麟德
1. 개요
당나라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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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중국의 당나라에서 사용한 연호. 당고종의 4번째 연호이다. 664년부터 665년까지 사용되었다. 용삭(龍朔) 3년(664년)에 용삭(龍朔)에서 연호를 인덕으로 고치고, 인덕(麟德) 2년(665년)에 건봉(乾封)으로 개원하였다. 약 2년정도 사용된 연호이다.
이 시기 당나라의 주요 사건으로 현장이 입적하였고, 무측천이 상관의를 처형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2. 주요 사건
- 인덕 원년(664년): 운중도호부(雲中都護府)를 선우대도호부(單于大都護府)로 개칭하다. 정관 4년(630년), 당이 돌궐을 멸망시킨 후, 돌궐을 운중성(현재 산서성 대동(大同)시)로 옮기고 아사덕(阿史德)씨를 그 장으로 삼았다. 아사덕은 당의 왕을 가한으로 세워 통치해달라고 청하였다. 당고종이 아사덕을 소환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가한은 옛날의 선우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덕 원년(664년) 정월 16일에 운중도호부를 선우대도호부로 개칭하고 은왕(殷王) 욱륜(旭輪)을 선우대도호로 삼아서 멀리서 통치하게 하였다.
- 인덕 원년(664년): 현장이 집 뒤편 도랑에서 넘어졌고, 이후 병세가 심해져 인덕 원년 2월 6일 입적하였다.
- 인덕 원년(664년): 순국공(郇国公) 이효협(李孝協)이 사사되다. 인덕 원년(664년) 4월, 위주자사(魏州刺史) 이효협이 부패협의로 사사되었다. 왕박칠(王博七)이 상소하여 이효협의 아버지 이숙량(李叔良)이 고조 때 돌궐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니 왕명을 받들다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효협에게 형제가 없으니 후손이 끊길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당고종이 말하기를 “법은 공평해야 하며 친소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 없다. 백성을 해친 자는 황태자일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효협에게 아들이 하나 있으니 제사를 끊길 염려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효협은 집에서 자결하였다.
- 인덕 원년(664년): 유인궤(劉仁軌)가 상소하여 백제 수비 병사들의 피로를 말하다. 인덕 원년(664년) 겨울 10월 6일, 검교 웅진도독 유인궤가 상소를 올려 백제의 수비 병사들이 피로에 지쳐 있고, 징집과 부역에 시달리며, 상벌의 신뢰가 없고, 서쪽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음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유인궤는 군사들이 피로와 노쇠에 지쳐 전과를 올릴 날이 없을 것을 우려하였다. 고종은 그의 말을 깊이 받아들여 우위위장군 유인원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서 옛 병사들을 교대하게 하고, 유인궤에게도 함께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유인궤는 이민족이 새로 복속되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염려하여 자청하여 백제에 남아있기를 청하였다. 고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 인덕 원년(664년): 상관의(上官儀)가 처형되다. 무측천이 황후로 책봉된 이후 점차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매번 그녀의 제약을 받았고, 그녀를 폐위시키고자 하여 재상 상관의를 시켜 폐위 조서를 초안하게 하였다. 무후가 이를 듣고 급히 고종에게 가서 직접 호소하니, 조서 초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고종은 부끄러워하며 참아내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는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없었고, 모두 상관의가 나에게 가르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후는 이에 허경종(許敬宗)을 시켜 상관의가 폐태자 이충(李忠)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고 무고하게 상주하게 하였다. 인덕 원년(664년) 12월 13일, 상관의는 투옥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 정지도 역시 살해되었으며, 그의 가족 전체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폐태자 이충은 사사되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강등되었다. 이로부터 고종이 정사를 볼 때마다 무후는 항상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정사의 크고 작은 일 모두에 관여하였다. "천하의 대권이 모두 중궁에 귀속되었고, 천자는 손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라는 말이 생겨났고, 내외에서는 그들을 이성(二聖)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