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9:23

린리궈

임입과에서 넘어옴
파일:임입과.jpg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사령부 작전부 부부장
정체 林立果
한국식 독음 임입과
영문 Lin Liguo
출생 1945년 12월 23일
중화민국 섬서성 옌안
사망 1971년 9월 13일 (향년 25세)
몽골 인민 공화국 운도르항
국적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베이징대학 물리학과 졸업
직업 군인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공군의 황태자2.2. 연합함대 결성과 571 공정2.3. 허망한 최후
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린뱌오의 아들로 젊은 나이에 대단한 권세를 누렸지만 571 공정을 기도하였다가 실패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던 중 9.13 사건으로 사망했다.

2. 생애

2.1. 공군의 황태자

1945년, 옌안에서 린뱌오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예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라오후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누나 린리헝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과 달리 린뱌오와 예췬 부부는 린리궈를 거의 왕자처럼 애지중지 키웠다. 이후 베이징대학 물리학과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66년, 린뱌오는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와 그의 아내 옌웨이빙이 린리궈가 린뱌오의 아들이 아니라고 음해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숙청하는 5.16 사건을 일으켰다.
파일:린뱌오일가1.jpg
어린 린리궈. 린뱌오와 예췬 사이의 사내아이.

1967년 4월, 대학을 졸업한 린리궈는 23세에 인민해방군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의 주선으로 공군사령부 당위원회 판공실 비서에 임명되었다. 1967년 7월, 린리궈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69년 10월 17일에는 공군 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겸 작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여 우파셴의 수석참모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쳤다. 10월 18일, 우파셴은 불과 24살의 젊은이에 대한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발언을 남겼다.
"공군의 모든 일은 린리궈 동지에게 회보해야 하며 그는 공군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지휘할 수 있다."

1969년 10월 28일, 린리궈는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저우위츠, 공군사령부 판공실 처장 류페이펑,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처장 위신예 등과 함께 우파셴의 비준을 받아 <조사연구소조>를 수립하여 이를 공군직속기관으로 삼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1970년 8.1 건군절을 기념하여 린리궈는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고 활요하는 것에 관한 응용방법 해설보고>를 발표했고 우파셴은 이를 두고 "정치위성을 쏘아올린 것이나 다름 없다."고 칭송하며 린리궈가 "천재이고 온전히 발전한 인재이며 대세를 움직일 수 있는 인재"라고 아첨을 아끼지 않았다. 린뱌오도 아들의 보고에 대하여 "사상이 나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언어도 나와 비슷하다."고 추켜세웠다. 린리궈는 공군의 태상황이라 불리며 공군의 모든 사업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1년에 병사, 2년 만에 당원, 3년 만에 부부장, 4년 만에 태상황."이라며 빈정댔다.
파일:린뱌오일가2.jpg
가족들과 함께 있는 린리궈

2.2. 연합함대 결성과 571 공정

1970년 10월, 자신을 사령관이라 부르며 추종하는 젊은 장교들과 함께 린뱌오에게 충성하는 조직인 조사연구소조를 개칭하여 <연합함대>로 바꾸어 예췬의 후원을 받았다. 예췬 역시 연합함대 일원들에게 자작부인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사연구소조가 연합함대로 개칭된 이유는 린리궈가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1968)>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1] "우리도 연합함대다. 우리도 에타지마 정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린리궈는 연합함대의 영향권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 소조를 설립하고 비밀거점을 설치하였으며 무기, 통신장비, 기밀문서 등을 수집하였다.

1970년 강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린뱌오의 동맹자였던 천보다가 숙청당하고 마오쩌둥이 린뱌오가 주장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 제안을 격렬히 비판하자 린리궈는 9기 2중전회가 마무리될 때 쯤에 "이번 투쟁은 장기간 지속될 것 같다. 우리는 군대를 주도하여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후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관계가 연일 악화되자 린리궈는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일해 온 정치세력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그의 전직 비서들은 자살했거나 체포되었다. 그와 가까운 그소수의 전우들이나 신뢰할만한 참모들 또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감옥에 보냈다. (...)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디스트다. 누군가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 그의 소신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거나 일단 시작하면 철두철미하거나 둘 중 하나다. 누군가를 제거할 때마다 그는 상대가 죽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일단 상처를 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상처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쁜 일에 대해서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린다."

이 때문에 린뱌오와 그 측근들은 1971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긴급회동을 가졌다. 그는 정세에 대해 분석하여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의 문인역량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렇게 가다보면 장춘차오가 린뱌오를 쫓아내고 마오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가지 방안을 논의한 끝에 린리궈는 571 공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3월 31일, 린리궈는 지휘부를 수립하고 상하이에서 전 난징군구 공군 정치위원 장텅자오, 공군 4군 정치위원 왕웨이궈, 공군 5군 정치위원 천리윈, 난징군구 공군 부사령원 저우젠핑 등을 소집하였다. 린리궈는 저우젠핑이 난징에서, 왕웨이궈가 상하이에서 책임을 맡기로 하고 천리윈을 두목으로, 장텅자오를 총책임자로 삼았다. 4월에는 왕웨이궈를 시켜 상하이에서 교도대를 수립하게 하였다.

린리궈는 7월 상순에 이르러 마오쩌둥과 에드거 스노우의 대화를 들어 린뱌오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연합함대의 성원들도 린뱌오를 반대하는 바람이 도처에서 불고 있다고 거들었다. 7월 하순, 린리궈는 광저우, 선전 등지에서 지형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북대하에서 수륙양용장갑차 운용을 공부하면서 무력봉기를 준비하였다.

2.3. 허망한 최후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관계는 연일 악화되었으나 린뱌오는 마오쩌둥이 요구하는 자아비판을 거부하고 칩거할 뿐이었다. 1971년 7월에 이르러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고 8월에 비밀리에 베이징을 떠나 지방 순시를 떠났다. 순시를 떠난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면서 린리궈를 비판했다.
"서른 살도 안된 젊은이를 초특급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지."

9월 6일, 저우위츠와 위신예가 마오쩌둥의 발언을 린뱌오 부부에게 보고했다. 9월 7일, 린리궈는 연합함대에 1급 전쟁준비를 지시하였고 8일, 린뱌오가 린리궈의 행동을 비준한다는 친필명령을 전달하였다. 이들은 허겁지겁 마오쩌둥을 살해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마오쩌둥은 신속하게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마오쩌둥이 자신을 비판했다는 말을 들은 린리궈는 경악하여 린뱌오에게 소련으로 달아날 것을 청했다. 결국 1971년 9월, 린뱌오 일가는 북대하의 요양소로 이동한 후 9월 12일, 린리헝의 약혼식을 핑계로 소란을 피우다가 달아나려 했으나 린리궈가 린리헝에게 소련으로 달아날 계획이라는 것을 누설하고 말았다. 어릴때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미움과 구박만 받아온 린리헝은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고 린리궈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

현장에 파견된 몽골 군경은 현장에 수습한 사체 9구 중에서 린리궈의 이름이 적힌 공군학교 수첩을 가지고 있던 사체 2호를 린리궈의 시신으로 판명했다. 린리궈의 시신은 다른 시신들에 비해 컸으며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새까맣게 타고 일그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린리궈를 빈정대던 농담에 하나를 더 추가하여 "5년 만에 염라대왕을 만나다."라고 비웃었다.

3. 참고문헌



[1] 이때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분한게 다름아닌 미후네 토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