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 9º Reggimento d'assalto paracadutisti "Col Mosch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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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101FE><colcolor=#D4A110> 창설 | 1954년 |
| 국가 | |
| 소속 | |
| 상급부대 | 이탈리아 합동특수작전사령부 |
| 유형 | 특수부대 |
| 역할 | 특수작전[1] |
| 본부 | 토스카나 리보르노 반누치 |
| 규모 | 연대 |
| 표어 | 번개의 추진력으로 Della Folgore l'impeto |
| 링크 |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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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Reggimento d'assalto paracadutisti |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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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디티 돌격대 제9돌격부대 대원들 |
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의 정신적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이 창설한 아르디티(Arditi) 돌격대라 할 수 있다. 아르디티 돌격대는 당시 독일제국의 돌격대 슈투름트루펜(Sturmtruppen)을 벤치마킹한 부대로서 척탄 및 참호에서의 백병전에 특화되어 전선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제9부대가 1918년 6월 15일 조반니 메세 소령이 이끄는 600명의 아르디티 대원들과 함께 적에게 빼앗긴 방어선을 되찾기 위해 활약했으며 오후 10시에 발레 산 로렌조, 콜 파헤론, 콜 페닐론을 재탈환했다. 1918년 6월 16일 오전 7시 10분, 메세 소령은 이탈리아 포병이 명령대로 사격을 개시하지 않았음에도 콜 모스킨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여 10분 후 정상을 탈환했고, 300명 이상의 포로를 잡고 대량의 기관총을 노획했다.
며칠 뒤엔 제9부대가 아솔로네 정복에 참가했는데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병력들이 지친 상태에서 적의 반격으로 기세가 역전되면서 일시적인 승리로 그쳤다. 당시 아르디티 제9돌격부대는 병력 50%를 잃었다.
비록 일시적인 승리였지만 이탈리아는 아르디티 돌격대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1942년 5월 15일, 브라치아노에 주둔한 제82토리노보병연대에서 제1아르디티 대대가 창설되었다.
제1대대는 제101공수중대, 제102수영중대, 제103트럭중대로 분산되었으며 각 중대당 장교 2명, 병사 10명으로 구성된 10개 정찰대가 배속되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왕국군 타르퀴니아 공수학교에서, 리보르노의 이탈리아 해군 잠수학교와 폴라 해군기지에서 각자 공수, 수영교육을 받았고 트럭중대는 삼엄한 부대시설을 경비하기 위한 훈련을 수료했다. 모든 대원은 치비타베키아에 위치한 이탈리아 왕립 육군 공병학교에서 폭발물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1942년 7월 20일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본부는 지휘부와 최소 두 개 대대로 구성된 아르디티 연대 창설을 지시했고 산타 세베라에 아르디티 연대가 창설되어 제1아르디티 대대가 배속되었다. 당시 연대는 참모총장 작전실 직속부대였다.
한달 후인 1942년 8월 20일, 제111공수중대, 제112수영중대, 제11육상중대로 구성된 제2아르디티 대대가 창설되었고 같은해 9월 15일, 아르디티 연대는 부대명을 제10아르디티연대로 개명했다. 수영 중대는 상륙 중대로, 트럭 중대는 육상중대로 개명되었고 이후 1943년 1월 이들의 첫 작전이 결행되었다. 제1아르디티 대대의 제101공수중대, 제102상륙중대가 샤르데나 칼리아리로 이동해 튀니지의 연합군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두 중대 모두 두개의 정찰대를 로도스 섬으로 파견해 키프로스의 영국군과 맞설 예정이었다.
1943년 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제103육상중대는 튀니지에 파병되어 튀니지 전역의 적진 후방에서 정찰 및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고 1943년 3월 1일, 제3아르디티 대대가 창설되었다. 대대는 제121공수중대, 제122상륙중대, 제123육상중대로 구성되었다. 1943년 4월 제101공수중대의 두 정찰대가 별다른 임무 없이 로도스로 귀환했고 1943년 5월 4일 제113 육상중대가 시칠리아의 스코르디아에서 튀니지 내 연합군의 목표물을 사보타주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으나 5월 13일 튀니지 내에 남은 추축국 병력과 제103육상중대가 항복, 일주일 후인 1943년 5월 20일 제2아르디티 대대와 제112상륙중대가 시칠리아에 파견되었고 5월 29일 제123육상중대가 샤르데나로 이동해 항복한 제103육상중대를 대신해 제1아르디티 대대에 배속되었다.
