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원래 녹서스에서 태어난 시이다 케인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다. 보람 다크윌이 통치했던 녹서스 제국에서도 가장 악랄한 지휘관만이 택하는 잔혹한 전법이었다. 나보리의 플레시디엄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전투에 뒤이은 침략은 녹서스 군의 의도대로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아이오니아 사람들의 측은지심은 녹서스 입장에서는 파고들어야 하는 약점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 전장에 나서면 아이오니아 전사들이 잠시나마 망설이리라는 것이 녹서스 지휘관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소년병들은 어른들이 손에 쥐여준 무기를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으니, 케인이 전장에 선 첫날은 전장에 선 마지막 날이 될 것이 뻔했다. 바알 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에풀 강 어귀에 상륙한 녹서스 군은 주춤주춤하는 케인과 소년병들을 선봉대로 내몰았고, 소년병 부대는 침략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진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나선 아이오니아 주민들과 마주쳤다. 또래 소년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케인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소년은 무거운 검을 던져버리고 땅에 떨어진 낫을 주워들었다. 때맞춰 녹서스 정규군이 측면에서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이오니아 인들은 기가 꺾였다. 곧 눈으로 보아도 믿기 어려웠을 잔혹극이 펼쳐졌다. 농부들, 사냥꾼들, 심지어 몇 명의 바스타야까지도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하고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틀 후, 남쪽 지역 전체에 소문이 퍼져나갔을 무렵, 그림자단이 이 소름끼치는 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그림자단의 수장 제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녹서스 군이 대학살극을 벌인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녹서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문득 제드의 눈에 금속이 빛을 받아 내는 번득임이 보였다. 기껏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진흙탕 속에서 부러진 낫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피투성이인 손은 어찌나 낫자루를 꽉 쥐고 있는지 관절이 하얘질 정도였다. 소년의 눈에는 나이와 전혀 걸맞지 않은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전장에서 단련된 여느 전사 못지않은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집념은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숙련의 경지에 오른 암살자 제드는 처참한 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버림받은 녹서스 소년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저 소년이 장차 자신을 이곳으로 내몰아 죽게 내버려 둔 자들을 노리는 무기가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드는 손을 내밀어 케인을 그림자단에 받아들였다. 그림자단의 수련생들은 대개 무기 하나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단련했지만, 케인은 모든 무기에 숙달했다. 그에게 무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케인 자신이 바로 무기였다. 거추장스러운 짐 같은 방어구를 벗어버리고,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신속하고도 소리 없이 적을 베어버리는 편을 선택했다. 이 전광석화 같은 암살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은 심장까지 파고들었던 공포감을 다른 이들에게 전했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면서, 케인의 오만함은 커져갔다. 케인은 언젠가 자신의 힘이 그림자단 수장인 제드의 힘조차 능가할 것임을 굳게 믿었다. 케인이 최후의 시험, 즉 최근 녹서스에서 발견된 다르킨 무기를 찾아내어 전쟁에 지쳐버린 아이오니아를 겨누지 않게 막으라는 임무를 선뜻 받아들인 것도 그 자만심 때문이었다. 케인은 왜 이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는지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다른 수련생들이었다면 라아스트라는 이름의 그 살아 있는 다르킨 낫을 파괴했겠지만, 케인은 자기 무기로 삼아버렸다. 케인의 손가락이 낫자루를 감싸는 순간, 다르킨의 힘이 그를 휘감았다. 케인과 라아스트는 서로 숙명과 같은 투쟁에 얽혀들었다. 라아스트는 완벽한 숙주를 만나 다시 다르킨 종족과 합류한 다음 이 세계를 초토화시킬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하지만 케인은 호락호락 라아스트의 의지에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케인은 승전보와 함께 아이오니아로 돌아가면, 제드가 자신을 그림자단의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
2. 영겁의 무기
케인은 녹스토라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 병사들의 시체에 둘러싸인 채 우뚝 서 있었다. 짙은 색 바위를 쌓아 만든 녹스토라는 녹서스 제국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관문으로, 그 아래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제국의 힘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제 녹스토라는 녹서스 병사들의 묘석, 꺾여버린 힘과 오만함을 드러내는 기념비, 상대에게 심어주려 했던 공포를 되려 자신들이 느끼며 죽어간 전사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케인은 공포를 즐겼다. 두려움을 믿었다. 공포와 두려움은 그의 무기였다. 그림자단의 형제들이 곡도와 표창을 쓰는 법을 익힐 때, 그는 공포와 두려움을 숙련했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녹서스 땅을 밟은 지금, 곧 잊혀지게 될 적 병사들의 시체더미 한가운데 선 지금, 케인은 묘한 불편감을 느꼈다. 마치 폭풍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짓눌림 같았다. 빨리 해소해 줘야 할 것만 같은. 케인의 동료 수행사제인 나쿠리가 곡도를 고쳐 잡았다. 일대일의 전투를 대비하는 동작이었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형제?” 목소리에 채 감추지 못한 떨림이 묻어났다. 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를 들지 않은 양손을 늘어뜨린 채로. 그는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꿈 속에서였나? 그 느낌은 깜박이는 불꽃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문득 그 간격을 틈타기라도 한 듯, 증오를 가득 담은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전장에서 일었던 성난 함성과 더불어 울려 퍼지며, 그 각각의 함성을 부추기는 목소리.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자 누구냐?” 제드는 가장 뛰어난 제자를 호출했다. 그림자단이 파견했던 첩자들에게서 달갑지 않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증오스러운 녹서스가 다르킨의 고대 무기인 낫을 발견했다는 소문이었다. 아이오니아의 그 어떤 마법 못지않은 강력한 힘이 담겨 있는 무기. 날이 휘어지는 부분에 진홍빛 증오가 타오르는 외눈이 박혀 있고, 가장 강한 자에게 자신을 들고 전투에서 휘둘러 보라고 부추기는 무기.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그럴 만한 능력을 입증해 보이지 못했다. 그 낫을 건드린 사람은 하나같이 눈 깜빡할 사이에 그것이 품은 적의에 휩싸여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래서 녹서스 인들은 낫을 사슬갑옷과 삼베 천으로 둘둘 감고 기마대에 맡겨 불멸의 요새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시이다 케인은 자신이 어떤 임무를 맡을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일은 자신의 마지막 시험이 될 터였다. 해안 도시 빈도르 외곽의 녹스토라에 도착한 케인은 이번 여정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지 새삼 생각해 보았다. 적의 땅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대담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담하다 못해 무모하기로는 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재능에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드가 아이오니아의 운명을 맡길 이는 케인 외에는 없었다. 그러니 의혹은 있을 수 없었다. 케인이야말로 위대한 일을 할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 케인은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마대의 모습이 멀리 보일 듯 말 듯했고, 그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로 피어올랐다. 저 거리라면 기마대가 녹스트라에 도착하기 전에 경비대원 셋을 해치우고도 남았다. 첫 번째 경비대원이 순찰을 위해 자리를 떴다. 케인은 석양을 받아 길게 드리워진 녹스트라의 그림자를 따라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그림자 마법을 소환한 다음, 마치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인 양 거무스름한 바위 속으로 쑥 들어갔다. 바위를 통과하는 와중에도 케인은 긴 창을 양손으로 틀어쥔 경비대원들의 모습을 윤곽으로 볼 수 있었다. 