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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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66년 6월 21일 ~ 12월 13일,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와 헨리 드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워릭셔의 케닐워스 성에서 잉글랜드 왕실군을 상대로 농성하다가 항복한 전투.2. 상세
1265년 8월 4일,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이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반란군을 섬멸하고 잉글랜드의 패권을 확보했다. 지난 해 루이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굴욕을 간직했던 왕실과 왕당파 귀족들은 반군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를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그해 9월 윈체스터 의회를 소집한 뒤 반란에 가담한 모든 귀족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반군 귀족의 영지를 압류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대상으로 약탈의 물결이 휘몰아쳤다.이렇게 영지를 잃고 목숨을 위협받은 반란 잔당 세력은 헤이스팅스 남작 헨리 드 헤이스팅스의 인솔하에 케닐워스 성으로 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과 합류했다. 케닐워스 성의 구조는 상당히 독특했고, 무거운 방어 시설을 갖췄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방어 시설은 성 남쪽에 있는 댐으로, 댐을 건너 성벽과 망루 입구에서 보도가 이어졌다. 댐 뒤에는 성의 남쪽과 서쪽을 따라 인공 호수가 있어 육지 접근을 차단했다. 또한 보도의 북쪽을 따라 있는 도랑과 동쪽에 있는 두 번째 웅덩이는 성을 둘러싼 물 보호 구역을 확장했다.
1265년 12월, 에드워드 왕자는 시몽 드 몽포르와 헨리 드 헤이스팅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두 사람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 후 잉글랜드 당국은 이들을 진압하기로 했지만, 공세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1266년 6월 21일이 되어서 포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성 수비대 1,200명은 여기마저 잃으면 오직 죽음 뿐이라는 절박감을 품고 강력히 항전했다. 왕실군은 투석기를 대거 동원해 성벽을 부셔보려 했고, 나무 탑을 연이어 제작하여 성벽에 붙였으며, 궁수를 위한 별도의 격실이 있는 탑도 건설되었다. 여기에 체스터에서 임시 상륙선을 보내 호수를 통해 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반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요새의 강력한 방어력으로 인해 많은 피해만 볼 뿐 공략할 기미가 없자, 헨리 3세는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란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케닐워스 칙령을 반포했다. 케닐워스 성에 숨은 반군은 처음에는 제안을 거부했지만, 12월에 식량이 고갈되고 질병이 창궐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2월 13일에 항복했다. 그 후 헨리 드 헤이스팅스가 엘리 섬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버티던 반란군 잔당을 통솔했지만, 1267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항복했다. 이리하여 제2차 남작 전쟁이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