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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기 시대(鐵器時代, iron age)란 고고학에서 선사 시대 및 역사 시대를 분류하는 관습적 구분이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 이후를 일컬으며 철기 시대의 이후는 고대로 분류한다.2. 정의
예외가 많은지라, 정확한 정의가 있는건 아니고 그냥 고고학계의 '관습적'인 구분이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 이후'로 여겨지나 사실 청동기를 쓰지 않고 그냥 바로 철을 사용한 문명도 엄청나게 많다. 사실 그런 문명이 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의 경우 말이 청동기 시대지 청동 유물이 한반도에서는 수백개도 안 나온다. 반대로 중국의 경우 문명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통일 진나라, 한나라 시대에도 무기의 주류는 청동이었다.이런 '금속도구에 따른 구분'은 1830년대 덴마크의 고고학자 크리스티안 유르겐슨 톰센이 주장한 것인데, 당시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지금처럼 과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보니 무슨 근거나 유물적 정황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헤시오도스가 말한 신화 인간의 다섯 시대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유럽의 고고학의 주류는 아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동 고고학이었는데,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중동사에서는 인류사의 발전을 이야기하는데 매우 유용한 구분법이라고 인정되어 관습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고고학적 관습이 자리잡은 결과,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실제로는 청동기 사용이나 철기 사용 경향과는 무관하게 고대사의 시대를 구분할 때 사용되게 되었다. 그로 인한 대표적인 결과가, 위에서도 말한 한국사의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
일반적으로 선사시대를 구분하는 시대로, 국가가 출현하고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는 시대부터는 고대로 구분하나, 이것도 실제로는 각 지역의 고고학적 관습에 의존하기 때문에 버젓히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시대까지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어 중동사의 경우 아케메네스 제국의 성립을 철기 시대의 끝으로 본다. 서유럽은 고대 로마의 정복을 기점으로 역사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로마에 정복된 시점을 철기 시대의 끝으로 보며, 북유럽은 바이킹 시대를 기점으로 철기 시대를 끝으로 본다. 반면 중국사의 경우 철기가 사용되기 한참 전부터 중국 고유의 '왕조별 시대 구분법'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네 철기 시대네 하는 구분법에 연연하지 않는다.
3. 세계사
사실 이미 청동기 시대에도 인류는 철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이때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철 기술이 없어 운석에서 나온 운철을 가공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량생산도 불가능해서 자주 쓰이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Steel 이라는 명칭은 원래 운철(隕鐵 meteoric iron, star metal)을 말하는 고어에서 나온 말.운철은 철성분의 운석(철질 운석)을 말한다. 철제련법이나 강철제강법이 발명되기 전에는 이런 운철이 질좋은 강철을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출처로 철제 검 등에 쓰였고 제철 기술이 나온 후에도 고급 철기 재료로 쓰였다. 초기 제철 기술로는 탄소가 적은 강철을 만들 수가 없었는데 운철은 불순물이나 탄소가 적어 강철에 가까워 강도가 높고 또 니켈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녹이 잘 슬지 않아 고급 철기로 황제나 왕의 검을 운철로 만들기도 했다. 3000년 전의 투타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철제 칼이 일반 철이 아닌 운철을 녹여 만든 것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17세기 인도 무굴제국 황제의 검도 운철로 만든 운철 검.
보통 인터넷에서 철기 시대라고 하면 이런 것까지 생각해서 기간을 잡는 경우가 많은데, 위에도 말했듯 철기 시대라는 것은 철을 사용한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냥 고고학계의 관습적인 구분이다. 실제로 철을 사용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면 사실 지금도 철기 시대로 보는 것이 맞을 정도로 시대적 구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류 최초의 철기가 히타이트나 바다 민족에서 시작했다고 보았고 실제로 히타이트는 이른 시기부터 철기를 사용한 문명인 건 맞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철기라는 신기술을 최초로 익혀서 이걸로 주변 문명을 압도하고 강대국이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지금은 온갖 반박을 당하고 있는 학설이다. 히타이트의 제철 방식은 청동기 시대의 운철 제련 수준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연구이며, 그나마도 풀무가 없어서 특정 시기에 수도 하투샤 근처에서 부는 자연풍을 활용한다는 대단히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만들 수 있었고, 그 철기를 가지고도 아직 청동기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과 카데시 전투에서 맞붙었지만 압도까지 하진 못했다.[1] 바다 민족 역시 그들의 정체나 영향력에 대해서 최근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최근의 학설은 어느 날 드라마틱한 사건에 의해 청동기가 폭삭 망하고 철기가 갑작스럽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근동에서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전쟁이나 기후 변화,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의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며, 철기 시대의 등장은 주조틀의 보급과 제련 기술의 성장, 그리고 무역의 발달로 각각의 문명권에서 기존부터 존재하던 철기가 서서히 발전했다고 보는 추세다. 플라스틱이 등장했다고 해서 철제 도구들과 철강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게 아닌 것처럼 청동기와 철기도 상당기간 공존했다는 것이다.
