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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6:14:00

장 루베

성명 장 루베
Jean Louvet
생몰년도 1370년경 ~ 1440년
출생지 프랑스 왕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아비뇽
아내 메텔린 라간
자녀 루이 루베 드 코비소, 잔 루베, 마리 루베
직위 재무장관, 대시종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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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정치인. 샤를 7세의 총신이다.

2. 생애

에갈리에르(Eygalières), 떼(Theys), 팔리비에, 메린돌(Mérindol)의 영주로, 프로방스 백작의 행정 법원장을 맡다가 1413년경 마르세유의 행정과 사법을 담당했다. 1414년 3월 시칠리아 국왕이자 프로방스 백작인 루이지 2세에 의해 프로방스 재무장관에 선임되었다. 1415년 타라스콘 성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막내 아들인 샤를 왕자와 만나 행정에 관한 교육을 담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와 친분을 두텁게 다졌다.

샤를 왕자의 두 형인 루이 드 기옌, 장 드 투렌이 1415년, 1417년에 잇따라 사망한 뒤, 샤를 왕자는 발루아 왕조의 최후의 후계자로서 도팽에 선임되었다. 이후 장 루베는 1417년 초 파리로 소환되어 파리 섭정 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1418년 5월 28일 밤,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파견한 부르고뉴군이 어둠을 틈타 파리를 급습했다. 그들은 파리 내부의 내통자들이 성문을 열어준 틈을 타 시내로 들어가 수많은 아르마냑파 인사들을 학살했고, 파리 왕가가 거주하는 호텔 생폴로 쳐들어갔다. 이때 파리 총독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당시 15살이었던 도팽 샤를을 업고 탈출했고, 장 루베와 도팽 샤를의 근위대장인 피에르 프로티에가 타네기를 도왔다. 그들은 라 바스티유와 멜룬을 거쳐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이후 도팽 샤를이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여 자신을 "왕의 유일한 아들이자 상속자, 후계자"로 자처하며 프랑스의 섭정으로 선포했을 때, 장 루베는 그의 주요 고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도팽 샤를에 충성하는 왕실 영토의 행정 및 관리를 담당했다. 그러면서 아르마냑파의 일원으로서 부르고뉴파와 끝까지 대적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용맹공 장이 1418년 9월 16일 도팽 샤를의 어머니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협상한 끝에 도팽 샤를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아르마냑파를 사면하는 대신 자신이 프랑스의 정권을 잡는 걸 용인받는다는 내용의 생모르 조약을 체결한 뒤 부르주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신청했을 때, 그는 도팽 샤를을 부추겨 이를 단호히 거부하게 했다. 이후 부르고뉴파 연대기 작가들은 장 루베가 아르마냑파의 부르고뉴파에 대한 보복을 주도했다며 비난했다.

1419년, 용맹공 장은 도팽 샤를에게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장 루베는 부르고뉴 공작을 절대로 믿지 말라며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도팽 샤를은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 등의 권유에 따라 용맹공 장과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7월 11일, 푸이르포르에서 양자간의 첫번째 평화협상이 열렸다. 용맹공 장과 도팽의 고문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제안한 평화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고, 용맹공 장을 정식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장 루베는 준수 서약이 적힌 양피지에 자기 도장을 찍었다.

두번째 회담은 1419년 9월 10일 몬테로 다리에서 열렸다. 이때 도팽 샤를은 용맹공 장이 잉글랜드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고 비난했고, 용맹공 장이 이를 반박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때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기욤 2세 드 나르본을 비롯한 여러 기사가 용맹공 장을 기습 공격해 처단했다. 장 루베는 이 회담에 참여했고, 용맹공 장의 살인 계획을 고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부르고뉴의 새 공작에 등극한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파리 법원에서 도팽 샤를과 그의 고문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궐석 재판을 거행하게 했다. 며칠 간의 재판 결과, 도팽 샤를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고, 타네기 3세, 기욤 2세, 장 루베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420년 5월 20일,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을 맡으며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사이의 아들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1422년 8월 3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그의 갓난아들 헨리 6세가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잉글램드 겸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장 루베는 이에 대응해 1422년 10월 30일 부르주 대성당에서 도팽 샤를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 선포하는 즉위식을 거행하게 했다. 이후 장 루베는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팽 샤를을 따르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중의 원한을 샀다. 그러던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서 샤를 7세를 지지하는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 연합군이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된 뒤, 장 루베의 입지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도팽 샤를은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에 대적하려면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1424년 11월 30일 마콩에서 양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얻고 싶다면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장기간의 협상 끝에, 장 5세의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타협이 이뤄졌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도팽 샤를이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그해 4월, 리슈몽은 앙주 공작부인 욜란다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도팽 샤를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1425년 6월 초, 리슈몽과 욜란다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도팽 샤를의 군대와 대치했다. 도팽 샤를은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를 해임했다. 하지만 그를 여전히 아꼈던 샤를 7세는 1426년에 그를 시종에 선임했다. 이후 장 루베는 아비뇽의 총독에 선임된 뒤 그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440년경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