그렇게 1943년 6월 10일, 제10아르디티 연대는 적진 후방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해 정보를 수집하는 특수중대를 창설했다. 제1아르디티 대대에는 제110특수중대가, 제2아르디티 대대에는 제120특수중대가, 제3아르디티 대대에는 제130특수중대가 배속되었다. 또한 부대가 재편성되면서 공수중대로만 이루어진 제4대대가 추가되었고 제5대대의 창설 역시 박차를 가했다.
재편성된 제10연대는 1943년 1월 16일 첫 작전을 수행했으며 제101공수중대 내 정찰대가 정보 수집 임무로 알제리에 투하되었다. 1943년 2월 16일, 같은 중대의 정찰대가 베니 만수르-베자이아 노선의 베니 만수르 철도 다리를 폭파했고 1943년 1월부터 7월까지 연대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철도 교량, 비행장 및 기타 목표물에 대해 20회의 공중 혹은 해상 사보타주를 수행했다.
이후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제2아르디티 내내가 연합군의 공수부대 체포 임무에 투입되어 7월 14일 카타니아 남쪽 시메토 강의 프리모솔레 다리로 이동했고 작전 중 영국군의 기습공격을 격퇴했다. 1943년 7월 30일 저녁, 제112상륙중대의 제4정찰대가 세 척의 상륙정을 타고 연합군 후방 브루콜리에 상륙했고, 내륙으로 이동하여 밤이 된 후 연합군의 연료 및 탄약 창고를 파괴했다. 정찰대는 도보로 시메토 강을 따라 전선으로 이동, 시메토 강 하구의 영국군 진지를 돌아 이탈리아군 진지로 도착했으며 1943년 8월 13일, 제2아르디티 대대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철수하면서 산타 세베라에 도착했다.
1943년 9월 8일 저녁, 이탈리아와 영미 연합국이 카시빌레 휴전을 발표하자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 침공으로 대응했고, 제111공수중대와 제122상륙중대는 독일군과 전투, 나머지 연대는 막사에 남아 대기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아르디티 부대를 해산했고 제112상륙중대와 제121공수중대가 무솔리니 휘하 국민공화국군에 합류했다.
여기서 대부분의 아르디티 부대가 해산되었으나 샤르데나에 배치되어있던 1대대는 존속되어 있었고 제1아르디티 대대는 휴전협정 발표 후 독일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1943년 9월 12일 독일군을 격퇴하여 샤르데냐에서 철수시켰다. 이들은 1944년 2월까지 섬에 머물렀으며 2월 19일 나폴리에 도착했다 3월 20일 제1아르디티 대대가 제9돌격부대로 개명되어 이탈리아 공동교전군 제1여단에 배치되었고 이들은 안코나 전투를 위해 폴란드 의용군에 배속되어 함께 싸웠다.
1944년 6월 18일, 제9돌격부대가 카세누오베 디 오시모 인근을 돌파했다. 이 작전은 안코나 해방에 결정적인 한순간이 되었고, 이는 방어선 조기 돌파를 위한 중요한 열쇠였다. 6일 뒤인 6월 27일, 제9돌격부대는 제1카발레제리 정찰 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나치 점령군이 로레토, 오시모, 필로트라노에서 무소네 강을 따라 구축한 에디트 방어선을 따라 18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폴란드 의용군, 폴란드 민병대, 마옐라 사단이 수차례 돌파를 시도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은 상태였음에도 제9돌격부대는 콜리 아 볼투르노, 과르디아그렐레, 친골리, 무소네 강과 에시노 강을 따라 전투를 수행했고 안코나 전투에서 카세누오베에서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 용맹한 활약으로 제9돌격부대는 두번째 용맹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9월 24일, 제9돌격부대가 제68레냐노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제3콜 모스킨 대대로 재창설 되었다. 부대는 영국제 장비로 무장했으며, 약 400명의 대원이 지휘중대, 3개 돌격중대, 지원 중대로 나뉘어 배치되었었다. 제68레냐노 보병연대는 레냐노 전투단에 배속되어 1945년 3월 23일 이디체 강에서 미군 제4군단의 일원으로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연합군의 스프링 공세와 볼로냐 전투에 참전했다. 이 활약으로 세번째 용맹훈장이 수여되었다.
