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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21:53:18

조나라 협공전

조나라 협공전
趙國挾攻戰
Coordinated Strike upon Zhao
시기 기원전 381년
장소 조나라 전역
원인 조나라의 위국령 황성 점령과 그 이후 협상파토로 인한 위무후의 보복전
교전국 조선朝鮮
위魏
조趙
지휘관 대장군 고거
우장군 기황
별부사마 악자
별부사마 악조

위무후 위격
위 동부군 사령관 흔양
대부 오기
조성후 조장
요 현령
방자 성주
거록 현령
병력 조선군 10만
위군 ???
조군 6만 7천
피해[1] 조선군 약 1만
위군 ???
조군 약 1만1천여명
결과 조나라의 패배
영향 조나라 사실상 중원무대에서 퇴출

1. 개요2. 배경
2.1. 조의 사정2.2. 위와 조선의 사정
3. 전쟁의 전개
3.1. 조선군의 쾌진격3.2. 위군 태행산맥 서부 공격3.3. 조선군의 거록 점령3.4. 한단공방전
4. 결말5. 전후처리
5.1. 조나라령 분배와 금낭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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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제나라가 조선,월과 함께 노나라를 공격하고, 위가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하로 진군하자, 평소 위나라의 통수를 칠 기회를 노리던 조성후 조장은 위나라의 동북부 황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주변국 전부의 신뢰를 잃어버려 조나라의 영역은 조선과 위에 의해 대대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위나라의 북부 변경 속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2. 배경

2.1. 조의 사정

조나라는 삼진이란 이름으로 위나라와 가까이 지냈었지만, 조선과 함께 위나라령 중산을 공격했다가 다시 화친하는등 이 몇십년 사이에 계속 스탠스를 바꾸고 있었다.
여기에 내전을 통하여 조후의 자리에 오른 조성후 조장은 겉으로는 자신을 후원하고, 나름 관대한 조건으로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보상을 받아간[2] 위나라와 친하게 지냄을 표방하였지만 내심 위를 마땅치 않게 보고 틈이 보일시 통수를 날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제나라가 조선,월과 함게 노국점령에 나서고 위나라 또한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하로 진군하여 위나라의 동북부가 비게 되자 기회를 노리던 조장은 위나라령 황성을 점령하고 재빨리 반위노선을 표방하였다.
조장의 전략은 반위노선을 공표함으로써 똑같은 반위이자 강국이였던 제나라의 지원을 통하여 위나라의 보복을 막는 것이었으나 제나라는 시도때도 없이 박쥐짓을 하는 조나라를 믿음직하지 않다고 여기었고[3], 북방의 아군이라면 교류도 활발하고 같이 노나라를 멸망시켰던 조선이 있었다. 따라서 제나라는 그런 조장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게 되었고, 조장의 전략은 어긋나게 되었다.
이후 위나라의 사신이 점령한 황성의 반환과 조나라령 피뢰를 내놓으라고 하자[4], 황성은 돌려줄수있지만 피뢰를 할양하는 것은 거부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마지막 화친의 기회마저 날리게 되었다.

2.2. 위와 조선의 사정

위나라가 서하에서 진나라와 대치하는 사이 제나라가 노나라 동부를 점령하고, 조나라가 뒤통수를 쳐서 황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위무후는 진헌공 영사습과 화친을 맻고 물러나게 된다. 위무후가 돌아왔을때 제나라는 이미 노나라를 멸하였고, 휘하였던 한나라가 더이상 위나라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 진나라와 동맹을 맻게 되어 서하에 다시 한번 전운이 짙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나라를 적으로 돌려서 힘의 낭비를 하기 싫었던 위무후는 상당히 관대하게 조나라에게 점령한 황성에 더해 사죄금으로 조나라령 피뢰를 내어주면 용서하겠다는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장은 점령한 황성 반환에는 동의하지만 피뢰 양도는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된 상황이에었기에 위무후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조나라를 태행산맥 기준으로 서부는 위나라가 동부는 조선이 갖는 분할안을 내놓으며, 협공을 제의한다.
조선은 같이 위를 공격한 전적도 있을 정도로 조나라와 가깝게 지냈었지만 명분도, 실리도 챙길 수 있는 이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위무후의 제안을 승낙하고 대장군 고거를 총사령관으로 1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령 동부로 진격했다.

3. 전쟁의 전개

3.1. 조선군의 쾌진격

조선군은 10만을 2개군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먼저 대장군 고거와 악조가 4만 8천을 이끌고 요 방면으로, 위장군 기황과 악자가 나머지 4만 2천을 이끌고 고로 향하였다. 먼저 고는 방심중이었기에 아무런 피해도 보지않고 점령에 성공하고 정보 차단에도 성공하였다. 요는 주둔중인 조나라군이 대비하고 있었지만 대장군 고거의 지휘에 조선군은 미미한 피해만 본채 조나라군을 전멸시키고 점령에 성공하였다.

