?
이젠, 하고 싶지만 삼켰던 모든 말들을 다 하기로 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이혼이란 걸 하기 전까지 세상 눈치란 눈치는 다 보고 산 여자다. 유교가 세상 제일 훌륭한 법도라고 알고 있는 세상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부모님 밑에서 순종이 최고의 인생 덕목인 줄 알고 컸다. 그래서 어렸을 땐 부모님 눈치, 커서는 친구들에 선배 후배 눈치, 연애할 땐 남자친구 눈치, 결혼하고는 시댁 눈치.. 참는 게 능사인 줄 알고 살아왔다. 생각해 보면 결혼도 하자니까 했고 하라니까 했던 거 같다.
그렇게 결혼한 지 5년, 바람 핀 건 남편인데 적반하장으로 이혼했다. 더 어이없는 건 친정 부모님.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일 만들지 말라며 묵인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할 때도 못 했던 자기주장을 이혼할 때 처음으로 해버렸다. 이혼이 뭥미?? 하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부모와 시댁과 남편을 상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별의별 미친 짓 끝에 이혼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후- 후- 이제야 거칠었던 숨을 고르고, 마냥 착하게만 살았던 강한들은 그만. 결심을 해본다. 차라리 빵똘이 되기로. 새로 개발하는 이혼보험 프로젝트의 언더라이터로 참여해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아내의 이혼 통보였다. 인테리어 광이었던 아내를 위해 그 길로 그 집에서 나왔다. 다행히 결혼할 때 이혼도 염두에 둔 준비성 덕에 큰 충격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울고불고 지지고 볶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혼하는 동안. 아니, 사는 동안에도.
그게 보통은 비정상에 속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참 다행이다 여기며 겉으로만 쿨한 척. 알고 보면 소심한 남자다. 그게 다 안전을 제일 중시하는 성격에서 나온 소심함인데 안전이고 나발이고 일단 지르고 보는, 정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랑은 통 맞질 않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나미 떨어지는 고약한 사람으로 평가받기 일쑤.
기준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전공은 같지만,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기준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보험계리사가 되었고, 안전제일주의자인 전만은 보수적인 리스크 서베이어가 되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꼬이기 싫어서 한 번도 같이 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준과는 이상하게 편한 사이. 만나기만 하면 서로에게 끔찍한 독설을 퍼부어 대지만 그게 웬만한 정신과 상담받는 것보다 낫다는 걸 서로 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준에게 말 한 적은 없지만 결혼하면서 미리 이혼을 준비한다는 게 참 맘에 들어서 기준이 제안한 이혼보험 프로젝트에 한팀으로 합류한다. 이혼보험 개발이라는 황당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전에 없던 모험심이란 게 생기는 인물.
전남편 기준에게 오픈메리지를 제안했다가 들은 첫마디였다. 당연하다. 유교 성지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쿨한 기준이라지만 방금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아내가 오픈메리지를 하자고 했으니, 화를 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테지.
그리하여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사랑한 만큼, 아니 사랑한 것보다 더 치열한 논쟁 끝에 이혼으로 결론 났다.
하지만 나래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부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되 새로운 관계에도 오픈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관습과 구속이 아닌 신뢰와 자유가 주어진 결혼이란 이기심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산투자는 투자의 제1 원칙 아닌가. 투자 분석가인 나래로서는 결혼이라 해서 반드시 한 사람한테만 올인해야 한다는 개념이 와닿지 않았다.
모두 결혼하는 시대야말로 이상한 시대라고 생각하는 여자.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결혼해야 할 이유보다 백배는 많다고 생각하는 여자. 여자와 남자가 상대방 없이 자립해서 살 수 없게 만드는 제도가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비혼을 선택하면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네 결혼은 행복하니?’ 라며 빅엿을 먹이는 여자. 사회에서 성취를 이루더라도 결혼하고 엄마가 되지 않는 이상, 제구실 못 하는 사람 취급받는다는 사실에 닥쳐를 외치는 여자. 역시 기준의 이혼보험 프로젝트에 손해사정사로 합류한다. 겉으로만 빵돌인 척하지, 여전히 새가슴에 착해빠진 한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언니 같은 동생이기도.
감정은 춤으로, 철학은 농사로, 배운 솔직한 직진남. 아버지가 반대하는 춤을 추겠다는 일념으로 집안의 지원도 끊고 투잡을 찾다가 찾은 게 배추밭 수확철 알바였다. 그때 농사의 재미를 느끼고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 이젠 농부이자 댄서가 되어버린 고란개 마을 힙한 이장님. 그래도 틈틈이 상경해 아버지의 상가 건물 청소를 하며 거리에서 춤 공연도 열심히 하는 알고 보면 금수저 또라이. 춤을 계속 추는 조건으로 등 떠밀려 나간 맞선 자리에서 대뜸 이혼보험을 들어달라는 아영에게 흥미를 느끼고 아영에게 직진하다.
쌍문지점 보험설계사로 시작해 본사 정식 팀장까지 오른 신화적인 인물. 설계사 시절 보험왕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손수 제작한 플러스손해보험 로고 조끼를 입고 쌍문동 전역을 누볐을 만큼 성실 빼면 시체인 의지의 한국인. 그 시절 하루에 열 끼씩 먹은 날도, 꼬박 굶는 날도 허다했던 탓에 그때 다친 장이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말썽인 말이 팀장이지 말단직원 못지않은 생계형 팀장으로, 윗사람이라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도 내시가 왕을 모시듯 극존칭도 마다하지 않는 짠한 캐릭터.
어느 날.. 아내가 식탁 위에 곰국과 이혼서류를 남기고
초등학교 동창들과 10개국 서유럽 여행을 떠났다는 걸 아내의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되면서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진짜 이혼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그 일을 계기로 위기의식을 느끼며 기준이 제안한 이혼보험 프로젝트를 진행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