거리를 좁힌 케인은 그림자를 망토처럼 두르고 바위 속에서 뛰쳐나와, 두 번째 경비대원을 맨손으로 처치했다. 세 번째 경비대원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케인은 순수한 암흑의 기운으로 형상을 바꾸어 자갈을 깐 길을 단번에 돌진했다. 경비대원 앞에 도착하자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온 케인은 순식간에 그자를 해치워버렸다. 첫 번째 경비대원은 동료들의 생명 잃은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 몸을 돌렸다. 케인은 암살의 짜릿한 희열을 음미하며 미소를 지었다. “온몸을 마비시켜 버리지…” 그는 속삭이듯 말하고는 다시 한 번 녹스토라의 시커먼 바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두려움이란 건 말이야.” 그러고는 온몸을 벌벌 떠는 경비대원의 그림자를 통해 스르륵 빠져나왔다. “네게 도망칠 기회를 주겠다, 녹서스 인. 어서 가서 네가 목격한 장면을 알려라.” 병사는 장창을 내던지고 빈도르를 구해보겠다는 일념하에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케인의 망토만큼이나 어두컴컴한 망토로 온몸을 감싼 나쿠리가 녹스토라 뒤편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도망치는 병사의 복부를 공격했다. 나쿠리의 눈이 케인을 빤히 응시했다. “이게 다들 두려워한다는 녹서스의 힘인가? 망상도 정도껏이지.” “네가 앞뒤 가릴 줄 모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형제.” 케인이 내뱉었다. “하지만 이건 뭐지? 날 졸졸 따라와서 내 공로를 나눠먹겠다는 건가?” 하지만 더 이상 날이 선 말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녹서스 기마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날 방해하지 마라, 나쿠리. 넌 나중에 손봐 주지. 네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석양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가 시체들을 가렸기에, 기마대 병사들은 녹스트라의 거대한 아치 거의 아래까지 와서야 사태를 알아차렸다. “정지!” 선두에 섰던 병사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진형을 갖춰라! 당장!” 혼란과 동요가 퍼져나가는 가운데 병사들은 허둥지둥 말에서 내렸다. 그때서야 케인은 그들이 운반하는 화물에 눈길을 주었다. 제드가 말한 그대로였다. 사슬갑옷과 삼베 천에 둘둘 감겨 억센 빈도란 준마의 등에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인내심이라는 덕목은 나쿠리가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가장 가까운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반면 케인은 항상 목표물을 신중하게 골랐기에, 선두에 섰던 병사에게 정확한 공격을 날려 그가 뽑아들었던 검과 함께 쓰러뜨려 버렸다. 케인은 다시 빈도란 준마 쪽으로 돌아섰지만, 말등에 실렸던 낫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실패할 순 없었다. “케인!” 나쿠리가 병사 두 명을 연속으로 처치하며 외쳤다. “뒤쪽!” 다급했던 녹서스 병사 하나가 말등에서 낫을 풀어 거머쥐었던 것이었다. 날에 박힌 붉은 외눈이 번쩍 뜨인 채 잔혹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병사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고, 손에 들린 낫을 마구 휘두르며 동료 병사들을 베어넘겼다. 병사는 낫을 손에서 놓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제멋대로 날뛰는 낫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케인은 그림자 마법을 끌어올리고는 다르킨에 물들어 버린 병사의 몸 속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케인은 오랜 세월을 겪어온 낫의 눈을 통해 고통과 괴로움, 비명과 한탄으로 점철된 영겁의 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다르킨 낫은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죽음 그 자체였다. 오로지 악으로만 뭉쳐진 존재였고, 누군가가 막아내야 했다. 케인은 녹서스 병사의 몸뚱이에서 뛰쳐나왔다. 병사의 온몸은 딱딱한 비늘 같은 것으로 덮였다가, 시커먼 조각과 매캐한 먼지구름으로 화하여 흩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낫뿐이었다. 날에 박힌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케인이 손을 뻗어 낫을 집으려는 순간, 나쿠리가 마지막 병사를 해치웠다. “손 대지 마, 형제!” 나쿠리가 곡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그게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봤잖아! 그런 건 없애버려야 한다고!” 케인은 동료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 이건 이제 내 거야.” 둘은 마주 보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는 없었다. 도시 경계선 너머에서 위급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나쿠리는 곡도를 고쳐 잡았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형제?” 바로 그때 낫이 케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케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으나, 나쿠리의 눈이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자 누구냐?” 케인은 암흑의 손가락을 펼쳐 낫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밤공기 속으로 들어올려 자신의 손 안에 안착시켰다. 낫이 마치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니, 처음부터 몸의 일부였던 것만 같았고, 자신은 오직 이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케인은 가뿐한 동작으로 낫을 한 번 휘두른 다음 나쿠리의 목을 향해 날을 겨누었다. “네가 할 일을 해라.” |
3. 오디세이 스킨 세계관
미끼는 2018년 오디세이 케인 스킨 발매와 동시에 공개된 오디세이 세계관 관련 단편 소설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스킨 세계관 참고 바람.3.1. 미끼
키일로는 공격할 때마다 “기습이다!”라고 외쳤다. 케인은 그것이 키일로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설정된 프로토콜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 경고의 외침은 전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재미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갈고리 손잡이가 달린, 날의 길이가 50센티미터인 티타늄 도끼창을 휘두르며 “기습이다!”라고 외치는 4분의 3톤짜리 전투병기는 ’단지‘ 갈고리 손잡이가 달린, 날의 길이가 50센티미터인 티타늄 도끼창을 휘두르는 4분의 3톤짜리 전투병기일 뿐이었다. “지금은 안 돼.” 케인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벌써 기습했다.” 키일로는 애잔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깨끗하게 두 동강 나 바닥에 널브러진 케인의 오닉스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공문을 읽고 있는 시이다 케인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케인은 두 쪽이 아닌 두 명이 되어 있었다. 키일로는 당황한 듯 광학장치를 좁힌 채 커다란 금속 팔로 케인의 형상이 있는 곳을 휘휘 저었다. 형상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홀로그램 미낀가?” “그래, 홀로그램 미끼야.” 방의 반대쪽에 있는 케인이 말했다. “속임수였나?” “그-래.” “날 속였다.” “발소리가 들렸어.” 케인이 대답했다. 그는 방의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었다. 옅은 색이 입혀진 두꺼운 선실 창문 너머로 슬링스페이스를 가로지르는 네온 선이 쉿쉿 거리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케인은 문서를 읽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자세와 움직임은 의자에 앉아 있는 홀로그램과 정확히 일치했다. 키일로는 두 명의 케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홀로그램 미끼라, 제법이군.” 키일로가 말했다. “그런데 내 발소리를 들었다니, 난 잠입 모드였다.” 케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지난주에 네게 추적기를 붙여 놓았지. 네 움직임은 다 파악하고 있었어.” 전투병기는 잠깐 멈춰 있다가, 마치 개가 자신의 꼬리를 찾듯, 추적기를 찾아 몸을 이리저리 뒤졌다. “이건 정정당당하지 않다.” 그가 투덜거렸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전투에서 승리한다.”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에 제국 장교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옷에는 어떤 배지나 휘장도 달려 있지 않았다. 제국 최고위 신분을 상징하는 검은색 제복이었다. 그의 긴 머리는 중앙 행성의 귀족 양식을 나타내는, 한쪽을 깨끗하게 민 모양새였으며, 그의 왼쪽 눈과 뺨은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 인터페이스로 덮여 있었다. 케인은 전투병기를 바라보았다. “네가 첫 훈련 때 가르쳐 준 거야.” 키일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지.” “그렇다면 미끼를 쓴 건 전적으로 공정했다.” “하지만 속임수를 써서는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은 행동과 반응을 통해 배운다. 내가 오는 걸 안다면 너는—” 케인은 전투병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일로, 내 오랜 친구 키일로... 