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11:14
<colbgcolor=#000><colcolor=#fff> 전용상 田溶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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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전용상 |
출생 | 1936년 11월 15일 |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
사망 | 2023년 6월 18일 (향년 86세) |
학력 | 홍성초등학교 (졸업) 홍성중학교 (졸업) |
직업 | 정치인 |
약력 | 홍성군양곡상협의회장 바르게살기운동 홍성군협의회장 홍남초등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 홍성초등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충청남도 홍성군의회의원 제2대의원, 제2대후반기의장, 3대전반기 의장 충남 시·군의장협의회 부회장 홍성지청청소년 상임선도위원 홍성경찰서 방범치안 자문위원장 충남도발전협의회 이사 자민련 청양홍성지구당 부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홍성군협의회장 홍성군 의정동지회 회장 |
[clearfix]대한민국의 정치인.
그는 1936년 11월 15일 홍성읍 고암리 5구 188번지에서 가난한 농부의 1남 2녀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인맥도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 그의 부친은 징용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징용 소집장이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홍동면 대령리 사촌집으로 피신했고, 그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그는 홍성초등학교를 40회로 졸업하고 홍성농업학교에 입학했다. 5년제 농업학교는 해방이 되자 3년제 홍성중학교가 되었고 그는 2회로 졸업 했다. 이후 그는 한국 전쟁을 맞아 어려운 시절을 보낸 뒤 22세에 원산도 출신 김은신과 결혼을 했는데, 중매장이가 갖고 온 사진 한 장만 보고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가마 타고 장가를 갔다. 이후 27세 때 부친이 죽으며 가장이 됐고, 그때 논 3마지기와 밭 400평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1991년 오관리 7구 547-8번지 태영아파트 앞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그는 집과 논밭을 재산으로 소유하게 됐다. 그리고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고암리에서 축산을 시작했다. 닭 50마리로 군내에서 가장 먼저 양계장을 시작해 성공하고 한우를 들여와 '신암목장'이라는 간판을 걸고 성공하는 축산인으로 변모했다. 당시 상당히 큰 규모인 한우 60여마리를 기르며 8년간 목장을 운영 한다. 축산으로 돈을 모은 그는 홍성읍내에 양곡상에도 손을 댄다. 홍성에서 쌀을 모아 서울로 올리는 사업을 했다. 그래서 당시 그는 홍성군양곡상협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고암리를 비롯해 학계리, 은행정까지 여기 저기 땅을 사들여 논 60여마지기, 임야 2만 5,000여평을 소유하게돼 상당한 재산가가 된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친구의 연대보증을 잘못 서 재산을 몽땅 날려버리고만다. 보령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친구에게 돈을 대주고 보증을 섰다가 부도를 맞은 것이다. 그는 "광산 개발 후 이 지역 연탄 판매권을 주겠다"는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그는 개인사업을 포기하고 1995년 실시된 홍성군의회 의원 선거에서 홍성읍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7년 제2대 군의회 후반기 의장에 선출됐다. 1998년 제3대 홍성군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돼 후반기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그는 2000년대에 들어 홍성군수에 도전했다. 당시 그는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군수 출마과정에서 "처음부터 소신은 무소속"이라면서 자민련에 정당 공천을 요청했고 거기서 안되자 한나라당 홍문표 위원장에게 공천을 요청하는 등 일관성이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원래 군수는 정당이 필요 없이 무소속이어야 한다는게 소신입니다. 그러나 자민련 소속 의원으로서 군수 공천을 원했던건 자연스러운거고 경선하자고 해 군민의 직접 심판을 받으려고 거절 했습니다. 그 뒤 사조직원들 중에 홍문표 위원장과 가까운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홍위원장을 한번만 만나보기라도 하라며 끈질기게 권유해 만났습니다. 현실적으로 정당 공천을 받으면 유리하니까 희망을 얘기 했더니 홍위원장이 긍정적으로 답변하더군요. 그런데 뒤에 달라지더라구. 그래서 당초 소신대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겁니다"라고 해명했다.
2023년 6월 18일 사망했다. 향년 9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