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 James FitzMaurice FitzGerald | |
성명 |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 James FitzMaurice FitzGerald |
출생 | 1520년경 |
아일랜드 왕국 코크주 케리커리히 | |
사망 | 1479년 8월 18일 (향년 58~59세) |
아일랜드 왕국 티퍼레리주 털스 | |
아버지 | 모리스 피츠존 피츠제럴드 |
어머니 | 줄리 니 마오일리아인 |
배우자 | 캐서린 버크 |
자녀 | 모리스, 제럴드, 앨리스 |
직위 | 데스몬드 반란군 지도자 |
1. 개요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데스몬드 반란을 두 차례 주동한 아일랜드 장군.2. 생애
12세기에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의 후손인 피르제럴드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모리스 피츠존 피츠제럴드는 코크 시 인근 케리커리히의 영이며, 어머니 줄리 니 마오일리아인은 티퍼레리주 술로가데의 게일인 집안인 오우니 가문의 수장인 디어무이드 오마호니의 딸이었다. 피츠모리스는 티퍼레리 주의 클랜윌리엄 영주인 윌리엄 버크의 딸 캐서린 버크와 결혼하여 모리스(?~1588), 제럴드(?~1588), 앨리스[1]를 낳았다.1565년, 그의 사촌인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임스 피츠제럴드는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가 이끄는 버틀러군과 애페인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패배를 면치 못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봉신들이 주군인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두 가문의 수장을 런던으로 불러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게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친족이었던 토머스 버틀러는 사면받았지만,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그의 형제 데스먼드의 존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데스몬드 백작령의 군대는 피츠모리스에게 넘어갔다.
1568년 7월, 피츠모리스는 제16대 케리 남작이자 릭스노의 영주인 토머스 피츠모리스의 영토인 클랜머리스 남작령으로 진군해 릭스노를 포위 공격하고 데스몬드의 영주권을 주장했지만, 릭스노 공략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1568년 말,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케리커리히 남작령을 워럼 세인트 레저 경에게 저당권으로 양도했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케리커리히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피츠모리스를 격분하게 했고, 그는 이에 맞서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다.
1569년, 피츠모리스는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에게 제럴드 피츠제럴드를 여태 석방하지 않는 것에 항의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주민들이 제럴드 피츠제럴드를 대신해 데스몬드 백작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며 백작 작위를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제럴드 피츠제럴드의 아내인 엘리노어 버틀러는 11월에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츠모리스가 남편의 명예를 더욱 훼손하고 그의 영지를 빼앗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킨 그는 그해 6월 코크 주 남쪽에 있는 잉글랜드 정착지 케리커리히(Kerrycurihy)를 습격했다. 그 후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도시와 지역 영주들을 공격해 피해를 줬다.
1569년 7월, 피츠모리스는 4,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거주지인 킬케니를 포위했다. 헨리 시드니는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군 600명을 동원해 더블린에서 남쪽으로 진군했고, 400명은 바다를 통해 코크 주에 상륙하게 했다. 한편, 제임스 버틀러는 자신의 거주지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서 돌아와 버틀러 가문 인사들과 일부 게일인 씨족을 동원했다. 킬케니를 공략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피츠모리스는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오몽드 백작, 헨리 시드니, 그리고 먼스터 주지사로 선임된 험프리 길버트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해 피츠모리스의 동맹 세력이 보유한 영지를 파괴했다. 각 영주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후퇴해야 했기 때문에, 피츠모리스의 군대는 와해했다. 월터 롤리의 이부형제였던 험프리 길버트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고 진지 입구에 잘린 머리를 세워놓음으로써 게일인에게 공포심을 심어줬다.
헨리 시드니는 피츠모리스를 케리주 산악지대로 몰아놓았지만, 피츠모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1570년까지 피츠모리스의 동맹 세력 대부분이 헨리 시드니에게 항복했지만, 그는 3년간 유격전을 꿋꿋이 전개했다. 1571년 2월, 먼스터 주지사로 새로 임명된 존 페로는 병사 700명을 이끌고 1년 넘게 피츠모리스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피츠모리스는 1571년 킨세일 인근에서 잉글랜드 선박을 나포하고 킬말록 마을을 불태우는 등 몇 차례 소규모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573년 초, 잉글랜드군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난에 시달린 병사들이 계속 이탈한 결과, 피츠모리스에게 남은 병력은 100명 미만에 불과했다. 결국 피츠모리스는 케슬메인 마을로 피신했다가 먼스터 주지사 존 페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되자, 1573년 2월 23일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귀순했다. 피츠모리스는 칼말록 교회에서 존 페로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했고, 존 페로는 아들을 인질로 넘기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구제하기로 했다.