정말로 내가 더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 녹색과 주황색의, 여기저기 흠집이 난 장갑을 두른 키일로의 어깨가 처졌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넌 이제 제국의 고위 장교이며 전투에서 그 자격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넌 황제의 오디널 중 한 명이며 녹슬고 오래된 전투병기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난 그저 고철 덩어리거나, 베들럼 광산의 폐급 기계라고 생각한다.” “키일로...” “내 서보를 녹여 초우라늄 원소를 추출하거나, 내 부품을 신형 전투병기에 이식해야 한다고 생—” “키일로!” 케인은 거대한 기계 앞으로 달려왔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자신을 낮추지도 말고, 알겠어? 난 아직도 긴장감을 유지해야 해.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계속 그렇게 여기저기서 기습해줘.” 키일로의 광학 장치가 위로 치켜졌다. “그런가?” “그래. 어떻게 오디널이 충성스러운 전투병기의 도움 없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이긴 건가?” 키일로가 물었다. “글쎄, 이번에는 네가 내 책상을 반으로 쪼갰으니, 비긴 거로 치지.” 키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을 끌며 돌아서서는 아음속 펄스를 방출하여 케인의 선실 벽의 무기 보관장을 열었다. 검은 광택을 내는 패널이 양쪽으로 열리자 선반에 거치된 날붙이 무기와 총기들이 붉은빛을 받으며 드러났다. 여러 항성에서 설계된 무기도 있었고 태양의 빛이 닿지 않는 우주 어딘가에서 온 특이한 무기도 있었다. “그럼 바로 대련을 시작하지. 무기를 골라라.” 키일로가 말했다. “오늘은 안 돼.” “하지만 대련 일정이 잡혀있다.” “가 봐야 할 일이 생겼어.” 케인이 공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전문이 온 건가? 내가 들어왔을 때 읽고 있던 것이군.” “그래서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항로를 변경해야겠어.” 케인이 말했다. “지금 슬링스페이스 항로는—” “알아. 그 항로를 변경하겠다는 거야.” “황제가 아르마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서 클로아의 치안 유지 활동을 보고해야 한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나쿠리가 라엔 성단 너머에 있는 변방 행성에서 뭔가를 찾아냈어.” “그건 나쿠리 사령관이 처리할 것이다. 그는 데막시아 제국의 일급 장교다. 무공 훈장을 받은—” “나쿠리 사령관은 내 오랜 친구이자 전우야.” 케인이 말했다. “난 그의 판단을 존중해. 그가 오디널을 찾는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바서르 함장에게 항로를 변경해 달라고 전해 줘.” 키일로는 머뭇거렸다. “가서 전해 줘.” 케인이 말했다. 키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쿵쿵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잠깐,” 케인이 카일로를 불렀다. 그는 그에게 다가가 널찍한 등판에서 작은 장치를 뽑아냈다. “추적기를 뗐어. 봤지? 이제 추적기는 없어. 다음번엔 나를 기습할 수 있을 거야.” “알았다.” 키일로가 말했다. 그의 광학장치에 다시 열의가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이 특제 망치로—” “쉿! 쉿!” 케인이 말을 막았다. “기습이잖아, 알지?” 다시 혼자가 된 케인은 선실 구석에 있는 성계 지도 장치를 작동시켰다. 바닥에서 솟아난 기계의 금속판이 펼쳐지자 허공에 삼차원 국부 행성계 지도가 투사됐다. 그는 손을 뻗어 지도를 돌리며 행성들을 탐색하다 특정 지역을 선택하고 확대했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자 아이오난 행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케인의 황금색 시각 인터페이스가 홀로그램 지도에 연결되자, 세밀한 실시간 영상이 나타났다. 아이오난은 변방 행성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행성이다. 하지만 나쿠리의 팀은 그곳에서 ‘오라’를 찾기 위해, 그 귀중한 동력원을 제국의 손에서 훔치려는 기사단의 반역자들을 잡기 위해 몇 달째 작전 중이었다. 광대한 로커스 아르마다를 통치하는 데막시아 제국은 개척된 우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력이었다. 제국의 위세와 기술력은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었다. 황제의 이름 아래, 오디널과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력으로 절대적인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해도, 우주는 정말 ‘너무나도’ 거대했다. 워낙 종족이 다양하고, 통제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불온 세력 또한 많았다. 다른 모든 세력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제국의 규모와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체제 전복 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황제 자르반 4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처음으로 황위에 오른 인간이었다. 그와 케인은 나이도 비슷했고 친구 같은 사이였다. 자르반은 케인에게 최근 몇 년간 다소 과격한 입장을 취하는 제국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보는 제국은 획일적이며 융통성이 없고 권위주의적인 세력이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제국은 그러했다. 특히 외부 거주자들, 예속된 자들, 기사단, 그리고 악명 높은 범죄 집단인 신디케이트에게 제국은 고압적이고 거만하며 저항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자르반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진보적인 생각과 희망을 가득 품고 황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도 강경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케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전쟁은 간단하지만, 평화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게 날 힘들게 한다네, 시이다. 아무도 우리의 업적을,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좋게 보지 않는 것 같다네. 항상 우리의 눈을 피하려 하고 복종하지 않으려 하지.” “고양이들을 모는 것과 같군요.” “고양이?” 케인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설핏 웃었다. “고양이들 말입니다, 폐하. 제멋대로인 걸로 악명 높은 녀석들이죠.” 물론 문제는 오라였다. 액체 황금 같은 이 물질은 ‘신화에나 나올 법한’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누구든 그것을 손에 넣으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제국은 오라의 채굴과 분배, 사용을 통제해야 했다. 특히 악랄한 기사단은 오라를 이용해 생체를 해킹하는 불법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런 행위는 위험할 뿐 아니라 체제에 위협적이었다. 제국은 변두리에서 그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에 귀속된 오라를 지키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케인은 이 문제에 대해 몇 가지 해결책을 갖고 있었고, 황제 직속의 가장 뛰어난 이들인 오디널 모두가 그랬듯이 자르반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자르반은 흠칫 놀랐다. 케인의 제안들은 무자비하면서 실용적이었다. 강경한 압박, 강화된 형벌, 저항하는 행성에 대한 군사적 합병. 케인은 자신의 철학대로 조직된 제국은 자르반이 지향하는 사회에 비해 훨씬 호전적이고 무관용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이러한 의견을 제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케인의 의무였다. 그는 오디널이었고 황제를 보좌하는 것은 오디널이 할 일이었다. 황제는 케인을 꾸짖다시피 하며 강경책에 반대했지만, 케인은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자르반이 황제이며 케인이 오디널인 이유였다. 케인은 자르반이 목줄을 묶어놓은 사냥개였다. 자르반은 다른 대안이 없을 때만 사냥을 시켰다. 그리고 자르반은 자신의 사냥개를 시험하길 좋아했다. 그의 충성도와 호전성을 가늠하기 위해서. 아이오난... 변방 행성. 케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쿠리가 무엇을 찾아냈는지 궁금했다. 갑판을 타고 진동이 느껴졌다. 제국의 전함 ‘프랙털 쉬어’가 항로를 바꾼 것이다. 바서르 함장은 전함의 슬링스페이스 엔진으로 전함을 둘러싼 차원 왜곡 구체를 변형시켜 아이오난으로 항로를 돌렸다. 선창 밖을 지나가는 깜박이는 불빛들의 색이 바뀌었다. 오라 에너지가 전함의 슬링스페이스 엔진에 동력을 공급하자 선체 주위로 시공을 왜곡하는 구체가 형성되었고 물수제비를 뜨는 돌처럼, 기류나 표면 장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공간 상층을 통해 초광속으로 이동했다. 성계 지도에 표시된 아이오난 행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여섯 시간이었다. 케인은 자신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낮은 키득거림이었다. 그는 키일로가 자신을 향해 달려올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기습이다!”라는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무장이 필요하지?” 키일로가 돌아와 열려 있는 무기 선반을 응시하고 있는 케인에게 물었다. 케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모든 무기를 수도 없이 연습했고, 질린 상태였다. 손에 딱 맞게 느껴진 무기가 몇 가지 있었지만 그 무기들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신중함.” 케인이 대답했다. “무슨 말인가?” “나쿠리 사령관이 신중하라고 조언하더군.” 케인이 말했다. “그래서 슬링스피드를 벗어나 목표 행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관성 항해 중인 건가?” “응, 혼자 내려갈 거야. 함장에게 내 함선을 준비하고, 이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하지만 이미 숙련된 슬링트루퍼 오십 명이 소집된 상태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도끼도 정비해 놓았다.” “혼자 가겠어. 