인터넷 수준 썰에서는 철과 청동의 성능 차이 같은 것을 이유로 들며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한 것처럼 말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고고학적 관습에 따른 구분이고 철기와 청동기는 상당 기간 공존했기 때문에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다. 기원전 5세기에도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갑주는 여전히 청동 재질이었고, 동시기 아테네조차도 황동제 투구를 썼다. 그러나 청동의 원재료인 구리는 의외로 산지와 산출량이 적었기 때문에 철광석 제련 기술이 발달하자 물성이 떨어지지만 광석이 훨씬 흔한 철이 상대적으로 값싸게 대량으로 보급되어서 양적으로 청동을 압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1세기에 들면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어쨌든 중동에서 나타난 최초의 철기는 점차 주변국으로 확산되는데,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기원전 10세기, 이집트는 기원전 7세기, 유럽은 이보다 늦은 기원전 5세기경에 본격적인 철기 시대가 시작하였다.
동양에서는 중국(中國) 상나라의 유물로 날 부분을 철로 쓴 청동 도끼가 가장 오래된 예가 되는데, 철기가 나타나는 것은 BC 600년경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고,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진(秦), 한(漢)대에 이르러서이다.[2]
4. 한국사
위에서도 말했지만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구분은 고고학의 관습적 구분이라 실제 사용 여부와는 다른데, 한반도의 철기 시대 구분도 그렇다. 교과서에서도 배우겠지만 한반도의 철기 시대의 대표 유물은 세형 동검이다. 교과서 과정으로 배우는 국사 시험에서는 대표 함정성 문제로 나온다.더 엄밀히 말하면 세형 동검은 초기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데, 세형 동검이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철기 사용이 시작된 시대(기원후 1~2세기)부터는 역사 기록도 있고 해서 원삼국시대로 구분하는지라 그냥 철기 시대로 구분해서 부르는 시대의 대표 유물은 세형 동검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기원전 4세기에 연나라의 침공으로 요동 지역에서 밀려나 한반도 북부로 중심지가 이동한 것을 한국사 철기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이로 인해 요동 고조선에서 쓰이던 토기인 덧띠토기(점토대토기)가 한반도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동검 역시 이전의 비파형 동검이 세형 동검으로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시대 구분으로써 철기 말고 진짜 철기 사용 자체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것이 통설로 위만조선이 성립하며 연나라 지역의 주조 철기 기술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무제의 침공으로 낙랑군이 설치되어 낙랑군 지역 역시 중국의 제철기술과 같은 주조 철기 기술이 사용된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를 무렵하여 점차 중국의 주조 위주 철기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단조 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설에서는 이런 중국과는 다른 한반도의 단조 철기 기술을 북방 초원 지역을 통해 유입된 신기술로 보기도 한다.
이후 기원 전후를 무렵하면 한반도 전역에서 대규모의 철 생산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특히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가야는 중국이나 일본 등지로 철을 수출하기도 했다. 이런 철 수출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에서 철기 문화를 일으키는데, 고대 일본의 철검과 한국의 철검의 동위 원소 비율이 같음이 둘 다 같은 공법으로 제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잘 안 다루는 비교적 최신 이론으로는, 이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변화 과정 속에서 한반도의 사회도 크게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까지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있던 반도 일본어족이 요동에서 남하한 고조선계 민족들에게 밀려나 일본 열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사 교과서 수준에서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에 쓰인 유물이나 유적들이 철기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서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덧띠토기의 경우 청동기 시절부터 요동 지역에 존재하고, 동시대 민무늬 토기가 한반도에 존재하다가, 기원전 4세기 경부터 덧띠토기가 우르르 한반도로 내려오고 요동에서는 사라진다. 반면 민무늬토기는 비슷한 시기에 우르르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심지어 덧띠토기를 주로 쓰는 읍락 유적과 민무늬토기를 주로 쓰는 읍락 유적은 서로 특징도 다르다. 덧띠토기를 쓰는 유적은 주로 산에 있고 농경의 흔적이 매우 적은데, 민무늬토기를 주로 쓰는 유적은 강가에서 농경을 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옥저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함경도~연해주 지역의 경우, 얀콥스키 문화의 무렵 기원전 9~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서북한 지역에 비해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해주 북쪽 지역의 숙신-물길-읍루로 비정되는 아무르 지역의 경우 기원전 12~10세기 무렵 우릴 문화의 유적인 부킨스키 클루치-1유적에서 철슬래그가 발굴되어, 제철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3]연해주 지역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숙신-읍루-물길로 비정되는 아무르 지역의 경우, 러시아 학계에서는 구리의 매장이 거의 없고 소택지와 같은 풍부한 철광석이 존재한다는 환경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제철 기술이 매우 빠른 시기에 널리 사용됐다고 보았다.[4] 연해주 지역의 경우도 아무르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카호를 비롯한 주변 소택지에서 사철을 채광한 것으로 여겨진다.
[1] 결과 자체는 히타이트가 승리 혹은 우세였지만 히타이트도 이집트를 박살낼 만한 여력은 없었고 이집트 또한 나중에는 힘을 회복하게 되므로 결국 평화조약을 맺고 더이상 두 나라가 다투는 일은 사라지게 된다.[2] (고고학 사전, 2001. 12., 국립 문화재 연구소).[3] (동아시아 고대 철기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4]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200. 02. 05, 최몽룡 이현종 강인욱, 도서출판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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