1573년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가 런던 탑에서 풀려나서 영지로 돌아갔고, 피츠모리스는 1574년에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에 1575년 프랑스로 망명한 피츠모리스는 자신을 몰락시킨 아일랜드 행정부에 강한 반감을 품고, 새로운 반란을 위한 지원을 얻으려 애썼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궁정에 자주 드나들며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을 수호하고 싶으니 군사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기 위해서는 잉글랜드 왕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고, 펠리페 2세는 그를 호의적으로 대하긴 했지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을 쏟아붓는 상황에서 아일랜드에 별도의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이에 피츠모리스는 교황령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피츠모리스는 교황령에서 잉글랜드에서 로마로 망명한 윌리엄 앨런, 니콜라스 샌더스 등 가톨릭 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잉글랜드 모험가 토머스 스터클리 선장과 함께 그레고리오 13세의 사생아이며 소라 공작, 아키노, 아르체, 아르피노, 비놀라 후작인 자코모 본콤파니를 아일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
1578년 3월, 교황으로부터 보병을 지원받은 토머스 스터클리는 로마 치비타베키아에서 병사 1,000명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출항했다. 이 병력에는 사면받은 노상강도, 총사, 그리고 피사노의 헤라클레스와 볼로냐의 세바스티아노 디 산 주세페를 포함한 몇몇 전문 장교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에서 아일랜드인 몇 명을 추가했고, 펠리페 2세에게 리스본으로 가서 더 좋은 배를 확보하고 피츠모리스와 만나게 했다. 그러나 스터클리는 세바스티앙 1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모로코 원정에 가담했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1세와 함께 전사했다.
스터클리가 전사하면서 아일랜드 원정이 좌절되었지만, 피츠모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니콜라스 샌더스 등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그레고리오 13세의 허가를 받아 새로운 원정대를 구상했다. 1579년 6월 초, 피츠모리스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코루냐에서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군대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출항했다. 함대는 피츠모리스의 선박과 스페인 샬롭(Shallop)으로 구성되었으며, 마태오 데 오비에도와 니콜라스 샌더스가 교황의 위임장을 들고 가세했다.
원정군은 영국 해협을 항해하던 중 잉글랜드 선박 2척을 나포했고, 7월 16일에 딩글 항구에 도착했다. 이틀 후 인근의 스머윅 항구에 정박했고, 철기 시대에 건설된 곶 요새인 던 안 오이르(Dún an Óir: 금의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니콜라스 샌더스는 딩글에서 교황의 깃발을 들고 행진했고, 피츠모리스는 그레고리오 13세의 서한으로 인가된 성전을 선포했다. 여기에 스페인군 100명을 태운 갤리선 2척이 7월 25일에 반군에 가담했다.
8월 1일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와 합세하여 3,000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한 피츠모리스는 코노트로 진군해서 그곳에서 반란군을 추가로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1579년 8월 18일, 그는 티퍼레리 주의 털스 수도원에서 서원을 하러 갔다가 사촌인 테오발드 버크의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 도중 가슴의 움푹 들어간 부위에 총을 맞았지만, 피츠모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테오발드 버크와 그의 형제 윌리엄 버크에게 검을 휘둘러 두 사람 모두 사살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친구들에게 사후에 자기 머리를 베어 숨김으로써 적군이 자신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피츠모리스의 머리는 숨겨졌지만, 몸통은 어느 나무 아래에 숨겨졌다가 한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킬말록 마을로 옮겨진 뒤, 몇 주 동안 교수대에 못 박혀 있다가 머스킷 총격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그 후 반란군은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가 이끌었다. 피츠모리스가 잉글랜드로 데려온 군대의 잔존 세력은 1580년까지 버텼지만, 결국 스머윅 공방전에서 잉글랜드군에게 몰살당했다.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은 1583년 11월 제럴드 피츠제럴드가 암살당하면서 마침내 진압되었다.
[1] 클렌데보이의 영주인 에이드 막 펠림 오닐의 아들인 니얼 막 에이드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