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차인재(車仁載) |
이명 | 임인재(林仁載, 林仁在) |
영문식 이름 | Cha In-Chai |
일문식 이름 | 우로다(ウローダ) |
생몰 | 1895년 4월 26일 ~ 1971년 4월 7일 |
출생지 |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 (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
사망지 | 미국 로스앤젤레스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차인재는 1895년 4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군에서 삼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0년 6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 등이 구국민단(救國民團)을 조직하자 참여하여 동지를 규합했다. 이후 1920년 7월 말 미국으로 이주했고, 8월에 임치호(林致昊)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임인재(林仁載)로 개명했다.1921년 3월 맥스웰에서 한국인 아동들의 국어 교육을 위해 교실을 만들었으며,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로 선정되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으로 선정되었다. 1934년 8월에는 흥사단에 입단했고, 193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재정모금 수전위원이 되어 학교 유지에 많은 공헌을 했고,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활동했다.
1936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재무와 로스앤젤레스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고, 그해 7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서기로 선정되었으며, 1937년에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선임되어 1942년까지 7년간 활동했다. 1939년 6월에는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과 총무로 선임되었고, 1941년 로스앤제렐스 지방회 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2년간 활동했다. 1942년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 겸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4년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주최한 임시회의에 애국단 대표로 참석했다. 그해 4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선전과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6차 회의에 참석하여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1944년 10월과 11일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를 개최하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했다. 1945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총무, 연합위원회 군자금 모집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1945년 이후 국민회를 은퇴한 뒤 말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다가 1971년 4월 7일에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