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지묘인(持明院)은 일본 교토부에 위치한 절이자 지금의 일본 황실의 정신적 장소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헤이안쿄 북쪽에 존재했던 저택 및 그 저택에 있었던 사찰로 현재의 교토시 가미교구 안라쿠코오지마치의 코쇼인 부근에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는 선동어소나 사토우치우라가 되어서 지묘인의 유래가 된다. 저택을 가진 지묘인전과 또 사찰을 안락광원 안락행원이라고도 한다.2. 역사
12세기 초 진수부장군을 지낸 후지와라노 모토요리는 저택 안에 지불당을 건립해 지묘인이라 이름 지었다. 따라서 저택은 지묘인도노(持明院殿)라고 불렸고, 모토요리의 후손 역시 지묘인 가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토요리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미치모토는 지묘인을 확충하고, 절호를 안락행원으로 고쳐 지묘인을 집안의 호로 했다.가마쿠라 시대, 지묘인 진시(持明院陳子)를 비로 삼은 모리사다 친왕은 처가의 저택인 지묘인도노에서 거주했다. 모리사다 친왕과 지묘인 진시는 시게히토 친왕을 아들로 두었다. 조큐의 난 후 시게히토 친왕이 고호리카와 덴노로 즉위하자 부친 모리사다 친왕은 태상천황의 존호를 얻어 고타카쿠라인을 원호로써 원정을 행하였으며, 지묘인궁이라 하였다. 이후, 고호리카와 덴노는 두 살 짜리 아들 시조 덴노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고 나서 지묘인도노를 선동어소로 삼아 거주하였다.
시조 덴노가 즉위 9년 만에 붕어하면서 모리사다 친왕 계통이 단절되었고, 시조 덴노의 6촌인 고사가 덴노가 즉위하였다. 고사가 덴노·고후카쿠사 덴노 부자는 고호리카와인의 전례를 따라 지묘인도노를 선동어소로 삼았다. 그래서 고후카쿠사 덴노의 계통을 지묘인통이라고 한다. 다만, 모리사다 친왕 계통의 단절후에는 고호리카와 덴노의 황녀였던 키시 내친왕이 지묘인도노를 어소로 하였다.
고코곤 덴노의 1353년(분화 2년, 정평 8년) 2월의 화재로 소실되자 안락광원 일당을 남겨두고 저택 부분은 이후 황폐해졌다.
안락광원은 광의문원의 명에 의해 재흥됐고, 무로마치 시대에도 지묘인통 관련 불사 등이 행해져 에도 시대에는 센뉴지 탑두로 여겨졌다. 오닌의 난 후에 후시미 덴노의 황녀 엔메이몬인의 코쇼인이 이전했다고도 전해져 이전 후의 한 시기는 코쇼인도 안락광원을 자칭하고 있다.
또 지묘인에 남은 안락광원을 현 교토시 후시미구에 옮겨서 심초법화당으로 삼았다는 전승도 있다. 고후카쿠사 화당에는 고후카쿠사 덴노 이하 12명의 능묘가 있으며, 17세기 후반 안락행원으로 재흥하여 폐불훼석까지 잔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