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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18 15:51:10

조성진(기업인)

<colcolor=#ffffff> 전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조성진
趙成珍 | Jo Seong-jin
파일:LG_조성진.jpg
<colbgcolor=#6b6b6b> 출생 1956년 7월 10일 ([age(1956-07-10)]세)
충청남도 보령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직업 기업인
학력 용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과 / 졸업)
경력 금성사 전기설계실 입사 (1976.09)
LG전자 세탁기연구실장 연구위원 · 상무 (2001)
LG전자 세탁기사업부장 · 상무 (2005)
LG전자 세탁기사업부장 · 부사장 (2007)
LG전자 HA사업본부장 · 사장 (2013)
LG전자 H&A사업본부장 · 사장 (2014)
LG전자 H&A사업본부장 · 대표이사 사장 (2016)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2017 ~ 2019)
LG전자 부회장 (2019)

1. 개요2. 생애3. 직장생활에 대한 태도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전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대한민국 직장인의 고졸 신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956년 7월 10일,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태어나 1976년 용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이후 전자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금성사(LG전자)에 수습 과정으로 지원했고, 1976년 9월 26일 전기설계실에 우수 장학생으로 입사했다. 첫 월급은 11만 300원이었다.[1]

당시 가전 시장은 선풍기와 밥솥이 주력이어서 직원들이 앞다투어 그쪽 부서로 몰려갔다. 하지만 조성진은 세탁기 부서로 갔다. 우리나라 세탁기 보급률이 1%도 안 되던 시기였지만[2], 그는 세탁기가 사람을 대신해서 빨래를 하는 동안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 세탁기가 대중화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입사 후 하루 18시간 공부해서 남들 대학 4년 배울 걸 1년만에 배웠다고 자평할 정도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그런 원대한 꿈과 개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LG전자의 기술은 형편없었다.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만 제품을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10여년 동안 150번 넘게 일본 출장을 갔다.[3]

1985년 금성사 전기회전기설계실로 배치되었다. 1989년경 LG전자의 노사분규가 심해졌고 LG전자는 1등이었던 사업들을 놓치기 시작했다. 조성진은 '1등 탈환 TF'의 리더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그에게 제품개발과 의사결정권을 모두 넘겼다. 그러자 그는 고객 관점에서 전혀 다른 세탁기를 개발하겠다며 세탁용량, 기술방식, 디자인, 프로그램까지 모두 바꿨다. 그는 당시 인공지능 세탁기를 개발해 대박을 냈다.

1990년대 중반 조성진은 LG도 세탁기를 100% 국산화하자고 회사를 설득했다. 그 전에는 일본산 세탁기의 부품 조립만 수행했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투자비도 컸고, 다들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관두라고 해서 계속 갈등을 일으켰다. 조성진은 책상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 연구를 했고, 사표까지 고민했다. 경영진을 설득하겠다고 일주일 간 무단결근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설득에 성공하면서 1995년 LG전자 세탁기설계실(부장)으로 발령난 뒤 1996년 '통돌이' 세탁기를 탄생시켰다. 창원공장 2층에 간이 침대와 주방시설을 만들고 먹고 자면서 일을 해 밑바닥부터 일본 기술을 배웠다. 오사카에는 전자업체들이 주로 몰려 있는데 기술자들에게 술을 사주며 귀동냥을 했다. 그의 일본어를 들은 일본인들이 오사카 출신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다.

1998년에는 Direct Drive 모터를 적용한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내놓았다. DD모터는 모터의 힘을 세탁통에 직접 전달시켜 제품의 고장을 줄이고 세탁 때 나오는 소음이나 진동은 확 줄여주는 기술이다. 2001년에는 세탁기연구실장으로 발령받으면서 임원(연구위원/상무)으로 승진하여 중남미 출장을 다니곤 했다.

당시 그가 출장을 나가면 여행가방에 넣은 옷이 잘 구겨져 애를 먹었다. 이 때 아내가 '욕실에 뜨거운 물을 틀어 수증기로 채운 다음 옷을 걸어두면 주름제거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그 말에서 의류관리기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제품 개발을 제안했다. 이에 LG전자는 2011년 의류관리기 '스타일러'를 출시했다. 그러나, 이는 그냥 기업에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의류 관리기는 LG에서 개발하기 전부터 이미 해외에 존재하던 것이고 국내 최초의 의류 관리기도 파세코에서 개발한 것이다. LG에서 세계 최초 운운하는 것은 허위 광고에 가깝다.