종전 후 1년 뒤 1946년 8월 1일 제3콜 모스킨 대대는 해체되었고 부대원들은 제68레냐노보병연대의 제3퓨질리어대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1953년 4월 20일 체사노 보병학교에서 공수폭파공병중대가 창설되었으며 1년 뒤 부대는 공수파괴공작부대로 확장되었다. 1957년 5월 10일 피사 공수학교에 부대가 배속되었고, 1961년 9월 25일 대대로 확충되었다. 이들은 폴고레 공수여단에 배속되었고 1975년 군개혁으로 공수파괴공작대대는 제9콜모스킨 공수강습대대로 개명되었다.
당시 대대는 장교 36명, 부사관 196명, 병사 108명을 합친 총 340명으로 구성되어었으며 1976년 11월 12일, 대통령 조반니 레오네가 제10아르디티 연대의 깃발과 전통 제9돌격부대의 전통을 부대에 계승시켰다. 이들은 1982년 9월 제1투스카니아 총기병공수대대와 제2타르쿼니아 공수대대, 다른 이탈리아군과 함께 레바논 다국적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1983년 3월 15일 오후 9시, 산 마르코 대대 정찰대가 레바논 브라 캠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4명이 부상을 입고, 그중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자 콜 모스킨 대대의 전사령관이었던 프랑코 앙지 오니 준장은 적들을 요격하기 위해 부대를 지휘했고 적들은 부대와 조우하자마자 총격전을 벌였다. 레바논군이 중화기와 대전차 무기를 사용하여 대원 3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작전은 중단되었고 이탈리아군 한 명은 다리를 잃는 등 뼈아픈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 이스라엘군 사령부는 이탈리아 군에게 중동에서 밤에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들의 분전에 무전으로 경의를 표했다. 3월 18일 산 마르코 대대 소속 19세 필리포 몬테시가 매복으로 부상을 입고 이탈리아 셀리오 군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의료진의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3월 22일 몬테시가 사망했다. 콜 모스킨 대대는 1983년 11월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2년 뒤인 1985년 10월 7일 월요일, 아킬레 라우로 함이 나포된 날 오후 1시 15분 콤수빈과 함께 콜 모스킨 대대 소속의 대원 60명이 현장에 파견되어 콤수빈이 급습 임무를 수행하는 사이 콜 모스킨 대대가 인질 구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으나 협상으로 해결되어 무력충돌은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해 12월 30일, 당시 국방장관 스파돌리니의 요청으로 해군 특수부대인 콤수빈과 함께 대원 일부가 이탈리아 군사정보국인 SISMI의 작전에 파견되기도 했다.
1992년 12월 13일 이후 콜 모스킨 대대의 강습부대가 모가디슈에 도착했다. 이들은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발발 후 버려진 이탈리아 대사관 건물을 탈환했다.
1993년 6월 5일 오전 9시 30분, 모가디슈에 있던 기자이자 ANSA 뉴스통신사 특파원 레미지오 베니의 영상으로 극한상황에서의 폭동, 총격 사건을 언급했다. 베니는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소말리아 민병대원들에게 모가디슈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고 24명의 병사가 AK와 기관총으로 학살당했다. 당시 마르코 베르톨리니 중령이 이끄는 약 20명의 강습대원이 개입하여 더 큰 학살을 피할 수 있었으며 이탈리아 특수부대는 백병전을 벌이며 약 80명의 파키스탄인을 구출했다.
