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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9:58:54

장 2세 드 부르봉

<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
Jean II de Bourbon, Duc de Bourbon
파일:Jean II, Duke of Bourbon.jpg
이름 장 2세 드 부르봉
Jean II de Bourbon
출생 1426년
프랑스 왕국 부르봉 공국
사망 1488년 4월 1일 (향년 61~62세)
프랑스 왕국 물랭
배우자 잔 드 발루아(1447년 결혼/1482년 사망)
카트린 다르마냐크(1484년 결혼/1487년 사망)
잔 드 부르봉-방돔(1487년 결혼)
자녀 장, 루이
아버지 샤를 1세 드 부르봉
어머니 아녜스 드 부르고뉴
형제 필리프, 마리, 이자벨, 샤를 2세, 루이, 피에르 2세, 카트린, 잔, 자크, 마르그리트
직위 부르봉 공작, 기옌 총독, 생 미셸 기사단의 기사,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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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웠으며,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 3대에 걸쳐 활약했다.

2. 생애

1426년경 프랑스 왕국 부르봉 공국에서 제5대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드 부르봉과 부르봉 공작 용맹공 장의 딸인 아녜스 드 부르고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필리프[1], 마리[2], 이자벨[3], 샤를 2세[4], 루이[5], 피에르 2세[6], 카트린[7], 잔[8], 자크[9], 마르그리트[10]가 있었다.

1427년 클레르몽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1444년 메츠 공방전에 참여하면서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노르망디 전선에 투입되어 잉글랜드군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1449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해 다수의 성채를 공략했으며, 1450년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리슈몽, 피에르 드 브레제와 함께 5,000 병력을 이끌고 토머스 키리엘, 로버트 드 베레, 매튜 고프, 헨리 노베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4,000명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르망디 전역 석권에 크게 기여했다.

1450 ~ 1451년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해 블랑크포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고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 공략에 기여했다. 1452년 잉글랜드 장성 존 탈보트가 가스코뉴로 쳐들어와서 보르도를 포함한 가스코뉴 서부를 점령하자, 1453년 2차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해 카스티용 전투에서 존 탈보트를 패사시키고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뒤이은 보르도 공방전에 참여해 가스코뉴를 완전히 평정하는 데 공헌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 의해 기옌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며, 1455년 왕에게 복종하지 않은 장 5세 다르마냐크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1455년 12세기부터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였던 기옌 주민들이 여전히 프랑스 왕실에게 반항적인 것을 고려해 트롱페트 성을 건설해 주민들을 감시하게 했다. 1456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부르봉 공작에 선임되었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던 루이 11세는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그를 질시해 기옌 총독 직을 박탈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1465년 샤를 7세의 막내 아들이자 베리 공작을 맡고 있던 샤를 드 프랑스가 결성한 공익 연맹에 가담해 루이 11세에 맞섰다. 그해 11월 양자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루이 11세는 그와 화해했다. 1466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 뒤 루이 11세로부터 독립하려는 샤를 드 발루아를 물리치고 노르망디를 탈환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루이 11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랑그독 총독으로 선임했다. 1469년 8월 1일 생 미셸 기사단의 기사에 선임되었으며, 프랑스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471년 프랑스 왕국과 부르고뉴국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부르고뉴군에 맞서 중부 전선과 남부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리옹, 포레즈, 비바레, 보졸레, 부르보네, 베리 및 오베르뉴의 보안관에 선임된 뒤 전쟁이 끝나는 1477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다. 1483년 새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물랭에서 화려한 궁정을 세웠다. 작가이자 외교관인 필리프 드 코메니스, 시인 프랑수아 드 몽코르비에 디 비용, 장 로베르테, 앙리 보드 등을 후원했으며, 본인 역시 시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작품을 남겼다. 1488년 4월 1일 물랭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1428 ~ 1445년 이후, 보쥬의 영주[2] 1428 ~ 1448, 칼라브리아의 로렌의 공작 장 2세의 부인[3] 1437 ~ 1465,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4] 1434 ~ 1488, 리용 대주교, 리옹 추기경, 클레르몽 주교, 1488년부터 부르봉 공작[5] 1436 ~ 1482, 리에주 주교[6] 1438 ~ 1503, 보주 영주, 1488년부터 부르봉 공작[7] 1440 ~ 1469, 헬러 공작 아돌프 폰 에그몬트의 부인[8] ? ~ 1493, 오랑주 공작 장 4세 드 샬롱아를레의 부인.[9] 1444 ~ 1468, 샤를 7세대관식에서 황금 양모 기사단 기사에 선임되었지만, 샤를 7세와 갈등을 빛고 부르봉 공국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냈다.[10] 1438 ~ 1483,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의 첫번째 부인으로 사보이아의 루이사필리베르토 2세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