필요하면 부를게.” 케인이 말했다. 그는 크롬제 광자 권총과 세련된 장식이 있는 장창을 골랐다. 둘 다 자신에게 익숙한 무기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키일로를 돌아보았다. “방금 뭔가 말했어?” “나 말인가?” 키일로가 대답했다. “안 했다.” “좀 전에도 네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아니, 난 웃지 않았다.” 케인이 탄 함선의 추진기가 짧게 불꽃을 내뿜으며 ‘프랙털 쉬어’의 상부 선체에 위치한 적재 구역을 떠났다. 그의 함선인 데막스-3 슈페리어티는 차단 기동과 국경 임무에 운용되는 소형 요격기였다. 오디널은 원래 제국 함대의 의전용 수송함을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전투원과 전투용 차량을 탑재할 수 있으며 지역민들에게 제국의 위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케인은 변방 비행 중대에서 부사령관으로서 초임 시절을 보냈을 때부터 데막스-3의 속도와 화력을 좋아했다. 그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가속을 한 번 내고 모선 밖으로 튀어 나갔다. 화살촉 모양을 한 그의 함선은 엔진 방향을 바꾸더니, 소행성대를 빠르게 통과해 분홍색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 있는 별들이 밤하늘에 드문드문 떠 있는 반딧불이들처럼 빛을 발했다. 추적 장치에 전방에 있는 아이오난 행성이 표시됐다. 케인은 자동 조종을 거부하고 수동으로 함선을 조종하여 나쿠리의 위치 신호를 따라 대기의 경계면에 있는 차갑고 얇은 증기들을 스치며 날아갔다. 신호와 모든 비행 데이터가 케인의 인터페이스에 직접 전달되었고 그의 망막에 정보들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나쿠리의 함선인 ‘젠틀 리마인더’는 ‘프랙털 쉬어’의 절반 정도 크기인 진압용 순양함이었다. 변방 행성의 반대편에서 높은 궤도를 타고 있는 젠틀 리마인더가 케인의 거리 측정기에 유령처럼 표시되었다. 구름층을 뚫고 내려간 케인은 넓게 펼쳐진 황토색 사막과 소금 평원 위를 날아갔다. 소금 평원이 햇빛을 반사해 눈부실 정도의 빛을 비추었다. 케인이 빠른 속도로 저공비행을 하자 메마른 지형 위로 함선의 궤적을 따라 모래바람이 소용돌이쳤다. 그 앞에는 아주 길고 낮은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분홍색과 적갈색 암석이 바람에 깎여 나가 만들어진 뾰족하고 각진 바위들이 마치 겨울에 물 밖으로 드러난 산호초 같았다. 위치 신호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케인은 엔진 출력을 낮춰 제동을 걸고 기수를 올린 후 착륙을 위해 선체를 빙 돌렸다. 분홍색 절벽 아래에 있는 고원에 주둔지가 있었다. 그곳에는 제국의 수송 왕복선 두 기가 정박해 있었다. 그는 착륙 장치를 작동하고 수직으로 강하했다. “촌구석에 온 걸 환영하네.” 나쿠리가 말했다. 케인은 조종석을 열고 눈 부신 태양 빛이 내리쬐는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오랫동안 복무해 온 나쿠리에게는 모든 곳이 촌구석이었다. 케인과 함께 여러 행성에서 복무하며 여러 곳을 다녀 본 나쿠리의 입장에서 외곽 행성들과 변방 행성들은 촌구석이나 다름없었다. “말투가 그게 뭔가, 사령관.” 케인은 딱딱하게 말했다. 나쿠리는 멈칫했다. 얼굴에 미소도 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케인은 이제 고귀한 오디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촌구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각하’!” 그들은 씩 웃고는 서로 얼싸안았다. “정말 오랜만이군.” 케인이 말했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야, 시이.” 나쿠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오른쪽 눈에 있는 은빛 원형 인터페이스가 윙크를 하는 것처럼 빛을 반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지긋지긋한’ 상황이지?” 케인이 물었다. 나쿠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와 비슷하게 완전 군장과 무장을 갖춘 슬링트루퍼 열 명이 빳빳한 차려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 모두가 몸에 딱 맞는 간소한 검은색 제복을 입은 케인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들은 숙련된 베테랑들이었고, 대부분 케인이 아는 병사들이었다. 콜라, 스픽스, 리고, 그리고 분대장 베키드. 케인은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다른 병사들의 이름을 그들의 흉갑에 달린 생체 인식표를 통해 빠르게 확인했다. 이름을 알아두면 그 보답이 있는 법이다. 병사들은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주는 오디널을 더 잘 따랐다. “제군, 출발하지.” 나쿠리가 말했다. 고원을 이동하는 동안 나쿠리가 케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여기 온 건 기사단 때문이야. 기사단원 두 명과 그들의 ‘신봉자들’ 한 무리였지. 카이볼 밖까지 놈들을 추격했는데, 결국 이곳으로 도망치더군. 우린 놈들이 도망칠 구멍을 찾아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기가 바로 놈들의 목적지였어.” “이유는?” 케인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우리가 내려와서 놈들을 모두 생포했지. 음, 거의 전부를 말이야. 몇몇 놈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사망자가 있긴 했지만.” “사망자 수는?” “기사단원 둘 포함 열 명. 우리 쪽 사망자는 없었고. 꽤 치열한 전투였지.” “체포한 추종자들은 총 몇 명이지?” “열여섯. 지긋지긋한 불온 분자들이지. 저 앞 동굴에 가둬놨어. 지금 심문 중이야.” 케인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뭘 알아내려고?” “무엇이든. 기사단 요새, 오라 은닉처, 연락책. 그리고 물론, 왜 여기로 헐레벌떡 왔는지도.”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케인과 나쿠리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슬링트루퍼들도 멈춰 섰다. “할 말 있나, 베키드?” 나쿠리가 물었다. “없습니다, 사령관님.” 분대장이 대답했다. “아닌 것 같은데. 베키드의 말을 들어보고 싶군.” 케인이 말했다. 베키드는 불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오디널 각하’. 제가 주제넘게 말을 꺼냈습니다. 이곳 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투복에는 냉각 기능이 있다, 베키드.” 케인이 말을 받았다. “말해봐.” “실은… 저희가 뭔가를 찾았습니다. 그게 그들을 여기로 부른 것입니다. 놈들은 그걸 찾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절벽 아래에 있는 벌집 모양의 동굴들을 향해 모래 경사면을 올라갔다. 햇빛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절벽 밑의 연보라색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자 지하 저장고에 들어간 것처럼 시원했다. 나쿠리의 인터페이스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나쿠리는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피했다. 케인과 슬링트루퍼 부대는 그림자 아래서 대기했다. 케인은 수백만 년 동안 사막의 바람에 침식된 동굴 입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는 무언가를 들었다. 목소리였다. 명확한 단어가 아닌 웅얼거림이었다. 그는 대기 중인 대원들을 두고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 속의 어둠이 그를 향해 조용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웅얼거림이 들렸다. 반은 웅얼거림이었고, 반은 키득거림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동굴 안일까?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그를 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인은 얼굴을 찌푸리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인터페이스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케인이다.” 그는 작게 응답했다. 그의 왼쪽 눈에 ‘프랙털 쉬어’의 함교에 있는 바서르 함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각하, 경보 차원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슬링스피드 이하의 속도로 아이오난 공역을 향해 이동 중인 미약한 신호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미약한 신호 반응이라고?” “확실한 데이터도 없고, 정확한 위치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유령처럼 말이죠.” “보여줘.” 바서르는 그의 인터페이스에 전함 주 탐지 시스템의 실시간 영상을 전송했다. 명확한 질량도, 밀도도 없었다. 사실, 탐지관들이 일반적으로 배경 왜곡이라 생각하고 무시할 정도의 데이터 수차였다. 하지만 지상에 오디널을 홀로 내려보낸 바서르는 극도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들이 쓰는 은폐장이군.” 케인이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서르는 말을 이었다. “특히 신디케이트 쪽에서 많이 사용하죠. 밀수범 검거 작전 중에 여러 번 봤습니다. 만약 은폐장이라면 꽤 훌륭하군요.” “맞아. 훌륭한 성능이군.” “접근을 차단할까요?” “아니.” “그러면 좀 더 가까이 접근할까요? 만약을 대비해서 아이오난을 포격 거리 내에 두어야...” “아니야, 함장. 이곳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어. 불온 분자들이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왔을지도 모르고. 아직 그 무언가를 교환하기 전일지도 몰라. 그자들이 뭔가를 가지러 온 거라면 쫓아내지 말고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각하께서 확신하신다면.” “확신하네. 어떤 자들일지 두고 보자고. 이곳에 엄청난 정보가 있을지도 몰라.” 케인은 연결을 끊고, 걸어오는 나쿠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 보자,” 케인이 말했다. “미약한 신호 반응이겠군?” 