4주 후인 1993년 7월 2일, 파스타 공장 전투가 벌어졌다. 폴고레 공수부대, 기갑부대, 보병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개입 부대는 소말리아 민병대의 매복에 갇힌 이탈리아 병사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3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30세의 강습대원인 스테파노 파올리키 상사가 있었는데, 방탄조끼가 없는 비장 오른쪽에 총상을 입어 목숨을 잃었다. 전투의 공로로 그는 사후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4년 르완다에서 강습부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아프리카 땅에서 이탈리아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작전은 11월 19일 종료되었다 투치족과 후투족을 대상으로 한 르완다 집단학살이 이후 콜 모스킨부대는 이탈리아 국민들과 동포들, 현지 아이들을 대피시켰으나 소말리아에서의 공훈으로 훈장을 수상한 마르코 디 사라 원사가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교민들의 대피를 위해 이탈리아는 콜 모스킨 대원들과 공군 항공기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시켰고 수도 키갈리에 도착하자 콜 모스킨 대원들이 공항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다. 다른 부대에선 어떤 수단도 제공하지 않았고, 대원들은 공항에서 민간차량을 징발하고 개조한 뒤, 민간인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동해 수많은 저항을 뚫고 민간인들을 대피시켰다.[2]
1995년부로 부대는 연대로 승격되었고 12월 NATO군과 함께 보스니아에 파병되었다. 이들은 팔레와 고라즈데같은 위험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콜 모스킨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 다른 동맹국 특수부대들과 언어 장벽 없이 성공적으로 협력했으며 보스니아 주민들의 사고 방식과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1995년 겨울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이 사라예보 그르바비차를 포기한 상황에서, 콜 모스킨 대원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호감을 얻었으며 작전 지역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지휘부가 계속 순환하는 상황에도 보스니아에 주둔한 모든 특수부대 부대와 함께 합동관측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97년엔 3월엔 알바니아에 일부 부대가 구출 임무에 투입되어 브린디시 공항에 임시기지를 설치했고 치누크 헬기와 함께 이탈리아로 귀국하려는 사람들을 구출했다. 이는 이탈리아가 주도한 최초의 다국적 개입작전으로 프랑스, 터키, 그리스, 스페인,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덴마크가 참여했다. 콜 모스킨은 뒤레스 항구에 이탈리아군이 상륙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OSCE 및 유엔의 요청에 따라 1997년 4월 9일 의회에서 이를 승하여 4월 13일부터 8월 12일까지 작전이 진행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1997년 초 발생한 대규모파산으로 악화된 알바니아를 진정시키는데 기여했다.
이들이 배속된 다국적 보호군은 4개월간 약 1,700회의 작전 임무를 수행했으며, 주로 인도주의 단체들이 5,700톤 이상의 식량, 의약품, 씨앗, 의류를 배포할 수 있도록 호송대를 호위했다. 또한 6월 29일 7월 6일 선거에서 OSCE 감시단을 위한 674회의 보안 임무가 수행되었다.
콜 모스킨은 2006년 7월부터 NATO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배치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머무는 동안 연대 인원들은 탈레반 세력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2007년 9월엔 콜 모스킨이 영국 SBS와 함께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 서부 파라 주에서 납치된 이탈리아 보안기관 AISE 요원 두 명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참가했다. 콜 모스킨이 엄호를 담당했고, 최종 공격은 차량을 갖춘 영국 부대가 수행했다. 테러리스트들이 갑자기 포로들을 이송하려던 상황이라 작전은 즉흥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탓에 전투에서 두 명의 AISE 요원이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추정되는 부상을 입고, 며칠 후 한 명이 사망했다. 콜 모스킨은 2009년 10월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공로로 세 번째 군사훈장을 수여받았다.
2014년부로 콜 모스킨은 기존의 폴고레 공수여단에서 이탈리아 육군특수전사령부 휘하로 배속되었고 이듬해인 2015년이라크에서 30명의 콜 모스킨 강습대원이 팔루자와 라마디 사이에 새로 설립된 타카둠 군사 기지에서 미 특수부대와 함께 ISIS에 맞서 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리비아에도 최소 40명의 콜 모스킨 강습대원이 지상에 파견되어 훈련, 반군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2022년 콜 모스킨은 피사에서 리보르노의 빈누치 막사로 부대를 이전했다. 이후 부대는 2023년 5월 19일 에밀리아 로마냐에 발생한 홍수에 대원 43명이 파견되어 대민지원을 수행했다.
