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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07:24:19

츠츠이 준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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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97px-Tsutsui_Junkei.jpg

筒井順慶
1549년 3월 31일 ~ 1584년 9월 15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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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고쿠 시대다이묘로 츠츠이 성 성주. 아명은 후지카츠(藤勝)며 후에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 사적에 대해서는 타몬인닛키(多聞院日記)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위상에 비해서는 2개나 되는 관용구의 유래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들조차 명언 하나 남기면 다행인 것을 상기해보자.

2. 생애

아버지인 츠츠이 준쇼와 어머니인 오오카타도노의 아들로 1550년에 2살의 나이로 가독을 물려받자 숙부인 츠츠이 준세이의 보좌를 받았는데, 가신들의 충성을 모으고 적을 속이기 위해 준케이가 장성할 때까지(기록에 따라 1년 혹은 3년) 준쇼와 얼굴과 목소리가 비슷한 '모쿠아미(木阿弥)'라는 승려를 카게무샤로 세웠다가 준케이가 정식으로 다이묘가 되면서 다시 승려가 되어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때 생긴 말이 '도로아미타불'을 의미하는 '도로 모쿠아미(元の木阿弥)'.

1564년에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공격으로 일어난 츠츠이 전투로 야마토에서 쫓겨났으며, 후세 사쿄노신이 있는 후세성으로 도망쳐서 그의 휘하로 있다가 다카다 가문의 다카다 성을 공격했다.

1566년에 히사히데를 공격하여 미요시 3인중과 결탁하면서 4월 11일부터 21일에 걸쳐 소규모 전투를 통해 고립하게 만들어 미노쇼 성을 항복시켰으며, 히사히데가 카와치로 향하면서 동맹인 하타케야마 가문, 유사 가문과 함께 사카이에서 미요시 요시츠구와 싸우자 그 틈을 이용해 츠츠이 성 주변에 히사히데의 진영을 모두 불태우면서 6월 8일에 츠츠이 성을 탈환했다.

츠츠이 성을 탈환하자 미요시 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었던 히사히데가 요청한 화친을 수락했으며, 이후 득도하여 준케이라 자칭했다. 1567년에 미요시 3인중과 함께 히사히데와 싸웠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후견을 받은 히사히데가 츠츠이 성을 압박하자 할 수 없이 후쿠즈미 토시히로가 있는 후쿠즈미 성으로 도망쳐 그의 휘하에서 지냈으며, 1570년에 토오치 토오카츠의 죽음으로 내분이 일어난 토오치 성을 함락시키면서 히사히데의 성인 쿠보노쇼 성을 탈환했다.

또한 츠바오카미 성을 축성하는 등 히사히데와 싸울 준비를 했으며, 1571년에 이도 요시히로를 시켜 타츠이치 성을 건축하여 7월 3일에 완성하면서 타츠이치 성 근처에서 8월 4일에 히사히데, 미요시 히사미치, 요시츠구 부자가 이끄는 연합군을 격파하여 히사히데가 츠츠이 성을 버리면서 츠츠이 성을 탈환했다.

1573년에는 아케치 미츠히데, 사쿠마 노부모리 등을 통해 노부나가에게 복종했으며, 히사히데와 일시적으로 화목했지만 이후 소규모로 싸우거나 11월에는 와카에 성 전투에서 선봉으로 참전했다. 1574년 8월에는 에치젠 잇코 잇키 토벌에 참여하거나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했으며, 1576년 5월 10일에 야마토의 슈고 다이묘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아즈치 성을 방문해 노부나가를 배알하면서 검 두 자루와 감, 베 등을 헌상해 치리멘, 말 등을 받았다.

1577년에는 사이카슈의 진압에 나서거나 히사히데가 노부나가에게 궐기하자 시기산성 전투에 참전해 수하들을 혼간지의 원군으로 위장시켜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고 하며, 1578년에 야마토를 평정하면서 류오잔 성을 함락했다. 10월에는 요시노의 잇코잇키를 진압하였다가 1579년에 아리오카 성 전투에 참전하여 노부나가에게 궐기한 아라키 무라시게를 공격했다.

1580년에는 야마토의 코오리야마 성으로 이전했으며, 1581년에는 한다 토오히데를 불시에 습격했다. 같은 해에 텐쇼 이가의 난 때 오다 노부카츠 휘하에서 3700명을 이끌고,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히지산의 스소노에 있다가 야습을 받아 반수의 병사를 잃었다. 1582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면서 미츠히데에게 아군이 되도록 권유받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며[1], 6월 10일에 미츠히데의 가신인 후지타 덴고로가 미츠히데에게 가세하도록 했지만 이를 거절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기로 하여 6월 14일에는 교토로 가 히데요시를 배알했다.

6월 27일에는 오다 군의 후계자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에 참여했으며, 7월 11일에 양자이자 조카인 츠츠이 사다츠구를 인질로 해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1584년에 위통을 호소했지만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한 이후 야마토로 귀환했다가 병사했다.

요우쿄쿠(謡曲[2]), 다도에 뛰어난 교양있는 무장이었다고 전해진다.

3. 대중 매체에서

3.1. 슈팅 게임 바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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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아 줄 수는 없다고!

시바타 가츠이에 스테이지의 2번째 중간 보스로 등장한다. 난이도는 그저 그런 수준.

오다 노부타다 스테이지에서 유명 무장들을 전부 족쳤거나 아케치 미츠히데로 플레이하는 경우에는 양자인 원주민츠츠이 사다츠구가 등장한다.

3.2. 태합입지전

전투 쪽은 답이 안나오고 지력 / 정치 / 매력이 70수준인데 기능이 구려서 미묘. 부하도 얼마 없는데 전투에서만 쓸만한 시마 사콘 빼면 그 부하마저 질 / 양 모두 구리다. 명색이 시마 사콘과 더불어 우콘 사콘 소리를 들었던 마츠쿠라 시게노부는 70을 넘는 능력치가 단 하나도 없어서 뭐 하나 제대로 써먹을 수 없는 수준에 양자인 츠츠이 사다츠구도 답 안나오긴 마찬가지이며 츠츠이 사다츠구는 츠츠이 준케이가 다이묘일 때는 부하도 아니다. 이게 츠츠이 가문의 가신 전부다. 설상가상으로 1554년 란마의 장으로 시작하면 부하가 아무도 없다! 1560년 시나리오부터 해야 우콘 사콘 꼴랑 둘. 바로 옆에 미요시 가문이 버티고 있는데 그나마 확장에 소극적이고 전투에 능한 인물이 없어서 잘 쳐들어오진 않고 초기 시나리오라면 노부나가와의 거리도 좀 떨어져있으니 빠르게 군소 세력을 제압해나가는 것이 답. 물론 CPU가 잡는다면 십중팔구는 노부나가한테 망하거나 종속되기 일쑤다.

3.3.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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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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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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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그저 그런 B급 영주. 그래도 가신에 시마 사콘이 있고, 탐색하면 낭인으로 야규 일족들이 있어 그럭저럭 할만 하다.

2살에 가독을 이어받아서 그런지, 창조에서는 2살에 사관을 한다.


[1] 이 때 준케이가 사태를 관망했다고 전해지는 호라가 고개(洞ヶ峠)는 '간을 보다'와 비슷하게 기회주의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2] 노가쿠(能楽)의 사장(詞章)·대본. 또는 그것에 가락을 붙여 노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