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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1 14:22:02

임최수

林最洙

1853년 ~ 1895년 (향년 42세)
1. 개요2. 생애3. 저서

1. 개요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양(桐陽). 임익진(林翊鎭)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용진(尹用鎭)의 딸 사이에서 출생했다.

2. 생애

1853년 출생이다. 1891년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 남에게 굴하기 싫어하였고, 애국심이 투철했다. 철저한 보수적인 사상을 지녀 개화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왕명을 받들고 평양에 가서 청진(淸陣)을 밀탐하고는 청군이 패할 것을 알고 삼남(三南)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895년 시종원(侍從院) 시종(侍從)에 제수되었다. 1895년 8월 20일 민비 시해사건 당시 임최수는 시종원 시종으로 일본 낭인들에게 궁궐이 짓밟히는 현장을 역력히 보고 통탄하였다. 그런데 사변 후 관료들이 주모자 색출과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정부 관료 및 동리 수 백 명과 군관 천 여 명을 규합하고 지휘하여 역적 괴수와 친일파를 소탕하고 일본인을 몰아낸 뒤에 내각을 혁신하고자 거사일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서리 군부 대신(署理軍部大臣)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였다.[1]

그로 인해 어윤중의 선무공작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체포당하고 말았다. 체포된 뒤에도 혹독한 심문에도 모의한 동지 한 사람도 말하지 않고 마침내 이도철(李道徹)과 함께 같은 날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1896년 특명으로 복관된 뒤 내부 협판으로 승진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3. 저서



[1] 또한 안경수는 김윤식에게 이를 밀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