나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랙털 쉬어’ 쪽에서도 알고 있나 보군. 양쪽 전함 사이의 성계 내곽은 우리가 잘 감시하고 있어. 그러니 별일 아닐 거야.” “‘젠틀 리마인더’ 쪽에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했겠지?” “아무 행동도 취하지 말라고도 했네.” 나쿠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방식은 잘 알아. 어떤 놈들일지 얼굴 한번 보자고.” 나쿠리는 돌아서서 가장 거대한 동굴 입구로 가는 마지막 경사면 구간으로 케인을 이끌었다. 슬링트루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케인은 여유와 만족감을 느꼈다. 나쿠리처럼 신뢰할 수 있는 현명한 자와 함께 작전을 벌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들은 멋진 팀이었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이상한 느낌을 무시했다. 그것은 단순하고 정상적인 공포였으며, 잠재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불안한 상황을 처리할 때 드는 긴장감이었다. 그에게는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죄수들은 절벽의 바깥 동굴에 갇혀 있었다. 나쿠리의 슬링트루퍼들이 죄수들에게 에너지 족쇄를 채웠고, 솔리파스라는 장교가 지휘하는 2분대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개성 강한 다양한 종족의 죄수들은 더럽고 닳아빠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일부는 심문 중 구타당하기도 했다. 케인은 오라를 이용한 생체강화가 모두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과정은 보기 싫은 상처를 남겼다. 기사단이라면 종파 그 이상도 아니었다. 불온 종자들이 모인 유사 신비주의 연합은 자신들이 오라의 진정한 ‘수호자’이며 그 물질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며, 다른 단체가 그것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보호한다고 믿었다. 케인은 긴 복무 경력만큼이나 많은 기사단원들을 심문했고, 그들 대부분은 터무니없는 자들이었다. 기사단원들의 태도는 불쾌하고 오만했으며, 종교 집단에 속한 자가 가진 특유의 관대한 아량을 표출했다. 그들은 또한 오라에 내재된 위대한 실존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데막시아 인에게는 너무나 위대하고도 고상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치가 확실한 단 하나의 자연 자원에 그 이상의 영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마치 오라가 신이나, 창조주나, 우주의 보편적인 영적 실체라도 되는 것처럼. 케인은 전에도 이런 종류의 광기를 본 적 있었다. 변방 행성에 거주하는 원시 사회에서는 나무나 자연, 생태계를 숭배했고 때로는 평범한 전투병기에 충격을 받고 이를 신으로 숭배하는 화물 숭배 신앙을 갖기도 했다. 어리석고 무지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조직적이고 호전적이며 은하계 전역에 걸친 지원망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들의 신념은 비정상적인 데다가 터무니없었지만, 그들의 미천한 추종자들은 제국으로부터 귀중한 오라 물자를 훔치거나 민간 재산을 강탈하면서까지 열정적으로 기사단을 신봉했다. 그들은 가장 질 나쁜 부류의 불온 분자들이었다. 케인은 죄수들이 붙잡혀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사납고 완강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었다. 비참한 몰골의 죄수들이 자신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을 알아챈 케인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곳이 자신들의 종착지이며, 애처로운 믿음조차 더는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 “나는 오디널, 시이다 케인이다.” 케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지위의 권한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보아하니 묵비권을 행사 중인 것 같은데.” 죄수들은 움츠러들었다. 케인은 외계 종족이 적어도 여섯 종은 섞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누구를 고를 것인가? 스콜도이는 어떨까? 아주 연약한 종족이었다. “체포당해 족쇄를 차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군.” 케인은 말을 이었다. “슬픈 일이야. 왜냐하면 내 경험상 굴복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거든. 그대들은 내 질문에 답하게 될 거다.” “우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몸집이 큰 코로바크가 으르렁거렸다. “그래? 왜지?” 케인이 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지.” 일부가 동의하며 웅성거렸다. 그렇다면 코로바크인가, 케인은 생각에 잠겼다. 코로바크는 가장 덩치 큰 우두머리였다. 그에게 본때를 보여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꼬리를 내릴 것이다. 아니다. 그건 너무 쉽다. 케인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내 질문에 대답했군, 코로바크.” “난...” “난 질문했고, 자넨 대답했어.” 케인은 말을 이었다. “어렵지 않았지? 그러니까 이건 일반적으로 자네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군? 그저 구체적일 뿐이었지.” “난 네놈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없다.” 코로바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네 장단을 맞춰 줄 거라 생각한단 말이지. 아무래도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군, 선생. 자넨 지금 협상할 처지가 아니야. 자, 그럼 시작해 보지. 난 이름을 원해. 자네가 가진 연락책과 변방 행성의 조력자들. 자네들을 이리로 데려온 두 명의 기사단원. 그들이 아이오난에 오기 전에 거래했던 사람들 말이야.” 코로바크는 시선을 돌렸다. “그럼 첫 번째 이름부터 시작하지.” 케인이 말했다. “우린 누군가가 ‘데려오지’ 않았다.” 코로바크는 중얼거렸다. “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중히 부탁건대, 이름을 말해 주겠나?” 그는 그저 동굴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인은 권총집의 걸쇠를 벗기고 광자 권총을 꺼내 들었다. 긴 크롬 총신이 황혼의 붉은 어스름을 받아 반짝였다. 케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발동 장치를 쓸었다. 계기판이 발포 단계까지 올라가자 침울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첫 번째 이름.” 케인은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죄수는 고개를 저었다. 케인은 천천히 권총을 들어 올려 무릎을 꿇고 앉은 코로바크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공포에 휩싸인 죄수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첫 번째 이름.” 케인은 다시 물었다. “원한다면 쏘게나.” 코로바크가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게 바로 제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지. 협박하고, 짐승처럼 취급하고. 그러니 쏘게. 넌 절대로 원하는 걸 얻지 못할 테니. 나는 기사단의 축복을 받으며, 자네에게 저항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오라 관문을 지날 걸세.” “좋아.” 케인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놀이는 그렇게 끝나지 않아.” 케인은 조준 대상을 바꾸었다. 광자 권총은 코로바크 뒤의 소녀를 겨눴다. 커다란 눈을 가진 진지한 표정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다. 다른 종족들과 달리, 이 소녀는 케인과 그의 권총을 똑바로 바라봤다. “첫 번째 이름을 말해라, 코로바크. 아니면 이 아이가 대신 저승으로 가게 될 거야. 자넨 살아남겠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말이야. 축복이나 만족감이 아니라 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네 몫이 될 거야.” 코로바크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 못 할 것도 없지.” 케인이 말을 이었다. “한 명씩, 차례차례, 모든 명단과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낼 때까지 몇 명이라도 말이지. 이건 아주 간단한 놀이야. 자네가 대답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시체가 몇 구나 필요할까. 하나? 셋? 열다섯? 백?”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이게 내 일이거든.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야. 내가 그저 질문하듯 누군가를 쉽게 죽인다고 생각하나? 자네, 오롯이 자네만이 이 일에 필요성을 부여한 거야. 나에게 선택지를 남겨 주지 않았지 않나.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어찌 그리 잔인한지 모르겠어. 단지 대답이 조금 느렸다고 해서 이 가여운 소녀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코로바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 나는... 배신하지...” “좋아, 나는 원칙을 가진 사람을 존경하지.” 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원칙이란 위대해. 그 원칙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죽는다면 더욱 그렇고.” 그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는 기이하게도 아무런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렇게 침착한 죄수는 처음이었다. 