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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8 23:43:19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

<colbgcolor=#C3DDFF><colcolor=#000>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
Edward, 2nd Duke of York
파일:노리치의 에드워드.jpg
이름 노리치의 에드워드
(Edward of Norwich)
출생 1373년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노리치 또는 하트퍼드셔 주 킹스 랭글리
사망 1415년 10월 25일 (42세)
프랑스 왕국 아쟁쿠르
배우자 필리파 드 모훈(1398년 결혼)
아버지 랭글리의 에드먼드
어머니 카스티야의 이사벨
형제 콘스탄스, 리처드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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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공작, 장군. 백년전쟁 시기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2. 생애

1373년경 잉글랜드 왕국에서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딸 이사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콘스탄스[1], 리처드[2]가 있었다. 그의 이름 뒤에 'of Norwich'가 있는 것을 볼 때 노리치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아버지가 거처했던 킹스 랭글리일 가능성이 더 높으며, "요크의"를 의미하는 "d'Everwick"가 'Norwich'로 잘못 기재된 것이 그대로 전해졌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1377년 7월 16일 리처드 2세대관식에 참여해 기사 작위를 받았고, 1387년 5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궁정에서 리처드 2세의 친구가 되었고, 190년 2월 러틀랜드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수많은 왕실 보조금을 받았다. 또한 1394~1935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동행한 뒤 코르크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러틀랜드와 코르크 백작 칭호를 쭉 이어갔다. 이후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도버 성 보안관,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 대장, 채널 제도 보안관, 런던 탑 대장을 맡는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1397년 7월 11일, 리처드 2세는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반역 혐의로 체포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7월 12일에 토머스가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 무관장을 맡았으며, 8월 5일 글로스터 공작,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반역 혐의에 관한 재판을 이끈 8인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글로스터 공작이 칼레 감옥에서 피살당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 후 에드워드는 1397년 9월 28일에 글로스터, 워릭, 아룬델의 몰수된 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받았으며, 9월 29일에 글로스터 공작이 가지고 있던 칭호인 오말레 공작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1398년 2월 10일 서부 국경지대의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8월 11일 제5대 모티머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모티머 가문의 토지에 대한 관리를 수행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해 9월 16일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결투 재판을 주재했지만, 리처드 2세가 도중에 개입해 두 사람 모두 추방하면서 무산되었다. 1399년 2월 3일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사망한 뒤, 리처드 2세는 해외로 추방되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영지를 계승할 권리를 박탈하고 대부분의 랭커스터 영지를 자기가 가지고 그에게 일부 영지를 나눠줬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는 에드워드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 사이,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6월 말에 요크셔의 레이븐스퍼 인근에 상륙한 후 랭커스터파 지지자들을 대거 끌어모았다. 여기에 잉글랜드 북부의 강력한 거물인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도 합류했다. 리처드 2세는 에드워드의 조언을 따라 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의 지휘하에 일부 부대를 노스 웨일즈로 보냈고, 7월 19일에 나머지 군대와 함께 사우스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리처드 2세와 에드워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는 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흩어졌고, 리처드 2세가 이끌었던 군대 역시 도주했다. 한편, 에드워드의 아버지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리처드 2세가 부재하는 동안 호국경으로서 잉글랜드를 지켜야 했지만, 군대를 일으켜 헨리를 치러 가던 중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7월 27일 버클리에서 항복했다. 아버지마저 헨리 쪽으로 붙자, 에드워드 역시 아버지를 따라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귀순했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즉위했다.

헨리 4세는 즉위 직후인 1399년 8월 31일 에드워드에게서 런던 탑 대장직을 박탈했다. 그해 10월 20일, 에드워드는 윈저성에 투옥되었고 11월 3일 오말레 공작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헨리 4세는 곧 그를 풀어준 뒤 에드워드가 채널 제도의 관리권과 와이트 섬의 영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1400년 1월 6일, 윈저 성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헨리 4세는 자신과 아들들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고발을 받았다. 에드워드가 이를 고발했다는 프랑스 연대기 기록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리처드 2세는 1400년 2월 14일에 런던 탑에서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1400년 10월 노스 웨일즈의 호국경에 선임되었고, 1401년 7월 5일에는 아키텐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402년 8월 1일 아버지 에드먼드가 사망한 뒤 요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403년 아키텐에서 잉글랜드로 귀환한 에드워드는 그 해 가을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사우스 웨일스의 보안관으로 선임된 뒤 3년간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아키텐과 사우스 웨일즈에서 일련의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막대한 빚이 생겼고, 이로 인해 자신이 소유한 접시를 팔거나 담보로 삼았고, 땅을 저당잡히기도 했다.