고와 요 두지역을 점령한 조선군은 악자부대 1만8천을 별동대로 거록에 보내어 발을 묶고 남은 8만명으로 방자를 포위하여 압박하였다. 방자성주는 대군에 포위된것에 당황하는 사이 공성병기를 지휘하는 악조가 노포로 성벽을 공격하자 방자성주는 그대로 항복하였다. 이렇게 조나라 수도 한단과 거록을 제외한 동부지역은 모두 조선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3.2. 위군 태행산맥 서부 공격

조선이 동부를 휩쓰는 사이 위나라 또한 군을 2개로 나누어 조나라령 서부지역을 공격하였다. 1군은 위무후가 직접 지휘하여 수도 안읍에서 출발해 북상, 피뢰와 인, 진양을 공격하였고, 2군은 동부군 사령관 흔양과 대량대부 오기의 지휘하에 중모와 황성, 강평을 공격하고 점령에 성공시 그대로 동진하여 한단을 공격하는 조선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3.3. 조선군의 거록 점령

한편 별동대로서 거록방면의 조군을 맡은 악자는 처음 목적과 달리 거록을 수비중인 조나라군이 생각보다 약한것을 보자 그대로 군을 휘몰고 들어가 거록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사실상 없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조나라는 수도 한단을 제외한 지역들의 통제권을 잃게 되었다

3.4. 한단공방전

거록이 점령당하는 사이 대장군 고거가 지휘하는 조선 본대가 한단을 포위해 들어갔다. 준비한 공성병기를 설치하는 사이 고거의 지휘하에 조선군이 맹렬히 공격해들어가고 조군은 한단이라는 방벽의 뒤에 있음에도 상당한 피해를 보게되었다. 그러나 조장 역시 그냥은 당해줄수 없다듯 조선군의 공성병기를 파괴하기 위해 결사대를 보내었고 조선군은 이 공격을 저지하고 공성병기를 지켜내었지만 그와중에 본피해는 적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공성병기 배치가 완료되고, 무서운 기세로 성벽을 공격해 들어갔다. 전황은 점점 조군에게 불리해져 가고 저멀리 서쪽에서 위나라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걸어 항복하였다.

4. 결말

백기를 내건 조장은 조선에게 항복 조건으로 한단을 포함한 태행산맥 이동을 내놓을 테니 진양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서 포위를 풀고 조장을 보내주었다. 한편 위무후가 지휘하는 1군은 피뢰, 낭맹, 구유를 점령하였지만, 진양, 인, 둔류 등을 점령하지 못하였기에 그대로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숙좌와 오기등이 진양, 인, 둔류 3지역은 점령하기도 힘들고 설사 점령하더라도 피해가 크니 협상에 나설 것을 청하였기에 위무후는 마음을 돌려 협상에 들어갔다. 공숙좌가 직접 사신으로 와서 조장에게 진양을 포함한 인, 낭맹, 구유 4개지역을 존속하는 대가로 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위나라가 갖고 태자를 인질로 안읍으로 보내것을 요구하였고 조장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5. 전후처리

5.1. 조나라령 분배와 금낭묘계

한편 공숙좌는 조나라와의 협상후 그대로 한단으로 달려갔다. 조선군이 자신의 힘으로 직접 한단 점령에는 실패하였으니, 전쟁 이전에 약속했던 태행산맥 이동 조나라령 분배에 대하여 재협상을 요청했다. 공숙좌는 조선이 점령한 지역중 한단지역의 한단성은 조선이 가지되 그이외 지역들은 위나라가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의 대표는 대장군 고거였으나 이러한 외교적 사항은 잼병이었기에 어찌해야할지 당황하던 중 전쟁 전 조선후 기식이 고거에게 만일 위나라에 공숙좌가 올 경우 읽어보라고 준 비단주머니를 생각해내고 이를 꺼내들었다. 비단주머니 안에 기식의 지시사항이 적혀있었고, 자신이 문외한임을 뼈저리게 아는 고거는 그저 그 내용을 그대로 읊으니...
일수불퇴 낙장불입

공숙좌는 고거의 답변에 할말을 잃고 그대로 물러남으로서 당초의 계약대로 태행산맥 이동은 무사히 조선이 갖게 되었다.[5]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이 1년만에 속전속결로 끝난 것으로 위나라는 중견국 한 국가 정도는 순식간에 멸국 수준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고 건재함을 과시했고, 조선은 차후 중심지가 될 하북 지역을 얻어 강대국으로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또한 제나라도 이 시기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제민지배체제를 완비하여서 노나라령을 흡수하고, 최강국이 될 준비를 마치었다.
반면 조나라는 진양 일대의 영토만이 남아 사실상 위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속국이 되는 것만은 같은 삼진이라는 인식 덕에 피할 수 있었다.



[1]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2] 위나라 측은 땅을 요구했지만 돈으로 해결하려던 조장을 이해하고, 돈만 받아간 전적이 있었다.[3] 당시 제후 전섬이 성향상 상당히 이상주의적 외교를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4] 위무후의 성격상 이것도 적을 더 늘리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상당히 많이 봐준 것이였다.[5] 사실 위나라가 영토에 욕심을 부려서 조선과도 사이가 나빠지면 외교적으로 거의 완전히 고립될 위기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