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6-10 11:08:00

카디스 전투



파일:Map_of_the_Battle_of_Cadiz_1702.pn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네덜란드 연합군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2년 8월 23일 ~ 9월 29일 영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스페인의 주요 항구인 카디스를 공격한 전투. 영국-네덜란드 함대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격했지만, 500명도 안되는 스페인군이 기적적으로 막아냈다.

2. 배경

1702년 5월 15일, 영국과 네덜란드는 플랑드르에 공세를 개시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는 군대를 모집해 프랑스에 맞설 태세를 갖추는 한편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페인을 굴복시킬 방안을 모색한 끝에 우월한 해군을 동원해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의 해상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지중해에 작전을 펼치려면 먼저 이베리아 반도에 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초엔 바르셀로나 항과 마혼 항이 거론되었지만, 두 항구 모두 프랑스 해군이 주둔한 툴롱 항과 가까워서 적의 구원대가 조기에 도착할 우려가 있었다. 그 대신, 연합 함대는 카디스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카디스는 툴롱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프랑스 함대가 구원을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또한 카디스를 장악하면 지브롤터 해협의 항로를 통제할 수 있으므로 당시 영국이 노리고 있던 지브롤터를 공략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은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2세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끊고 자신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는데, 페드루 2세는 당장 그럴 수는 없고 영국의 우위를 확인하는 대로 진영을 바꾸겠다는 뜻을 비쳤다. 연합 함대가 카디스를 성공적으로 공략한다면 포르투갈이 이에 호응해 영국과 동맹을 체결할 것은 분명했다.

그러던 1702년 6월, 카디스 항 공략 작전을 검토하고 있던 영국 해군성에 중대한 정보가 들어왔다.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스페인 소속의 보물선들이 프랑스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영국-네덜란드 연합함대 50척은 14,000명의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과 함께 즉각 카디스 항을 향해 출발했다. 이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

1702년 7월 말 출발한 영국-네덜란드 함대는 8월 20일 포르투갈 해안을 통과했다. 그들은 카디스 항으로 진군하면서 척후선들을 연이어 파견해 보물선 행렬을 포착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윽고 8월 23일 카디즈 앞바다에 도착한 연합 함대는 지휘부의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휘부는 카디스 공략 방안을 놓고 격렬한 논의를 벌이느라 사흘을 지체했다. 일부 지휘관들은 해안에 병력을 상륙시키자고 주장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항구를 봉쇄한 후 포격하자고 주장했다. 총사령관 조지 루크 경은 한동안 고심한 끝에 카디스 북동쪽에 위치한 로타 항과 산타 카테리나 요새 사이의 해안에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8월 26일, 연합 함대는 순풍을 타고 카디스 북동쪽의 해안에 병사들을 가득 실은 보트들 보냈다. 이에 산타 카테리나 요새에 설치된 대포 4문이 불을 뿜었고, 보트 25척이 거친 물살과 적의 포탄을 피하다가 뒤집혔고 병사 20명이 익사했다. 이후 스페인 기병 100여 명이 해안에 상륙한 적에게 접근해 총격을 가했지만 영국 척탄병들이 반격하자 물러섰다. 이후 연합군은 로타 항으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공략했다. 조지 루크 경은 로타 시에 입성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으로서 받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기를 계양했다. 또한 그는 약탈을 금지했고 주민들을 건드린 자는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은 조지 루크 경의 성명서를 소지한 자는 반역자로 간주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고, 스페인 주민들 역시 이들을 침략자로 간주하고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9월 2일, 산타 카타리나 요새를 공략한 연합군은 뒤이어 성 마리 항을 공격해 민병대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오몽드 공작 지휘를 받는 육군 병사들은 성 마리 마을에 들어선 뒤 포도주 창고를 마음껏 약탈하고 주민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침략자를 증오하게 되었고, 조지 루크 경 역시 자신의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약탈을 벌인 육군과 오몽드 공작을 비난하는 내용의 편지를 본국에 보냈다. 한편 당시 카디스 총독을 맡은 빌라다리아스 후작 프란시스코 카스틸로 파자르도는 적 함대가 카디스 항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진입구역에 상선 3척을 가라앉힌 후 접근하는 함선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또한 그는 카디스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해안가를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연합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벌이고 그들의 연락망 차단에 온힘을 기울였다.

9월 중순, 연합군은 마타고르타 요새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요새 수비대는 끝내 버텨냈다. 또한 연합군이 카디스를 향해 출발한 뒤 비어있던 로타는 스페인 민병대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연합군의 약탈에 분노한 주민들이 각지에서 무기를 들고 몰려들면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결국 연합군 지휘부는 더이상 작전을 수행해봐야 카디스 공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9월 26일에 철수를 결정했다. 일부 장교들은 카디스를 포격하자고 제안했지만, 괜히 적을 더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이후 9월 28일부터 철수를 개시한 연합 함대는 9월 30일에 카디스를 완전히 떠났다.

5. 결과

카디스 전투에서 양측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전투가 연합 함대에 있어 무익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들은 고작 500명 정도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던 카디스를 공략하지도 못했고 쓸데없이 약탈을 일삼다가 주민들에게 반감만 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조지 루크 경은 육군과 오몽드 공작이 모든 걸 망쳤다고 비난하며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스페인 보물선 함대가 비고 만에 들어섰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에 그는 불명예를 씻을 기회라고 판단하고 함대의 항렬을 돌려 비고 만으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10월 23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첫번째 해전인 비고 만 해전이 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