3.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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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 (9° Reggimento d'assalto paracadutisti "Col Moschin")
- 제1강습대대 (1° Battaglione Incursori)
- 제110강습중대 (110° Compagnia Incursori)
- 제120강습중대 (120° Compagnia Incursori)
- 제130강습중대 (130° Compagnia Incursori)
- 제140강습중대 (140° Compagnia Incursori)
- 작전지원대대 (Battaglione Supporto Operativo)
- 군수병참중대사령부 (Compagnia Comando e Supporto Logistico)
- C4중대 (Compagnia C4)
- 특수작전부대 훈련부 (Reparto Addestramento Forze per Operazioni Special)
- 강습훈련기지 (Base Addestramento Incursori)
- 제101신병중대 (101° Compagnia Allievi)
- 제102신병중대 (102° Compagnia Allievi)
- 참모인사국
- 작전, 훈련 정보사무소
- 군수 행정사무소
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전투대원들은 제1강습대대의 4개 강습중대중 한 팀에 배치되며 작전지원 중대가 이들의 작전을 지휘, 지원한다.
훈련부에선 지원자들을 훈련시키며 제101신병 중대에서 기초 과정을, 102신병 중대에서 고급 과정을 수료한다.
강습중대의 분견대는 보통 한 팀 당 6명이 배치되며 6명은 각자 전투 의무, 폭파(브리쳐), EOD, SF JTAC, 정보수집, 저격수(1~2명)등 각자 주특기를 부여받는다.
4. 선발
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에 지원하는 지원자는 최소 2년 혹은 4년간 이탈리아 육군에서 복무한 장교 혹은 부사관이여야 한다.[3]지원자는 피사에 위치한 BAI(Base Addestramento Incursori) 훈련센터에서 21일간의 선발과정을 치루고 이후 2년간의 훈련과정을 거친다. 초기 선발 및 훈련은 이탈리아 육군 특수부대인 제185 폴고레 공수정찰표적획득연대(185° Reggimento Paracadutisti Ricognizione Acquisizione Obiettivi "Folgore")와 제4산악공수연대(4° Reggimento Alpini Paracadutisti) 지원자들과 함께 수행한다.
우선 지원자는 7주간의 사전 선발 과정에 돌입하는데 8분 20초 이내에 2km 완주, 턱걸이, 팔굽혀펴기, 평행봉, 1분 45초 이내에 4m 로프 등반, 전투복 및 무장 상태로 45분 이내에 7km 완주, 1시간 12분 이내에 군장 상태로 10km 완주, 군화 없이 전투복 착용 상태로 15m 프리다이빙, 전투복 착용 후 부력 테스트, 맨몸으로 2분 15초 이내에 50m 수영 등 각종 체력 테스트를 수행한다.
이 테스트를 통과한 지원자는 제101신병중대에서 두 번째 선발 과정을 치루게 된다. 여기서 지원자는 전투복과 무기 없이 20kg 배낭을 메고 고도와 거리가 변화하는 5회의 시간 측정 행군, 리보르노 루스트리시미 단지에서 공중 장애물, 밧줄다리 넘기, 전쟁 지형 등에서의 용기, 협동력, 속도 평가, 해상기지에서 수중 혹은 수륙양용 시험에서 수상 수영 및 조정 등을 시험받는다.
이 기초 선발 과정을 통과한 지원자는 공통 선발과정에 돌입하여 폴고레 공수여단의 공수 훈련 센터(CAPAR)에서 4주간 기초공수 과정을 수료하며 이는 아직 기초 공수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지원자들이 공수 과정을 수료하도록 돕는다.,
이후 15주간 리보르노 및 몬토리오 베로네세에서 기초 특수작전 오퍼레이터 과정을 수료하는데 신체능력과 지구력을 향상시키고 특수작전의 기초능력을 습득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각종 지형에서의 행동, 행군, 독도법 학습, 응급처치 등의 교육 이수가 포함된다.