2005년, 세계 최초 스팀세탁기를 개발했다. 2006년에는 부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연말에는 세탁기사업부장(부사장)으로 승진했다. LG전자에서 고졸 부사장은 처음이었다. 2009년에는 손빨래 구현 6모션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2012년에는 터보 워시 적용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때까지 그는 36년간 세탁기만 했다. 이 때문에 고졸임에도 불구하고 '세탁기 박사', 'Mr. 세탁기'라고 불렸다. 36년간 세탁기만 판 세탁기 전문가였기 때문에 당시 부하 팀장들이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보고는 쉽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12년 말, HA사업본부장(사장)으로 발령나면서 세탁기를 넘어서 모든 가전을 맡게 되었다. 2015년에는 '트윈워시'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만들면서 다시 대박을 쳤다. 상단 드럼세탁기와 하단 미니 워시를 결합한 제품인데 8년동안 연구원 150명과 예산 200억원이 들어간 제품이다. 2016년에는 H&A사업본부장 대표이사를 맡게 되었고 2017년에는 마침내 LG전자 대표이사 CEO(부회장)로 취임하였다. 재임 중 의류건조기, 스타일러 등 신가전 바람을 이끌어 LG전자 가전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LG전자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MC사업본부는 2017년, 2018년 7000억대의 적자, 2019년에는 1조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몰락하여 퇴임 후인 2021년 사업부가 정리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19년 11월 28일, LG그룹의 인사 이동(규모는 41명으로 알려져 있다)에 따라 권봉석 LG전자 사장[4]을 CEO로 추천하고 입사한 지 약 43년 만에 용퇴(은퇴)를 하게 되었다.

3. 직장생활에 대한 태도

그는 자사 시제품을 여러 대 집에 가져다 놓았다. 틈날 때마다 고객 관점에서 직접 사용해보고 바로 개선하기 위해서다. 세탁기, 냉장고 등을 여러 대 가져다 놓았다. 어느 날 아내가 '무선청소기 7대는 너무 심하니 그만 가져오라'고 했더라고 한다. 사장이 된 후 2016년 4월에는 집무실 카펫을 걷어내고 마룻바닥으로 고쳤다. 물걸레 키트에 보조걸레를 달아 바닥의 찌든 때를 닦아내는 아이디어를 제품에 구현해 보겠다는 아이디어를 실험하기 위해서였고, 실제 제품에 반영되었다.

CEO가 된 뒤 LG전자의 모든 사업부를 맡게 되자 스마트폰을 30여대 갖고 와 10여대 분해하면서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LG는 프리미엄 스마트폰과 보급형 스마트폰마다 내부 부품과 제품이 일일이 달라 대량 주문이 어려워 규모의 경제로 원가를 절감할 수 없다는 문제를 발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삼성전자, 애플 등 단일 품목으로 수천만대씩 판매하는 경쟁사와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LG전자의 세탁기는 인버터, 모터의 성능이 좋아 설계비가 많이 들어갔는데, 상위모델과 하위모델이 동일한 인버터, 모터를 써서 전체 물량을 키워 가격경쟁력을 갖게된 사례처럼, 같은 부품이라면 좋은 부품을 가지고 위에서 밑으로 내리면서 주문량을 키워 원가, 재료비 뿐 아니라 총 원가까지 떨어뜨리는 작업을 해야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으로도 스마트폰 사업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양복보다는 작업복이 더 어울린다고 말할 만큼 제품 생각으로 가득했고 아이디어를 메모하기 위해 항상 작은 수첩과 샤프를 들고 다녔다. 등에 메고 다니면서 청소하는 전기청소기의 아이디어도 그의 작품.

한편, 그는 2014년 독일 베를린에서 경쟁사인 삼성전자 세탁기를 파손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전시회에 갔다가 삼성 홍보를 보고 '눌러도 문이 부서지지 않는다니 그 원리가 궁금하다'면서 문을 세게 눌렀더니 파손(...)되었던 것이다. 2016년 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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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80만원 가량. 참고로 1978년경 전문대졸 대우중공업 기능공의 월급은 7만원(2010년대의 50만원)이었다. 이런 식. 그러니 금성사의 월급 11만 300원이 적은 돈은 아니었다.[2] 금성사가 세탁기를 처음으로 출시했던 게 1969년이었다.[3] 2006년 당시 일본 출장 마일리지가 30만 마일이 쌓였다. 인천-오사카 마일리지가 525마일이다. 30년간 600번 가야 채울 수 있는 양이다.[4] TV 사업을 담당하는 HE사업본부장과 스마트폰 사업을 총괄하는 MC사업본부장을 겸임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