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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21:31:05

정봉수

1. 조선 중기 무신2. 육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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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중기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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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鄭鳳壽
1572년(선조 5) ~ 1645년(인조 23)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상수(祥叟), 시호는 양무(襄武).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는 선전관으로서 선조를 호종하였다.[1] 1605년 무안현(務安縣) 대장으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 6명을 잡아 죽였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금부도사와 영산현감을 지낸 후 고향인 철산에서 지내다 용골산성으로 피난온 상태였다. 용천부사 이희건(李希建)이 전사하자 중군 이충걸은 도망가고 미곶첨사 장사준(張士俊)은 항복하여 용골산성이 혼란에 빠졌다. 정봉수는 병사를 수습하며 의병장이 되어 변발을 한채 항복을 요구하는 장사준을 죽이고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우회한 후금군에 의해 3월 3일 정묘화약이 맺어졌으나 모문룡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3월 17일 다시 용골산성이 포위되고 전투가 벌어졌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봉수가 적극적으로 공격해 용골산성을 지켰지만 백성들이 모여들자 식량난에 빠지고 말았다. 인조는 종2품 방어사에 임명해 치하했지만 식량은 보내지 않아 6월에는 용골산성을 버리고 대계도로 들어갔다. 모문룡의 세력권에 들어간 탓에 조정에서 오해를 샀지만 결국 정충신과 합류하였다. 이후 전라좌수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쳐 청북방어사도 역임했다.

2. 육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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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과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이치 전투에 참가한 출신과 이름이 동일한 사람이 나오지만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