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멸망전 趙國滅亡戰 Fall of Zhao | ||
시기 | 기원전 370년 | |
장소 | 조나라 수도 진양 (오늘날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남서) | |
원인 | 조나라에 고용된 누번군이 조선을 공격함에 대한 보복 | |
교전국 | 조선朝鮮 | 조趙 |
지휘관 | 공자 기이 후장군 악조 별부사마 고비 동관아경 기라 | 조후 조종† 상방 대성오† |
병력 | 조선군 8만 | 조군 1만 9천 |
피해[1] | 조선군 약 8백 | 조군 약 7천7백여명 |
결과 | 조나라의 패배 | |
영향 | 조나라 멸망, 구 조나라 공실가문 조선으로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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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조후 조종은 조나라의 재기를 위하여 진나라와 밀약을 맻고 위나라의 알여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계획의 첫번째로 위의 동맹국인 조선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해 유목민족 누번을 고용하여 조선령 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거액의 보수에 혹한 누번 족장은 조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를 공격하였지만, 막상 공격하려니 관시를 통해서 안면을 익힌 이들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철수하게 된다. 조선은 이러한 누번의 공격에 어떠한 음모가 있음을 간파하고 누번을 압박하여 배후에 조나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후 기식은 공자 기이를 주축으로 8만 대군을 파견하여 보복에 들어가게 된다.[2]
조후 조종은 조나라의 재기를 위하여 진나라와 밀약을 맻고 위나라의 알여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계획의 첫번째로 위의 동맹국인 조선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해 유목민족 누번을 고용하여 조선령 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거액의 보수에 혹한 누번 족장은 조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를 공격하였지만, 막상 공격하려니 관시를 통해서 안면을 익힌 이들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철수하게 된다. 조선은 이러한 누번의 공격에 어떠한 음모가 있음을 간파하고 누번을 압박하여 배후에 조나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후 기식은 공자 기이를 주축으로 8만 대군을 파견하여 보복에 들어가게 된다.[2]
2. 배경
2.1. 조의 사정
위나라의 내전이 끝나자 진공 영사습은 위나라가 내전의 여파를 극복하기 전에 서하를 점령할 것을 계획해 친히 5만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소량으로 진격하였다. 또한 영사습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이민족 의거와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조나라에게도 협공을 요청하게 된다.
조후 조종은 영사습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한편 위의 동맹국인 조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누번을 고용하여 조선령 대를 공격해 조선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린 후 위나라령 알여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종은 만일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고 보복할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상방에게 묻는데, 상방 대성오는 조선령 대와 진양을 잇는 길은 황폐화 되어있어 전차가 지날 수 없다고 답변하였고 이에 조종은 안심하게 된다.[3]
이때 조종은 만일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고 보복할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상방에게 묻는데, 상방 대성오는 조선령 대와 진양을 잇는 길은 황폐화 되어있어 전차가 지날 수 없다고 답변하였고 이에 조종은 안심하게 된다.[3]
2.2. 조선의 사정
갑작스러운 누번의 침략(?)에 조선 조정은 즉각 사태파악에 들어갔다. 누번의 공격이 약탈이라기에는 피해가 너무나도 적었고 우발적으로 보이기에는 그들이 동원한 병력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압박에 누번족장은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답변하였다.죽인 적의 두개골을 도금해서 술잔[4]으로 쓴 사람의 후예, 입니다.
누번족장의 답변에 조선은 조양자를 떠올리고 누번의 배후에 조나라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기식은 즉각적으로 조나라에 보복하기로 결심하고 8만 대군을 편성하여 그 사령관으로 공자 기이[5]를 임명하였다. 기이는 자신을 도와줄 장수진으로 악조, 고비, 기라 3명을 데려가 생애 첫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3. 전쟁의 전개
3.1. 조군의 방위준비
한편 조나라는 누번이 대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곧장 위나라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북부지역 귀족들이 위나라 진공에 갖은 이유[6]를 들어가며 발목을 잡게 되었다. 결국 조종은 귀족들과의 알력으로 지체하는 사이 조선군이 안문산을 넘어서 진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조종은 낭맹과 구유간의 길이가 너무 기니 요새인 진양성에 결전하기로 마음먹고 농성준비에 들어간다.3.2. 기이의 고뇌