거슬렸다. 그녀를 심문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녀가 아는 것 전부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 흥미는 막 생겨난 것이다. 케인은 그녀를 본보기로 선택했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은 죄수들의 결의를 다지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지만... “동지들의 부족한 협조심을 네가 만회할 수 있단다.” 케인은 소녀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네가 첫 번째 이름을 말해라. 대화로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이자에게 가르쳐 주면 나 또한 관용을 베풀어 주지.” 소녀는 조용히 케인을 마주 보았다. “어서.” 케인은 재촉했다. “첫 번째 이름을 말해.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소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코로바크가 흐느끼듯 쏘아붙였다. “아, 할 수 있고말고.” 케인은 소녀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일걸. 소나라고? 그게 네 이름인가? 소나, 간단한 질문이야. 한 단어, 한 이름. 어려울 거 없어. 이름을 말해.” 소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이 곧 분노로 바뀌었지만 케인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절제했고 기회도 주었지만 소녀는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누구도 그를 이렇게 대우한 적 없었다. “소나, 실망스럽구나.” 케인은 방아쇠를 당겼다. 폭발이 동굴을 휩쓸었다. 케인이 다시 제 발로 서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바깥의 흙먼지가 동굴로 쏟아져 들어왔고, 천장에서 파편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가 쏜 탄환은 폭발 충격으로 케인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크게 빗나갔다. 동굴 바깥에서 큰 소리가 두 번 더 울려 퍼졌다. “이동! 이동!” 나쿠리가 고함을 질렀다. 슬링트루퍼들은 앞다투어 출구로 뛰었다. 죄수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 소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계속 감시해!” 케인은 솔리파스에게 소리치곤 출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빛이 닿는 곳으로 빠져나가자 다시 선회한 소형 전투기가 상공에 나타났다. 나쿠리의 수송선 중 하나는 이미 파괴되어 불타고 있었다. 무광의 녹색 화살 전투기는 고원 위에 낮게 떠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광자포 포드에서 칼날 같은 빛이 번쩍이자 두 번째 수송선이 폭발했고, 불기둥에 휩싸인 거대한 선체가 뒤집혀 추락하다 케인의 소형 데막스-3와 충돌했다. 나쿠리는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고, 그의 슬링트루퍼들은 동굴 입구에 늘어섰다. 교전이 시작되자 빗발치는 탄환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기다려!” 케인이 소리쳤다. “왜?” 나쿠리가 물었다. “사격을 중지해. 우릴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산을 무너뜨렸을 거야. 주의를 끌 속셈인 거지.” “사격 중지!” 나쿠리가 명령했다. “함대에 연락해.” 케인이 말했다. “현재 위치를 사수하고 구출하러 온다든가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군, 친구.” “언젠 안 그랬나. 자, 서둘러!” 케인은 나쿠리가 인터페이스를 작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불타는 함선의 잔해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수평으로 퍼져 나갔다. 지면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와 함께 연기가 물결쳤다.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 “와 보시지.” 그가 중얼거렸다. “오라고, 어서...” 고원의 끄트머리에서 녹색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체는 엔진을 아래로 분사해 제자리 비행 중이었다. 옅게 색을 입힌 창문에 햇빛이 반사됐다. 기체는 시야를 가로막은 짙은 연기를 뚫고 천천히 날아들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 회색 전투기가 나타났다. 세 번째로 나타난 붉은색 전투기는 그들이 있는 고원의 중앙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세 전투기가 20여 미터 떨어진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제길.” 나쿠리가 말했다. “신디케이트군.” “그래.” 케인이 대답했다. 그는 한눈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개조한 공격용 함선을 알아보았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불법적이고 외계에서 가져온 무장 체계는 작은 선체와 어울리지 않게 비대칭적으로 거대했다. 기체 자체도 제국 통치기 이전의 기술을 사용한 구모델을 폐행성에서 인양해 와서 신디케이트의 솜씨 좋은 무기 설계자들이 개조한 것이 분명했다. 가장 거대한 붉은색 전투기의 동체 밑에는 포드가 달려 있었다. 밀수품인 은폐장 생성기였다. 미약한 반응 신호의 정체는 함선 한 대가 아니었다. ‘세 대’의 전투기들이 은폐장 안에서 밀집 대형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유령 신호로 보였던 것이다. 질량이나 밀도에 대한 명확한 데이터가 없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 하강 궤적을 타고 하나가 되어 움직이다가, 대기권에 진입하자마자 흩어졌을 것이다. ‘제법이군.’ 케인은 생각했다. 밀수 경로 봉쇄나 함대를 이용한 수송로 차단 검문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전형적인 범죄 수법이다. 붉은색 함선이 약간 앞으로 다가왔다. 조종석이 불쑥 열렸다. “저 녀석은 나한테 맡겨.” 나쿠리가 말했다. “내가 이야기해 볼게.” 케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대원들을 대기시켜 둬. 순식간에 기습해서 끝내지 않으면 놈들이 이 구역 전체를 날려버릴 거야.” 나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늘에서 나온 케인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 고원 꼭대기를 내리쬐는 강력한 햇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그는 머리를 치켜든 채 흙먼지 사이를 뚫고 맨 앞에 있는 전투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나?” 케인이 외쳤다. 붉은색 전투기의 조종석은 2인승이었다. 앞쪽에 앉아 있던 헬멧을 쓴 조종사가 총구로 케인을 겨누었다. 뒷좌석의 그림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크를 벗었다. “있고말고요.” 그가 말했다. “오디널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하루하루가 새롭고 흥분되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자고, 코런 자고였다. 은하계 변두리에서 활동하는 신디케이트의 요주 인물 중 하나 말이다. 케인의 인터페이스는 즉시 얼굴과 음성 인식으로 그를 식별했지만, 케인은 이미 그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데막시아의 장교라면 모두 우주 곳곳에 붙은 수배 전단을 통해 자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잡히지 않은 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기에 그가 나타났던 것일까? “이거 영광이로군, 자고.” 케인이 말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말이야.” 자고가 미소지었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시이다 케인. 당신 이야기는 굉장히 많이 들었죠.” “제국 기물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군.” 케인이 불타는 잔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저 저희의 결의를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공했네. 여긴 무슨 일로 왔지? 기사단과 그 추종자들을 만나러 왔나? 거래라도 하기로 한 건가? 자고는 진심으로 놀란 것처럼 보였다. “기사단이라고요? 도대체 제가 기사단에 무슨 볼일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게 아니라고?” “아닙니다. 전혀 상관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뭐지?” “당신과 같은 이유일 것 같군요.” 자고가 말했다. “오디널이 변방 행성까지 날아오는 게 흔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케인은 자신의 정보 부족을 감추기 위해 태연히 거짓말했다. “그렇다면 넌 어떻게 들었지?” 자고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 당신과 같은 출처겠죠.” 케인은 그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읽었다. 코런 자고는 자신감 넘치고 거만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뭐, 그렇다면...” 케인은 자고의 어색함을 반영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도 알고 있군.” “알죠.” 자고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 말입니다. 마치 우주에서 들려오는 것처럼요. 전 그걸 가지러 이곳에 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제 것이 되리라는 사실도요. 그러니 죄송하지만 오디널, 당신은 절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넘기고 물러나시죠.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 말 겁니다. 저항하신다면... 뭐,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걸 빼앗아 제국 함대가 눈치채기도 전에 사라질 겁니다.” “터무니없는 소린 아니군.”