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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6 23:22:07

장윤필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6년 7월 10일에 태어났다.

해방 이후 1946년 정치보위부원이 되었으며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 18연대 정치보위부 군관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6.25 전쟁 중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3급을 받았다. 종전 이후 1956년 6월, 평안남도 인민위원장에 임명,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7월,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이임,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예산심의위원에 재선되었으며 황해남도 농업경영위원장으로 옮겼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예산심의위원에 재선되었다. 1970년 7월 11일, 농업위원장 김만금이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영전해가면서 후임 농업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시 김만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77년 6월 즈음에 농근맹 중앙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농근맹 중앙위원장 자격으로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2월, 조선-짐바브웨 친선협회 위원장을 겸하였다. 1981년 2월, 변창복에게 농근맹 중앙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2년 1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다시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다가 1985년 12월 9일 10시 30분에 69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농업부문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우리 당의 농업정책을 철저히 관철하여 농업근로자들을 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쳐 사업하였다. 장윤필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치사했다.

이후 시신은 농근맹 중앙위원장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