조나라가 진양성에서 농성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기이는 요새도시 진양성의 공략을 위한 책략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진양성이 수공에 매우 취약한 구조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이는 만일 수공을 가할 시 진양성 내부의 군사들은 물론이요 민간인들이 겪게될 피해와 차기 군주로써 과연 그러한 비도의 방법을 쓰는것이 합당한지 고뇌하게 되었다. 다음날 진양성 인근을 정찰하고 온 고비에게서 인근에 수공을 걸만한 물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듣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진양성 공격을 명한다.3.3. 진양공방전
진양에 주둔하던 조군은, 적은 병력과 부족한 물자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잘 싸웠다. 그 결과로, 조선군에 8백의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상 외의 격렬한 저항에도 공자 기이는 침착하게 병력을 운용해 결국 진양성문에 구멍을 뚫는 것에 성공했다. 성문이 뚫리자 수만의 조선군들이 성 내부로 들이닥쳐 닥치는대로 조군을 베어넘겼다. 이와중에 조나라 상방 대성오가 저항 도중 전사하였고 조나라 군은 4할의 피해를 본 후 조선군에 항복하였다.4. 결말
4.1. 조종과 조나라의 최후
성문이 뚫리고 측근이자 파트너였던 대성오마저 전사하자 조종은 크게 비관하며 자결하였다. 조선군이 급히 궁정 내부로 진입했을 때 그녀의 몸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있었다. 죽은 조종을 바라보며 기이는 책에서나 보아오던 한 나라의 멸망을 눈으로 보게 되어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살아남은 조종의 아들 조어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껴서인지 이후 그를 마치 자신의 일족처럼 대우[7]하였다. 이렇게 기원전 370년 조나라는 멸망했다.5. 전후처리
5.1. 위나라의 전략 변경
조선이 위의 배후를 위협하던 조나라를 멸국시키는 사이 서하에서 대치중이던 위진전쟁은 진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에 위나라는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여 동맹국 조선에 제나라 견제를 맡게하고 위는 서하에 온힘을 다하기로 했다. 상방 공숙좌의 설명에 위후 위앵은 그렇게 될 시 조선이 져야 하는 부담이 크다며 거절하였지만, 공숙좌는 조선의 수락을 받아오겠다 하면서, 마침 조나라 멸망에 대하여 해명하려고 조선에서 보낸 기취와 협상하게 되었다. 위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1) 위는 대제전선에서 빠지고 이를 조선과 한이 담당한다. 필요한 물자는 지원한다.
2) 조선이 점령한 구 조나라령은, 모두 조선령으로 인정하고 포로로 잡은 조공자의 처우도 맡긴다.
3) 한단 방위를 위하여 위나라령 알여를 할양고 조선후를 방백으로 제수하도록 천자께 주청을 올리겠다.
2) 조선이 점령한 구 조나라령은, 모두 조선령으로 인정하고 포로로 잡은 조공자의 처우도 맡긴다.
3) 한단 방위를 위하여 위나라령 알여를 할양고 조선후를 방백으로 제수하도록 천자께 주청을 올리겠다.
이에 기취는 황급히 본국으로 돌아가 공숙좌가 내건 조건을 기식에게 보고하니, 기식은 방백 제수대신 위나라령 강평의 할양을 수락하면 받아들이겠다고 답변하였다. 공숙좌는 이 조건에 한단과 강평사이의 위읍을 추가로 할양하고 위(衛)나라의 지원 이라는 조건을 추가하여 협상을 마무리 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구 연나라와 조나라령을 차지하고 본격적인 대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8]
[1]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2] 메타적으로는 한 나라의 멸망이 결정된 전쟁 중 가장 스레 수가 짧았다. 이전의 연나라나 노나라, 이후의 월나라에 비하면 1스레조차 걸리지 않았을 정도.[3] 부족한 정보 때문에 조선이 실질적으로 전차를 안 쓴다는 변수를 감지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조나라는 조금만 더 가만히 있으면 영원히 위나라에 옭아메일 것만 같은 풍전등화의 형국이었고, 결국 최선의 판단이라 여기고 일전의 동쪽 부족들을 짓밟은 소식을 토대로 제대로 된 국가 외의 변수를 싫어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선의 신경을 북방에 옭아메려 한 것이었다.[4] 조양자는 지씨의 대부 지백과 그 후손을 멸하고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금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한다.[5] 기식이 군주란 군공이 없으면 얕보이기 쉽다면서 일부러 보낸것이다.[6] 이길수 있어? 승산은? 성공할 경우 내 몫은?[7] 이후 조어 등 살아남은 조씨 일족은 조선의 귀족으로 살게 되었으며, 이후 조옹(본래 역사에서의 조무령왕), 공자 조장(본래 역사에서의 조무령왕의 장남), 조하(본래 역사에서의 조혜문왕) 등 걸출한 인재를 내게 된다. 하지만 조어는 끝내 기식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한 것인지, 죽기 얼마 전에 찾아온 기유에게서 기식을 겹쳐보고 용서를 구하다가 혼절했다.[8] 이 또한 대제전선을 조선에게 위임하고자 하는 위나라와 당시 자국 내 정책방향이었던 반제기조를 국력 신장이랑 연결시킨 조선의 이해가 자연히 맞아떨어지며 발생한 것이다. 강평의 할양부터가 대제전선을 완전히 도맡기 위해서라도 필요했고, 동시에 공숙좌의 의도와 작계상 이 요구의 진의는 공숙좌의 주군 위앵에겐 다소 미묘했을지언정 직접 마주했던 공숙좌로써는 반길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군권과 병권은 일전에 주군으로부터 전권대리인임을 선언받을 만큼 공숙좌는 위앵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공숙좌의 확언대로의 상황이 이어지니 위후 또한 결국 이를 무난하게 여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