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드 체버스턴 John de Cheverston | |
생몰년도 | 미상 ~ 1375년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체버스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체버스턴 | |
아버지 | 윌리엄 드 체버스턴 | |
어머니 | 피파르의 마틸다 | |
아내 | 잔 드 쿠르트네 | |
직위 | 가스코뉴 세네샬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상대했다.2. 생애
체버스턴의 영주 윌리엄 드 체버스턴과 노르망디의 마네빌라피파르 출신인 피파르의 마틸다의 아들이다. 1347년 잉글랜드군에게 공략된 칼레의 수비대장을 맡았고, 1350~1351년, 1354년, 1362년에 가스코뉴 세네샬(Senechal: 지방관)을 역임했다.1351년 2월, 멜로 영주 기 2세 드 네슬과 부관 아르누울 도드레헴이 이끄는 수천 명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수비대 6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생당젤리 요새를 포위하고 요새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했다.(생장당젤리 공방전) 수비대는 몇 달간 결연히 버텼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와 함께 생장당젤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적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비대에 물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 2세 드 네슬은 일부 병력를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러 출진했다.
1351년 4월 1일, 기 2세 드 네슬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생트 마을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잉글랜드군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가서 전투 대열을 형성하고 말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네슬은 양 측면의 소규모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고지를 에워싸서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인근의 타이르부르와 토네-샤랑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수백 명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600명 가량의 프랑스 기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기 2세 드 네슬과 아르누울 도드레헴 역시 사로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존 드 체버스턴은 생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생장당젤리 요새로 접근했지만 포위망을 뚫지는 못하고 보급품을 수비대에 전달해 준 후 철수했다. 한편 장 2세는 지휘관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히 추가 병력을 이끌고 포위군과 합세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구원이 더이상 오지 않자, 생당장젤리 수비대와 주민들은 1351년 8월 장 2세에게 항복했다.
제10대 데본 백작 위그 드 쿠르트네의 딸 잔과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고, 1375년경에 사망한 뒤 잔의 동생인 필리프가 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