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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3:52

존 홀랜드(초대 엑서터 공작)

<colbgcolor=#8FBC8F><colcolor=#000000>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John Holland, 1st Duke of Exeter
이름 존 홀랜드(John Holland)
출생 1352년대
잉글랜드 왕국 헌딩턴
사망 1400년 1월 16일 (향년 40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플레쉬
배우자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2] (1386년 결혼)
자녀 콘스탄스, 리처드, 에드워드, 앨리스,
아버지 토머스 홀랜드
어머니 켄트의 조앤
형제 토머스, 에드먼드, 조앤, 모드
직위 헌딩턴 백작, 엑서터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아내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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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이자 장군.

리처드 2세의 이부형으로[3] 젊은 시절 스태퍼드 백작의 상속인과 다툰 끝에 살해해 모든 재산을 잃고 추방되었다가 리처드 2세의 용서를 받고 귀환한 뒤 리처드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해 중용받았다. 그러나 리처드가 폐위되고 헨리 4세가 등극한 후 권력을 잃자 헨리 4세를 모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2. 생애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출처에는 1352년, 1355년, 심지어 1358년 이후의 날짜가 기재되었다. 학자들은 대체로 1350년대에 출생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초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켄트의 조앤의 막내 아들이었다. 형제로 토머스, 에드먼드[4], 조앤[5], 모드[6]가 있었다. 1360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1361년 어머니가 흑태자 에드워드와 재혼한 후 가족과 함께 가스코뉴로 이주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존이 그의 형 토머스와 함께 어린 나이에 전투 기술과 기사 토너먼트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1370년대 초에 조앤과 에드워드는 자녀들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이주했다. 1376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사했고, 137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뒤 존의 이부동생인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형 토머스는 리처드 2세를 보좌하는 섭정 위원회에 합류했지만, 존은 1381년 이전까지 이렇다할 언급이 없었다. 1381년 5월 6일 체스터 재판관을 역임랬다. 그해 6월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다. 반란군이 런던에 접근했을 때, 존은 왕 형 토머스, 어머니 조앤과 함께 런던 탑으로 피신했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그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82년 1월 리처드 2세와 보헤미아의 안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을 때, 존은 신부의 에스코트 역할을 했다.

1384년 4월, 카르멜 수도사 존 라티머는 왕의 숙부인 곤트의 존이 왕을 암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곤트의 존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입증했고, 존 홀랜드를 비롯한 기사 그룹이 존 라티머를 때려죽였다. 라티머가 이에 관련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왕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 중 한 명인 9대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가 조작된 혐의를 라티머에게 알려주고 고발하게 유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385년, 리처드 2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함께 했다. 그러던 중 군대가 요크와 비숍스톤 사이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제2대 스태포드 백작 휴 드 스태퍼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랄프 드 스태퍼드가 모종의 일로 존과 다투던 중에 존의 궁수 한 명을 죽였다. 이후 랄프가 존에게 가서 사과하려 했을 때, 존이 검을 빼들어 랄프에게 칼을 꽂아 죽였다. 후계자를 허망하게 잃어버린 휴 드 스태퍼드는 리처드 2세에게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요구했고, 리처드 2세는 존을 일반 범죄자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리처드 2세와 존의 어머니인 조앤이 리처드 2세에게 이부 형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리처드 2세는 거부했다. 이에 절망한 그녀는 8월 8일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했다. 그해 9월 14일, 리처드 2세는 존의 모든 재산을 압류했고, 존은 베벌리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386년 2월, 리처드 2세는 존을 사면하기로 하고 모든 재산을 반환했다. 이후 존은 스태퍼드 백작에게 가서 사과해 용서를 받았다. 그해 여름, 존은 곤트의 존의 딸인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7], 카스티야 왕위를 노리는 장인과 함께 이베리아 원정을 떠났다. 그는 원정 기간 동안 잉글랜드군 장군으로 복무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존이 카스티야 원정 동안 용감하고 재능 있는 전사임을 보여주었다고 서술했다. 1387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은 그해 6월 2일 헌딩턴 백작이라는 칭호를 얻고 상당한 토지를 보유했다.

1389년 잉글랜드 최고 시종관이 되었고, 서부 제독, 팅타겔 성 및 브레스트의 보안관이 되었으며, 9월 13일에는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390년 칼레에서 열린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으며, 1392년 리처드 2세의 북부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곤트의 존이 이끄는 프랑스 주재 사절단에 참여했다. 1394년 콘위 성주로 선임되었으며,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러다 파리에 이르렀을 때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에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계획을 바꿔 리처드 2세와 함께 은둔자 베드로 수도원을 순례하기 위해 엘트햄을 방문했다. 같은 해에 칼라일 성주이사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사령관이 되었다.

