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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2:20:37

치려

郗慮[1]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가족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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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이며 는 홍예(鴻豫)로 《속한서》에 따르면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어려서 유명한 학자인 정현의 문하에 지낸 적이 있다고 하며, 건안(190년 ~ 193년) 초에는 시중이 되었다고 한다.

헌제공융과 함께 접견하는 자리에서 공융에게 치려의 장점에 대해 물었는데, 공융은 치려에 대해 "도를 나눌 수 있지만 권력은 같이 할 수 없다"고 해 한마디로 입만 산 놈이라고 깐 것이다.

이에 공융이 북해상인 시절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들이 유망하여 권력을 잃었다면서 아무런 공이 없다고 맞받아쳤고, 이후 공융과 서로를 까게 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삼공을 폐하고 승상-어사대부 체제를 부활시면서 208년 8월 정미일에 광록훈에서 어사대부로 승진했으며, 기어이 사이가 나빴던 공융을 탄핵해 가두고 뒤이어 죽인다.
치려가 공융을 죽인 진짜 원인이며 조조는 공융의 죽음에 책임이 없는데 악평이 덧씌워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애초에 이때 부활한 어사대부의 성질상 대폭 강화된 감찰권으로 관리들을 감시해 승상(=조조)의 독재를 보완하는 위치이고, 치려의 공융 탄핵에 대대적인 지원사격을 벌이던 노수는 당시 승상군모좨주로 조조의 직속 측근에 해당한다. 치려와 노수가 공융의 죄를 날조하며 앞장서서 길을 닦아놓은 뒤에는 조조도 거리낌없이 공융 탄핵에 참여해 공융을 처형시켰으며, 처형 직후에는 전국에 공융의 죄상을 나열하며 처형을 정당화하는 포고령이 내려지는 등 이례적인 조치가 이어졌다.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조조가 치려와 노수를 앞세워 자기 자신이 표면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했을 뿐, 공융의 죽음이 치려의 공권력 남용에 따른 독단이며 조조의 책임은 없다고 보기 어렵다. 탄핵 초반에 조조는 실질적인 배후이면서도 표면상으로 치려와 공융의 대립에서 중재자를 자처하고자[2] 했으니 치려가 이전부터 공융과 앙숙이었다는 점은 조조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214년 11월에 복황후복완과 몰래 편지를 보내어 조조를 해치려는 것이 발각되자 화흠과 함께 복황후를 붙잡아 그 도장과 인수를 거두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때 상서령 화흠의 부관으로써 병사들을 거느리고 궁궐에 갔고, 화흠이 복황후를 붙잡을 때 전각 바깥에 있던 헌제를 강제로 끌어앉혔다고 한다.[3]

3. 삼국지연의

공융을 죽이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4]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후 유비를 치려고 하자 공융이 "유비는 모두가 다 아는 인자(仁者)이며, …(중략)… 승상께서 이렇게 군사를 모시는 건 대의명분이 없습니다."라며 말렸다. 그러자 조조는 그 말에 분노하여 "놈들은 한나라의 천자, 그리고 승상인 나에 대항하고 있는 역적이니 그들을 치는 것이 곧 대의명분이다"라며 그를 쫓아낸 후 "다음부터 저런 말을 하면 목을 치겠다"고 덧붙였다.
공융은 승상부를 나오면서 "어질지 못한 자가 어진 자를 치니 어찌 망하지 않겠나"라고 했고, 이를 치려의 마부가 듣고 상전에게 고했다. 치려는 곧장 조조에게 달려가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보태 헐뜯었다(이 중에는 예형이 죽자 공융이 그를 높게 평가하며 슬퍼했다[5]는 얘기도 있었다). 당연히 조조는 크게 노하여 공융을 목베게 하였다.

4. 가족

치려의 후손은 진나라에서도 번성하였다. 증손인 치륭서진에서 양주자사를 지냈고, 현손인 치감동진이 망할 뻔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의 편에서 싸워 공작에 봉해졌다. 이후로 치음, 치초를 거치면서 나쁘지 않은 권세를 누렸지만 유송이 들어서기 직전에 치승시가 유유와 대립하는 세력에 붙었다가 반역의 무리로 엮어져 처형당했다.

다만 몰락한 건 어디까지나 종가이고, 치담의 후손들은 멀쩡히 살아남아 관직에 진출하였다. 훗날 치휘남제의 옹주자사 소연과 혼인하여, 소연이 남제를 멸하고 양나라를 세웠을 때 황후 덕황후로 추증되었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세균맨으로 나온다. 공융이 잼 아저씨여서 그런 듯. 본인이 첫 등장한 신야2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첫 등장부터 순욱, 순유, 정욱 등의 쟁쟁한 조조의 공신들을 다 제치고 승상 바로 밑인 어사대부직에 임명됐다고 언급된다. 치려는 조조가 싫어하는 유학자들의 대표주자격인 인물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조조는 치려를 중용함으로써 유학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고, 거기에 치려보다 몇 배는 골치아픈 같은 유학자 공융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언급된다. 치려는 황제 앞에서 공융과 한 판 치르고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 실제로 치려는 어사대부가 되자 공융의 목부터 날렸으며, 대유학자의 손에 대유학자가 제거된 꼴이라 유학자들도 할 말이 없었다고 묘사된다.

환2 전투 편에서는 황후가 조조를 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조조에게 전달했다. 이후 화흠이 황후를 끌어내는 모습을 보며 잘한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파일:치려(삼국지톡).jpg
삼국지톡에서의 모습.


[1]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어째 "극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郄(극)과 郗(치)를 헷갈린 듯.[2] 치려, 노수의 탄핵으로 투옥된 공융을 풀어주고 복직시키는 한편, 은근한 협박조의 편지를 보낸다. 여기까진 굿캅/배드캅의 형태로 공융을 회유하는 모양새로 볼 수 있으나, 공융이 여전히 굴하지 않자 치려의 2차 탄핵이 이어지고 여기에 조조가 직접 가세하면서 그 당일에 제대로 된 재판도 없는 날치기로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쯤 되면 대놓고 사법살인이다.[3]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이 부분을 "헌제가 통곡하다 쓰러지자 위로했다"고 미화(?)시켰다.[4] 김홍신 평역판 기준으로 서술한다.[5] 있음직한 일인게, 예형은 조조의 강압과 유표의 권유(조조가 유표에게 사신으로 가라고 억지로 시켰고, 유표는 예형을 구슬려서 황조에게 가게 했다)에 의해 사신으로써 황조를 만났을 때, 황조가 허창에서의 일을 묻자 "사람이라고는 공융이란 어른과 양수라는 어린아이밖에 없었다"라고 평했다. 공융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수와 예형은 자뻑이 심했던 만큼, 셋이서 서로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유유상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