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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2 20:21:14

장 빌리에 드 릴라당

성명 장 빌리에 드 릴라당
Jean Villiers de L'Isle-Adam
생몰년도 1384년경 ~ 1437년 5월 22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릴라당 성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브뤼헤
아버지 피에르 2세 드 빌리에
어머니 잔 드 샤티용
형제 잔, 로베르
아내 잔 드 발랑주가르
자녀 자크
직위 황금 양모 기사단의 기사, 프랑스 원수, 파리 총독, 브뤼헤 총독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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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귀족. 1차 파리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2. 생애

1384년경 프랑스 왕국 릴라당 성에서 릴라당 영주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었던 피에르 2세 드 빌리에와 수뱅과 종슈히슈흐베슬르의 영주이며 역시 샤를 6세의 시종인 샤를 드 샤티용의 딸인 잔 드 샤티용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잔[1], 로베르[2]가 있었다. 139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릴라당 영주가 되었고, 1410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어머니의 영지도 물려받았다.

1415년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그는 샤를 6세로부터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노르망디 물과 숲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뒤이은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상을 입고 전장을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가담한 뒤 용맹공 장이 보몽쉬르우아즈를 공략하는 걸 도왔으며, 퐁투아즈를 공략한 후 그곳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1418년 부르고뉴군이 파리에 잠입한 뒤 아르마냑파를 대거 학살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생드니 수도원장을 구출해 릴라당 성에 피난할 수 있게 해줬지만, 생드니 수도원장은 얼마 안가 사망했다.

1418년 용맹공 장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의 공세로 인해 1419년 퐁투아즈를 상실했다. 1420년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가 멜룬에 쳐들어왔을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함락을 면치 못하고 그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22년에 석방되었고,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휘하에서 잉글랜드군을 위해 싸웠고 뮬랑을 공략했다.

이후 프랑스 원수로 복귀한 그는 랭커스터의 험프리에 맞서기 위해 플란데런 원정을 떠난 선량공 필리프를 도왔으며, 뒤이어 불로네 세네샬에 선임되었다. 1426년 홀란트 백국의 슈타트홀더(stathoudérat, 중세 네덜란드의 군사 직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홀란트에서 벌어진 갈고리파와 대구파의 전쟁에 참여해 브라우어스하벤 전투에서 부르고뉴 공국을 지지하는 대구파가 승리하도록 도왔으며, 호른 전투에 참여해 몇 척의 노 젓는 배로 적에게 포위된 호른을 구출했으며, 1427년 아메르스포르트 공방전에 참여했다.

1428년 루브르 성 대장에 선임되었고, 1429년 파리 총독에 선임되었다. 1429년 8월 26일, 잔 다르크를 따르는 프랑스군이 1차 파리 공방전을 단행했다. 그는 메닐 영주 시몽 모히어와 함께 4,000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이에 격렬하게 대항해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1430년, 선량공 필리프는 그를 황금 양털 기사로 선임했다. 1432년, 베드퍼드 공작 존은 그를 프랑스 원수 직에 복귀시켰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 헨리 6세는 1430년 10월 4일 장 드 빌리에에게 르 플레시로빈슨을 비롯한 여러 토지를 수여하고 4,00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받게 했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그는 다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섬겼다. 그는 1436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퐁투아즈를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한 뒤 그곳의 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1437년 잉글랜드 장성 존 탈보트가 반격을 가해 퐁투아즈를 공략했고, 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브뤼헤로 갔다가 1437년 5월 22일 브뤼헤에서 발발한 민중 봉기를 진압하려던 중 피살당했다. 사후 브뤼헤의 성 도나트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부르고뉴 공작은 1438년 브뤼헤를 정복한 뒤 그를 죽인 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매년 5월22일에 속죄의 미사를 치르도록 명령했다.

그는 잔 드 발랑주가르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크 빌리에 드 릴라당을 낳았다. 자크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릴라당의 영주권을 인수했으며, 이후 파리 장관이 되었다. 후손인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은 1521년 구호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고, 로도스를 침입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텨 막대한 희생을 치르도록 강요했지만 끝내 로도스를 상실했다.


[1] 브레테슈 영주 리옹넬 드 부르농빌의 부인[2] ? ~ 1441, 발몽두아와 부셰빌의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