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자고는 위험인물이지만, 정신 이상자는 아니었다. 그의 전투기 세 대는 케인의 소규모 지상군을 압도할지 몰라도 ‘프랙털 쉬어’와 ‘젠틀 리마인더’는 신디케이트도 벌벌 떠는 로커스 아르마다의 전함이었다. 게다가 코런 자고가 몸소 행차했다니. 케인이 알고 있던 그의 전형적인 일 처리 방식이 아니었다. 뭔가 달랐다. 충동적이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이 그의 약점을 드러냈다. 케인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어 정신을 맑게 했다. 그가 어떻게 오디널이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줄 때였다. “이거,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군.” 케인은 중앙 행성 특유의 우아하고 과장된 동작으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누구나 공식적인 항복 의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의례적인 몸짓이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어깨를 앞으로 숙이고 양팔을 내려놓으며 크게 절을 했다. 케인은 화려하게 장식된 창을 오른손에 쥐고 45도 각도로 날이 위를 향하도록 들었다. 군인으로서 경의를 뜻하는 각도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 케인은 따끔거리는 열기와 피어오른 연기를 느꼈다. 그에게 와 닿는 코런 자고의 시선도 느꼈다. 이렇게 수월하게 승리를 거두다니 그도 놀랐을 것이다. 케인은 강했다. 그의 기본적인 신체 능력은 지독한 훈련으로 단련되었고, 과학의 힘으로 강화되었다. 다른 모든 오디널과 마찬가지로 케인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였다. 케인은 기다렸다. 자고의 입 밖으로 단 한 음절이 나올 때까지. “당신—” 케인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아래에서 위로 창을 던졌다. 창은 겨누어진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케인은 심지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힘차게 날아간 창은 공중에 떠 있던 붉은색 전투기의 은폐장 포드 바로 앞쪽을 꿰뚫었다. 넓은 창날은 기체를 뚫고 중앙부의 냉각기와 자세 제어 시스템, 조종석 바닥을 지나 코런 자고에게까지 날아갔다. 창이 마침내 멈추었을 때, 전투기는 꼬치에 꿰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창 자루가 기체의 바닥을 뚫고 올라와 자고를 공격한 모양새였다. 자고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꼿꼿이 고정되어 있었다. 생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순간의 정적이 지나자 기체 내부 시스템이 터지고 파괴된 붉은색 전투기가 거칠게 요동쳤고, 압력이 조정되지 않는 엔진에서 굉음이 났다. 신디케이트의 조종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반응을 보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쿠리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케인이 창을 던지는 것을 보자마자 나쿠리는 신호를 보냈고, 슬링트루퍼들은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회색과 녹색 전투기에 광자탄이 빗발쳤다. 첫 번째 기체는 그 자리에서 집중포화를 받아 산산이 부서진 채로 추락했다. 드라이브 코어가 폭발하면서 조각난 기체 파편들이 불덩이처럼 이곳저곳으로 튀어 나갔다. 케인은 무릎을 굽힌 자세를 역이용하여 뛰어올랐다. 요동치는 붉은색 전투기는 그의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게 떠 있었고, 그는 오른쪽 날개를 뛰어넘었다. 전투기가 빙빙 돌자 조종사가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왼쪽 날개 끝이 지면에 부딪히며 사방에 자갈을 흩날렸고, 추력 장치는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거센 먼지를 일으켰다. 불안정한 기체에 올라탄 케인은 열려 있는 조종실에 접근했다. 자고는 그 자리에 고정되어, 먼 곳을 응시한 채 기체가 덜컥거릴 때마다 함께 들썩일 뿐이었다. 조종사는 조종 장치와 씨름하느라 바빠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쿠리의 슬링트루퍼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부었지만, 녹색 전투기는 제압하기 어려웠다. 광자 에너지를 흡수하는 특수 차폐막 때문이었다. 작은 빛들이 깜빡이더니 기체 앞쪽에서 끈적이는 뿌연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 날카로운 굉음이 나면서 무기 포드가 열렸고, 연쇄 폭발이 슬링트루퍼들의 진형을 덮쳤다. 나쿠리가 즉시 흩어지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부하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산화해 버렸다. 고도를 높인 전투기는 달아나는 슬링트루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상사격은 무방비 상태인 항공기를 상대할 때만 효과가 있었다. 기습 공격의 이점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케인은 한 손으로 좌석에 앉은 조종사를 잡고 밖으로 내던졌다. 왼쪽 날개에 부딪혀 튀어 오른 그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케인은 조종실의 덮개를 붙잡고 조종석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안정장치 제어기가 완전히 망가졌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던진 창이 일부 주요 시스템까지 꿰뚫었던 것이다. 케인은 추진기와 정지해 버린 엔진 포트를 빠르게 조정한 후 조종실 덮개를 열어둔 채로 전투기를 전진시켰다. 전투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낮게 털털거리며 앞으로 움직였다. 녹색 전투기는 산비탈에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주무장 포드를 열고 산 전체를 날려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종 레버를 끌어당기던 케인은 전투기의 사격 통제 시스템을 작동하여 주포를 장전하고 눈앞의 녹색 전투기를 조준했다. 그는 전투기를 향해 광자포를 퍼부었다. 그 반동으로 불안정한 기체가 거칠게 요동쳤다. 술에 취한 것처럼 휘청이며 제 위치를 벗어났고, 마지막 포격은 궤적을 크게 벗어나 예광탄처럼 산 너머의 하늘을 밝혔다. 하지만 첫 번째 포격은 명중했다. 녹색 전투기는 먼저 후미를, 다음에는 엔진 하나를 잃었다. 조종사는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후미가 폭발하자 결국 기체 전체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기체가 상승하며 엄청난 화염과 파편들이 솟구쳤고, 곧이어 곤두박질치다 땅에 처박혔다. 그 폭발로 모래 위에 충격파가 발생하자 열기에 녹아내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케인은 타고 있던 전투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고도를 유지하느라 사투를 벌였다. 제어판에 오작동 경고들이 한꺼번에 울렸다. 하나씩 전력을 차단하며 기체를 진정시켰고, 전투기는 결국 튀어 오르다가 한쪽 날개를 모래에 파묻으며 주욱 미끄러졌다. 케인은 모든 전력을 차단했다. 모래가 튀어 오르며 방풍창과 기체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케인은 조종석에서 몸을 일으켜 자고의 놀란 표정을 마지막으로 한번 흘겨본 후,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케인이 걸어가는 동안 기체 내부에서 무언가가 발화되었고 곧 큰 불길이 치솟았다. 한 남자를 품고 타오르는 붉은색 전투기를 뒤로한 채 케인은 나쿠리에게 다가갔다. 나쿠리는 슬링트루퍼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리고는 충격과 감탄이 뒤섞인 눈빛으로 케인을 쳐다보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글쎄.” 케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군.” 죄수들을 가둬 놓은 동굴 너머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가로만 30미터에 달하는 이 거친 수직 통로는 깊이가 수백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케인은 가장자리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엄청난 범위의 암반이... ‘무언가’에 의해 뜯겨나간 채였다. 아르마다 슬링 전함의 주포로도 행성의 표면을 이렇게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사라진 부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예 없애버린 건가? “저 아래야.” 나쿠리가 말했다. 케인은 수직 통로 안쪽 벽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열기로 인해 생성된 것처럼 보였다. 튀어나온 바위는 윤이 나는 분홍색이었고, 잘 닦인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위쪽 표면에는 두꺼운 모래층이 덮여 있었다. 이 구멍은 오래전에, 어쩌면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불현듯, 케인의 머릿속에 뜨거운 금속 덩어리가 빙하에 떨어져 순식간에 얼음을 녹이며 깊은 구멍을 만들고, 금속이 지나간 자리가 다시 얼어붙어 반짝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암반에 구멍을 낼 수 있을까? 케인은 내려가면서 인터페이스로 탐사 스캔을 작동했다. 뒤따르던 나쿠리는 케인이 놀라서 한숨을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 그가 말했다. “이 결과가 정확한 건가?” 케인이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아.” “이건… 말이 안 돼.” 케인은 말하며 인터페이스의 스캔을 다시 작동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이건 마치...” 케인은 쉽게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양자의 흔적은 기묘했다. 마치 다른 현실, 다른 공간 차원의 일부가 이 아이오난의 산과 순간적으로 교차하여 이곳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텅 빈 상처를 남겨둔 것 같았다. 