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2차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쪽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베를링은 모스크바로 압송당했다. 소련은 독소전 개전 이전인 40년 여름에 친소 폴란드군 창설을 위한 밑작업으로 소련에 협력적인 폴란드인 장교 13명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실시했고 베를링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독소전 개전 후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련이 악감정을 누르고 군사동맹을 채결하면서 42년부터 폴란드인 포로로 구성된 폴란드군 제 5, 6사단의 창설이 시작된다. 베를링은 이 중 제 5 사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소련군을 무장시킬 무장도 부족했던 소련의 사정으로 폴란드 사단의 재무장이 지지부진해지자 안데르스 장군은 영미의 지원을 받기 위해 부대를 이란으로 이동시킨다. 이 때 베를링을 비롯한 친소 장교진 일부는 부대에서 이탈하여 소련에 잔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소련은 아예 런던 망명 정부에 대적할 폴란드 정치 조직과 그 휘하 군대의 창설을 시작한다. 1943년 7월 15일 베를링 준장은 폴란드 제1사단 '타데우시 코시치우스코'의 사단장으로 임명된다. 서방 자유폴란드군의 뒤를 이어 5, 6의 단대호를 받은 기존 사단들과 달리 이 1사단의 창설은 런던 망명 정부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했다. 폴란드 제1사단은 43년 9월 1일 전선으로 이동 후 10월 초 노농적군 제33군 휘하에서 레니노 전투에서 첫 실전을 치르게 된다. 레니노 전투에서 25%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은 제1사단의 재편성과 동시에 폴란드 인민군이 군단 규모로 성장하면서 베를링은 중장으로 승진하여 폴란드 군단장을 맡게 된다.
1944년 7월에는 폴란드 인민군이 정식 육군으로 출범하였고, 폴란드 제1군 창설과 동시에 베를링이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군이 독일군을 연이어 몰아붙이자 1944년 8월 1일 그 유명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공세종말점에 달해 폴란드 국내군에 협조할 능력도 의사도 없던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멈추게 된다. 이 상황에서 베를링이 지휘하는 폴란드 제1군은 수도의 완전 파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9월 11일 바르샤바로 독자적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들은 바르샤바 동쪽 프라가 지구까지 진출함과 동시에 9월 16일 비스와 강을 건너 봉기군과 접선에 성공하는 업적을 달성하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지친 소련군을 역습할 준비를 하던 독일군은 바르샤바에 동원 가능한 기갑 전력을 집결시키는 중이었고 독일 제 19 기갑사단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격을 가해 폴란드 인민군에게 1,050여 명의 뼈아픈 사상자 및 포로 손실을 안겼다. 9월 23일까지 폴란드 인민군은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사령관이었던 베를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폴란드 제1군 사령관직에서 해임 되었고 모스크바의 전쟁학교에 보직 배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