1397년,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자신을 위협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들을 대거 숙청했던 청원파 일원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먼저 워릭 백작을 별장으로 유인해 체포한 뒤 아룬델 백작 역시 병사를 보내 체포했다. 이후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 마저 체포하기 위해 존 홀랜드와 존 홀랜드의 조카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등이 포함된 수행원들을 모은 뒤 밤에 글로스터 공작이 있던 에식스의 플래쉬 성에 들이닥쳐서 글로스터 공작을 체포했다.

1397년 9월 17일, 세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 그는 조카 토머스 홀랜드, 러틀랜드 백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서버셋 백작 존 보퍼트 등 7명의 영주와 함께 세 수감자들을 고발했다. 재판 결과, 아룬델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즉시 집행되었고, 워릭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가 영구 추방형으로 변경했으며, 글로스터 공작은 칼레에 연금되던 중 피살되었다. 세 죄수의 모든 영지와 재산은 압류된 뒤 왕의 동료들에게 분배되었다. 존은 1397년 9월 29일에 엑서터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아룬델 성을 부여받았다.

1399년, 존은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지난날 리처드 2세에게 추방되었고 1399년 2월에 사망한 아버지 곤트의 존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한도 박탈당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비밀리에 상륙한 뒤 대귀족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는 급보를 접하자 남은 군대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1399년 7월 27일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증원군을 모으는 데 실패했고, 8월에 콘위 성에 이르렀을 때 자기가 가려고 했던 체스터가 8월 11일에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넘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지지자 다수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넘어갔고, 군대는 흩어졌다. 하지만 존은 조카 토머스와 함께 리처드 2세를 떠나지 않고 콘위 성에 함께 남아 있었다.

얼마 후, 리처드 2세는 존을 포함한 소규모 수행원과 함께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협상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기습을 당해 생포되었고, 플린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중에 리처드 2세에게 왕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9월 30일에 헨리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에 등극했다. 리처드 2세는 폰테프랙트 성에 수감되었고, 존과 토머스는 런던 탑에 갇혔다. 1399년 10월 29일, 존은 의회에 출석해 왕의 폭정을 도운 혐의에 대해 답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왕의 뜻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며 용서를 구했다. 11월 6일, 엑서터 공작위가 박탈되었고, 리처드 2세에게 받은 모든 상도 몰수되었지만, 나머지 재산은 건진 채 풀려났다.

1400년 1월 초, 존은 여러 동료를 규합한 뒤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살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월 6일 음모가 들통나자, 급히 동료들과 함께 도주했다가 플레쉬 성에서 체포된 뒤 1월 16일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의 명령으로 피살되었다. 그의 수급은 플래쉬 성에 전시되었지만, 나중에 미망인의 요청으로 플레쉬에 있는 성당에 시신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의 모든 재산과 작위는 몰수되었지만, 1416년 그의 아들 존 홀랜드에게 돌아갔다.

여담으로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추문이 있었다. 이사벨의 막내 아들인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존 홀랜드와의 사생아라는 소문까지 돌았는데, 문제는 이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바로 에드워드 4세리처드 3세의 할아버지라는 것.[8] 실제로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는 바로 손윗누나인 콘스탄스보다 11살이나 어렸으며 아버지와 형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존의 사생아라면 리처드 3세의 부계 혈통 논란도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에드먼드의 자식이 아니기에 발생한 것이다.

3. 가족

3.1. 아내

파일:Elizabeth of Lancaster.jpg
<colbgcolor=#8FBC8F><colcolor=#000000>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Lancaster)

아내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1363년~ 1426년 11월 24일)는 곤트의 존과 랭커스터의 블랜치[9]의 차녀로 에드워드 3세의 친손녀다.

17살 때 8살인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결혼했지만 23살 때 존 홀랜드의 아이를 임신한 게 밝혀지면서 결혼이 취소되었고 이후 존 홀랜드와 결혼했다. 존 홀랜드 사후 펜호프 남작 존 콘월과 재혼했다.

3.2. 자녀



[1] 왼쪽 인물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이고, 오른쪽 인물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이다.[2]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차녀로 헨리 4세의 친누나이자 에드워드 3세의 친손녀.[3] 켄트의 조앤이 첫번째 남편 토머스 홀랜드에게서 낳은 아들이 존이고 세번째 남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서 낳은 아들이 리처드 2세다.[4] 1351 ~ 1352, 요절[5] 1356 ~ 1384,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부인[6] 1359 ~ 1392, 기사 휴고 드 코트니와 초혼, 리니 백작과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재혼[7] 이부동생 리처드 2세의 친사촌이기도 하다.[8]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장남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들들이다.[9] 초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