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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18:38:03

바실리 2세

장님왕 바실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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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fcc21> 모스크바 대공국 제8·11·13대 대공
바실리 2세
Васи́лий II
파일:Vasily_II.jpg
출생 1415년 3월 10일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사망 1462년 3월 27일 (향년 47세)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재위 제8대 모스크바 대공
1425년 2월 27일 ~ 1434년 3월 31일
제11대 모스크바 대공
1435년 ~ 1446년 2월 12일
제13대 모스크바 대공
1447년 2월 17일 ~ 1462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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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ecd21> 이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배우자 리투아니아의 소피아
자녀 유리, 이반 3세, 안드레이, 보리스 등
아버지 바실리 1세
어머니 소피아 비토프토브나
왕조 류리크 왕조
종교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1차 즉위와 폐위2.3. 2차 즉위와 폐위2.4. 3차 즉위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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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 대공국대공. 1446년에 그의 동맹인 드미트리 유리에비치가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장님왕 바실리(Васи́лий Тёмный)[1]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415년 바실리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실리는 태어날땐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지만, 1417년 형인 이반이 요절하면서 태자로 임명된다.

2.2. 1차 즉위와 폐위

1425년 바실리 1세가 죽자, 모스크바 대공에 즉위한다. 당시 나이가 고작 10살이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 비토프토브나가 섭정직을 맡았다.

하지만 이때 바실리의 삼촌 유리 드미트리에비치와 유리의 아들 바실리 유리에비치, 드미트리 유리에비치는 자신이 정권을 잡을 빌미를 발견한다. 이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유언장"바실리 1세가 죽으면 유리 드미트리에비치가 대공의 자리를 잇는다"라는 말이 적혀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에 맞서 바실리 2세는 "그 유언장은 1389년, 그러니까 바실리 1세에게 자식이 없었을때에 적혔다. 군주의 자리는 군주의 자식이 잇는게 마땅하다. 바실리 1세에게 자식이 있었을때 유언장이 작성됐더라면 바실리 1세의 아들인 내가 후계자로 임명됐을것이다."라는 논리로 맞섯다. 이러한 바실리 2세의 주장에 바실리의 장인어른인 비타우타스도 바실리 2세의 주장에 동의했다.

1430년 비타우타스가 죽자, 유리는 킵차크 칸국에서 왕위를 차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나, 킵차크의 은 더이상 유리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유리는 군대를 조직하고 모스크바를 침공했다. 바실리 2세측은 유리에 맞서 싸웠으나 바실리 2세편의 보야르, 이반 브세볼즈스키가 바실리를 배신하고 유리에게 붙어버렸고, 바실리는 체포당하고, 유리는 모스크바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2.3. 2차 즉위와 폐위

유리는 바실리를 죽이지는 않고 바실리를 콜롬나로 보내 살도록했다. 하지만 유리의 선택은 명백한 오산이였으니...바실리는 대공에서 물러난 즉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유리는 불안했는지 대공직을 물러났다.

유리가 죽고 대공직은 유리의 아들, 바실리 유리에비치에게 넘어갔다. 자신이 대공이 될줄알았던 바실리 유리에비치의 동생인 드미트리 유리에비치는 분노하며 바실리 2세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바실리 유리에비치를 몰아내었고, 바실리 2세는 다시 모스크바 대공에 오른다.

바실리 2세의 2차재위 기간동안 킵차크 칸국은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등 여러 칸국들로 조각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제 바실리는 카잔 칸국의 위협에 대처해야했다. 하지만 바실리는 카잔의 칸인 울루그 무하마드에게 대패해 포로로 잡혔다. 모스크바는 바실리를 빨리 구출하려 했으나, 카잔 칸국이 바실리의 몸값을 높게 제시하는 바람에 바실리는 5달 후에나 풀려날수 있었다. 바실리가 포로로 잡혀있을때, 모스크바의 대공자리는 드미트리 유리에비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2.4. 3차 즉위와 사망

1446년 드미트리는 다시 돌아온 바실리 2세의 눈을 멀게하고, 그를 우글리치로 추방해 버렸다. 바실리 2세의 별칭인 장님 바실리도 이때 생겼다.

하지만 아직도 모스크바에는 바실리 2세의 지지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실리 2세는 금방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이때 바실리 2세는 지지자들을 모아 드미트리 유리에비치를 몰아내고 자신이 다시 모스크바 대공에 오른다.

1453년 바실리 2세는 드미트리 유리에비치를 독살하면서 완전히 평화를 찾았다.

이제 평화를 찾았기 때문에, 바실리 2세는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공국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주권적 권위를 강화했다. 그리고 전쟁들을 일으키면서 모스크바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1462년 바실리 2세는 이반 3세에게 대공의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1] 발음은 바실리 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