기초 특수작전 오퍼레이터 과정을 수료한 대원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의 대원들이 되기 위해 52주간 전문화 훈련에 돌입한다. 첫번째로 특수부대 기초 전투과정은 23주간 콜 모스킨 공수강습연대의 교관들에게 생존술(SERS) 과정 3주, 폭발물 취급 과정 8주, 특수전 기술 및 전술 절차, 전투 의료 교육, 위성 통신 및 무선 장비등의 통신 교육, 소형 무기술 등의 교육을 수료한다.
이 과정을 수료한 지원자들은 특수부대 고급 전투과정으로 5주간 시가전, 피아식별 및 CQC, 침투 등 다양한 상황, 다양한 유형의 건물 내부에서 벌이는 전투 훈련을 심화한다.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친 지원자들은 공수강습 자격 과정을 시작하며, 다양한 특수전 환경 및 작전에서 활동하기 위해 6주간의 보트를 이용한 주야간 항법 훈련, 수상 수영 훈련, 이동 중인 보트의 진수 및 신속 회수 훈련, 해양 수단에 대한 이론, 실무적 교육, 보트 면허 취득 교육을 술효하고 3주간 적성국 군대의 무기, 군복 등의 대한 지식을 학습한다.
이후엔 자유낙하 훈련으로 공수코스를 통과하여 20회 이상의 점프를 통과하면 진행된다. 훈련은 피사의 공수 훈련 센터에서 5주에서 6주간 진행되며, 이 기간 동안 최대 약 3-4000미터(10,000피트) 높이에서 강하가 이루어진다.
2011년부턴 아오스타의 산악 트레이닝 센터에서 6주간 기본 등산 훈련 과정으로 산악 등반 기술 및 기본 지식 학습으로 산악전 역량을 강화했으며 또한 6주간 진행되는 기초 스키 훈련 과정은 아오스타의 산악트레이닝 센터에서 스키 등반, 크로스컨트리 스키, 눈사태 예방, 한랭 기후 생존, 눈내리는 산악에서의 이동 훈련을 실시한다.
이후 페루자에 있는 육군 외국어학교 혹은 리보르노의 학교에서 5주간 기초 영어 교육 과정을 수료하면 지원자들은 공수강습부대의 자격증을 얻고 작전중대 내 분견대에 배치된다. 이렇게 부대에 배치된 대원들은 해군 특수부대인 콤수빈에서 12주간 실시하는 컴뱃 다이버 과정, 북극 및 고산 환경에서 행동하는 고급 산악전 과정, 3~4주간 수행되는 고공강하(HALO/HAHO) 등을 추가로 수료할 수 있다.
또한 각자 저격수 교육, 공군 항공학교의 FAC 교육 및 화력통제관 교육, 로마 보건 학교에서 실시하는 전투 의무병 교육, 육군 공병부대에서 EOD 및 IDD 등의 교육을 수료하여 주특기를 배정받으며 공통적으로 5주간의 요인 경호 교육, 육군 외국어 학교의 영어 심화 교육에 지원할 수 있다. 이 중 전투 의무병의 경우 플렌도르프의 특수작전학교에서 특전전투의무병 과정에 참석하여 응급처치의 기본 절차, 지혈 등의 치료과정을 수료한다. 또한 전투 의무병은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의 18D 과정에 지원하여 위탁으로 교육을 수료할 수 있다.
5. 장비
- 글록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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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레타 MG42/59
- M2 브라우닝
- M203 유탄발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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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처파우스트 3
- 스파이크 대전차 미사일
6. 관련문서
[1] 대테러, 인질구출, 요인경호, 직접타격, 비정규전, 특수정찰, 군사훈련 등[2] 다만 마냥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는데 캐나다군 장성이자 당시 르완다의 유엔 군사 사절단 사령관이었던 로메어 달레어는 자신의 저서 "악마와 악수하다"에서 당시 이탈리아군이 공항의 차량 일부를 파괴했다고 증언했고, 이탈리아군 뿐만 아니라 키갈리에 개입한 유럽군 전체가 유엔과 협력하지 않고 개별 행동을 했으며 르완다 민간인에게는 지원을 일체 제공하지 않고 유럽인의 대피에만 집중했다며 비판했다.[3] 보통 4년차에 지원하지만, 특수부대에 지원할 의사가 있거나 이미 육군특수부대 사령부 내 특수부대에서 복무중인 인원에 한해 2년차 지원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