1405년 2월, 웨일즈 반군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 글린두르의 사위인 에드먼드 모티머,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잉글랜드 왕국을 삼중 분할하기로 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조카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오와인 글린두르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 웨일스의 공작이 되며, 헨리 퍼시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들은 헨리 4세에게 붙잡혀 있는 모티머의 조카 에드먼드 모티머를 구출해 웨일스로 데려가려 했다. 1405년 2월 13일, 어린 에드먼드 모티머와 형제 로저는 윈저성에서 납치되었지만 곧 첼트넘 인근에서 헨리 4세의 병사들에 의해 탈환되었다.

에드워드의 여동생 콘스탄스는 오빠가 이 납치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나중에 음모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시인하고 체포된 뒤 페번시 성에 갇혀 17주 동안 투옥되었다. 그러다가 웨일스 공이자 왕위 후계자인 헨리 왕자가 그를 "충성스럽고 용감한 기사"라며 변호했고, 그 덕분에 1405년 12월 8일 사면받고 영지를 돌려받았다. 1406년 11월 런던 탑의 대장에 선임된 뒤 웨일즈에서 헨리 왕자의 부관으로서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을 수행했다. 1407년, 헨리 왕자는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에 대해 의회에 보고하면서, "만약 공작의 좋은 조언이 없었다면, 나와 다른 이들은 큰 위험과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에드워드는 헨리 왕자와 친분을 돈독히 했다.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의 저서 <Livre de Chasse(사냥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직접 여러 장을 추가해 <The Master of Game(게임의 달인)>이라는 작품으로 편찬하고 헨리 왕자에게 헌정하는 등 사냥에 대해 많은 지식을 알려줬다. 그러나 헨리 4세 치세 말기에 헨리 4세와 헨리 왕자가 권력 분쟁을 벌이자, 에드워드는 헨리 4세의 편을 들었다. 1412년 헨리 왕자가 정계에서 배제된 뒤 아버지의 총애를 얻은 랭커스터의 토머스와 함께 부르고뉴에 맞서 아르마냐크 파를 돕기 위해 원정을 떠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413년 3월 20일 헨리 4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는 잠시 동안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새 국왕 헨리 5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아키텐으로 가서 그 지역의 방어 대책을 수립했다. 8월에는 파리로 가서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결혼을 협상했다. 1413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외교 협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 1415년,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프랑스 침공 며칠 전,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와 함께 헨리 5세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적발되어 긴급 체포된 뒤 8월 5일에 참수되었다. 에드워드 본인은 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

1415년 8월부터 9월까지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헨리 5세와 함께 프랑스 북부를 횡단하면서 분견대를 독자적으로 이끌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다. 역사가 마이클 존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광범위한 사냥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헨리 5세에게 큰 승리를 안겨줄 전투 계획을 세웠다. 즉, 프랑스군이 진흙탕으로 진격하도록 유인한 뒤 장병들이 그들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고, 기사와 병사들이 살아남은 적병을 포위해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선두 대열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치명적인 머리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동생 랭커스터의 험프리를 구하려다가 장 1세 달랑송이 휘두른 도끼에 투구를 가격당해 땅바닥에 쓰러진 헨리 5세를 급히 구하러 가서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뚱뚱해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대체로 에드워드 사후 100년 이상 지난 뒤인 튜더 왕조 사가들의 왜곡으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1381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혼담이 오갔지만 무산되었고, 1398년 제2대 모훈 남작 존 드 모훈의 딸 필리파 드 모훈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헨리 5세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던 형제 리처드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리처드에게 요크 공작과 러틀랜드 백작이라는 칭호를 물려받게 했다.


[1] 1374 ~ 1416 ~ 제1대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의 부인. 남편 토머스가 1400년에 사망한 후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와 불륜을 맺었고, 그 와의 사이에서 딸 엘레노어 홀랜드를 낳았다.[2] 1385 ~ 1415,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 앤 모티머와 결혼하여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낳았다. 즉,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