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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12:45:31

제임스 코널리

제임스 브렌던 베넷 코널리
James Brendan Bennet Connolly
파일:제임스 코널리.jpg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생 1868년 10월 28일, 미국 사우스 보스턴
사망 1957년 1월 20일(향년 88세)
종목 육상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은퇴 이후
3.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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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코널리출전.jpg
미국의 남자 육상 선수. 근대 올림픽 최초의 우승자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68년 미국 사우스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코널리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였고, 앤 오도널과 결혼해 자식을 무려 12명이나 낳았다. 제임스 코널리는 어린 시절 12남매 사이에서 동네를 뛰어다니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보험 회사 점원으로 일했으며, 이후 서배너에 있는 미군 육군 공병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891년 그는 서배너의 가톨릭 도서관 협회(CLA)에서 미식축구 팀을 창설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CLA 사이클 클럽의 수장을 맡기도 했다. 이 때부터 그는 스포츠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95년 그는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독학한 끝에 로렌스 과학 학교 입학 시험을 쳤으며,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얻었다.[1]

2.2. 선수 생활

2.2.1. 1896 아테네 올림픽

2.2.1.1. 참가 과정
그러던 중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널리는 올림픽에 참가를 결정했다. 그는 올림픽 참가를 위해 하버드 대학교 측에 휴학을 신청했으나 대학교 측에서 이를 거절했고, 올림픽에 참가할 유일한 방법은 대학교를 자퇴한 후 나중에 재신청하는 것뿐이였다. 결국 코널리는 올림픽을 위해 하버드 대학교를 완전히 자퇴하는 길을 선택했고, 1896년 3월 19일에 학교 측이 자퇴를 수용하며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I am not resigning and I’m not making application to re-enter. I’m getting through with Harvard right now. Good day!
나는 자퇴하지 않을 것이고 재입학 신청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하버드와의 관계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잘해 봐!
학교 측이 휴학을 거절한 후 자퇴를 방법으로 제시하자 코널리의 대답.[2]
결국 코널리는 미국 대표팀과 함께 독일의 화물선 바르바로사 호를 타고 그리스로 향했다. 당시에는 그리스 직항편이 없어 나폴리에서 내린 후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소매치기를 만나 입장권을 거의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코널리는 엄청난 달리기 실력으로 그 자리에서 소매치기를 붙잡아 표를 되찾았고, 아테네행 기차를 타고 올림픽 시작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2.2.1.2. 경기 진행
우여곡절 끝에 1896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한 코널리는 개최일에 열린 첫 번째 결승전인 세단뛰기[3]에 참가했고, 다른 선수들과 달리 오른발로 2번 홉을 뛰는 스타일을 구사했다.[4] 덕분에 설치된 경기장보다도 먼 13.71m라는 기록으로 2위를 1m 이상 앞서고 근대 올림픽 최초의 우승자가 되었다. 그는 이 종목에서 우승해 은메달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1위에게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제공했다.[5][6]

높이뛰기 종목에서는 1.65m를 기록해 공동 2위로 동메달을 받았고, 멀리뛰기 종목에서는 5.84m를 기록해 3위가 되었다. 당시에는 3위에게 메달을 수여하지 않았으니 그는 해당 대회에서 총 2개의 메달을 받은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코널리는 보스턴의 시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시민들은 그에게 금시계를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2.2.2. 1900 파리 올림픽

코널리는 바로 다음 올림픽인 1900 파리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출전 종목은 세단뛰기. 그러나 결승전에서 마이어 프린슈타인에게 패배해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2.3. 은퇴 이후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는 선수가 아닌 언론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는 미군 육군 공병 사령부에서 일하던 당시 아일랜드계 매사추세츠 9보병대로 미국-스페인 전쟁[7]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고, 이 때 경험한 이야기를 '쿠바 전방에서 온 편지'라는 내용으로 보스턴 글로브 신문사에 펴냈다. 은퇴 이후에는 몇 년간 수많은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해양 탐사기의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고, 200권 이상의 단편집과 25권의 소설을 출판했다.

자신의 휴학 신청을 거절한 하버드 대학교 측에게 여전히 악감정이 남아 있었는지, 자퇴 이후 단 한 번도 하버드 대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1949년에는 하버드 대학교가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코널리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하버드 측에서는 1948년에 그에게 명예 선수 스웨터를 지급했다고 한다.

코널리는 88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세단뛰기 은메달을 포함한 코널리와 관련된 물품은 현재 콜비 대학교의 도서관에 안치되어 있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8] 1896 아테네 세단뛰기
동메달[9] 1896 아테네 높이뛰기
3위[10] 1896 아테네 멀리뛰기
은메달[11] 1900 파리 세단뛰기

[1] 당시에는 로렌스 과학 학교를 졸업할 경우 하버드 대학교에 무조건적으로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2] 코널리가 정말로 이런 답변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주장 외에는 근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3] 당시에는 종목명이 '홉, 스킵, 점프'(Hop, Skip, Jump)였다.[4] 현재는 규정 위반이나, 당시에는 규정 위반이 아니었고 심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5] 2위에게는 은메달 대신 동메달, 3위에게는 메달 없이 월계관만 수여했다.[6] 때문에 '근대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금메달이 우승의 상징이 된 현재에는 편의상 이렇게 부르는 경우도 있다.[7]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이 쿠바 문제를 두고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인 전쟁[8] 1896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1위에게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수여했다.[9] 1896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2위에게 은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수여했다.[10] 1896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3위에게 메달을 수여하지 않았다.[11] 1900 파리 올림픽부터 금/은/동메달 체계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