미지의 무언가에 의해 찢겨나간 상처 말이다. “내가 왜 오디널을 찾았는지 알겠지?” 나쿠리가 물었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추측하는 중이었다. ‘공간 간 충돌의 결과였을까? 양자 이상 현상? 계획 아니면 우연? 이런 현상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아니면 슬링 드라이브 실패로 일어나는 희소하고 비극적인 결과일 것이다. 이것은 다중 우주 명제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나쿠리가 옳았다. 이것은 오디널이 ‘해야 할’ 일이었고, 이미 높아진 케인의 직위도 크게 오를 것이었다.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데막시아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정말로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일이었다. 케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자 오디널의 의무였다. 정보를 평가하고, 분석하고, 수집하는 모든 업무는 제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공적을 세운 자의 이름을... 새로운 생각이 케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야망 어린 생각이 그를 방해했다. 조사 진행 계획을 세우려면 나쿠리와 의논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혼자 진행하고 싶었다. 아무도, 심지어 나쿠리조차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럴 만한 자격이— 케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신디케이트, 기사단... 모두가 이곳으로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엄청난 선물이었다. 다만... “...그들은 어떻게 알았지?” 케인이 질문했다. “뭐라고?” “난 네가 불러서 이곳에 왔어. 넌 기사단을 쫓다가 왔고. 그러면 기사단은 어떻게 오게 된 걸까?” “기사단도 알고 있었다고…?” 나쿠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누가 알려준 건데?” “비밀 거래, 금기시된 설화... 죄다 말이 안 돼. 아니면 전설이나 신화라든가... 모르겠어, 보물 지도라도 있는 건가?” 이 말은 케인의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혹시, 만약, 누군가가 과거에 이곳을 발견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신성한 장소나 성지가 되었거나,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거나, 누군가를 황제로 추대했거나... 새로운 제국의 초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기사단이 이곳에 온 것은 그저... 본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신디케이트는?” 케인이 나쿠리에게 물었다. “신디케이트가 왜?” 케인은 생각했다. 자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추잡한 기회주의자는 기사단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자고가 여기 온 이유는 이것이었다. 게다가 자고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대제국군과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말이다. 그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고 드넓은 우주를 가로질러 이 변두리까지 왔다. 케인의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마지막 몇 미터를 더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구덩이 바닥에 뭔가가 있었다. 마치 바닥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이건 도대체...” “우린 저게 원인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쿠리가 말했다. “이곳에 떨어져 구멍을 만든 거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혹시 건드렸나?” 케인이 물었다. “아니, 아무도. 그럴 엄두도 못 냈지.” 케인은 쭈그려 앉았다. 그 물체는 얕은 암석 단층에 묻힌 시커먼 화석처럼 보였다. 상상할 수도 없는 머나먼 고대에 묻혔던 뼈가 막 빛을 받아 드러난 것 같았다. 케인은 살짝 휘어진, 아름답게 장식된 긴 손잡이를 분간할 수 있었다. 머리에 달린 것은 거대한 날이었다. 인터페이스가 식별할 수 없는 미지의 금속으로 벼려진 손잡이와 날은 분명히 인간형 종족에 맞춰진 비율이었다. 낫이었다. 무기 말이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문명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굉장한 유물이었다. 케인은 극도의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어떻게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케인이 나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쿠리가 대답했다. 케인이 인터페이스를 건드려 보았지만 먹통이었다. “너무 깊이 들어왔나 보군.” 나쿠리가 말했다. “이곳의 뭔가가 통신을 방해하고 있어.” “올라가.” 케인이 말했다. “‘프랙털 쉬어’에 신호를 보내서 과학팀에게 탐지 장비를 모두 챙겨 모이라고 해. 두 시간 내로 이곳에 데려와. 여길 샅샅이 분석해서 마지막 정보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뽑아낸다.” 나쿠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너 변했구나.” “무슨 의미지?” “이제 오디널 다 됐군. 네 말투—” 케인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신디케이트 앞에서 한 행동은 뭐였는데? 덕분에 난 부하 네 명을 잃었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네 명이 네 허세 때문에 죽었다고.” “복잡한 상황이었잖아.” “본대에 요청해 싹 쓸어 버릴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넌 네 오만함에 취해 있었지. 오디널 각하.” “결국 필요한 정보를 얻었어.” 케인이 말했다. “그리고 네 명이 죽었지.” “사령관, 가서 함선에 신호를 보내.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나쿠리는 머뭇거렸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그래, 내가 널 부른 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내 권한 밖이니까. 그러자 네 생각이 나더군. 너라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 같았지. 네겐 자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격’이라고?” “이걸 차지할 자격 말이야! 나? 난 아니야, 난 그럴 만한 자격이…” 나쿠리는 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 그게 제국을 위한, 내 친구를 위한 도리인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 확실해졌군. 네가 어떤 존재인지. 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버렸으니까.” 죽여 버려. 케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우리뿐인가?” 케인이 속삭였다. “뭐라고?” 분노한 나쿠리가 되물었다. “사령관, 이곳에 보초를 배치했나?” “아니.” “그렇다면 방금 말한 건 누구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 나쿠리는 딱딱하게 내뱉었다. “도대체 왜 그래? 이젠 나도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가서 함선에 신호를 보내. 지금 당장. 끝나는 대로 돌아와서 보고하도록.” 나쿠리는 케인을 한번 노려보곤, 돌아서서 구덩이를 기어올랐다. 케인은 바닥에 박힌 무기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방금 말한 거, 너지?” 케인이 질문했다. 너도 알지 않나. 내가 부르면 누군가가 듣고 오지. 나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 “다들 자격 타령이군. 그래서 누가 자격이 있는데? 무슨 자격?” 날 소유할 자격이다. 누군가가 그 자신을 증명하면, 난 그자가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게 되지. 어쩌면 그게 그대일지도. “난 네가 누군지도 몰라.” 나에 대해선 알 필요 없다. 내가 그대에 대해 알아야 하지. 나는 단 한 명의 적격자를 찾을 때까지 부를 것이다. 내가 부름을 멈출 때는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을 때다. “난 제국의 오디널...” 난 그대가 무엇이든 상관 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대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대의 야망. 그대의 꿈. 그대의 능력. 우주에 대한, 우주의 본분에 대한 그대의 생각. “난 오디널이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거든.” 케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내겐 해야 될 일이 있어. 임무 말이지.” 못마땅한 임무, 갈수록 더 불만스러워질 임무 말이군. 그 남자를 향한 충성심은 약해지고 있다. 네가 생각하는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것은 소심한 행동이지. 아무도 네 생각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려 하지 않으니 날이 갈수록 좌절감은 커지겠지. 아무도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까. “내 의무는 데막시아 제국을 위해 이 장소를 확보하는 거다. 지금 골동품 무기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군. 양자 변이에 노출된 게 분명해. 이건 내 마음속이고, 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환각이라는 말인가? “이곳은 이례적으로 뛰어난 과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넌 이곳의 중요한 유물이고. 난... 이곳에 있는 외계의 흔적이 만들어 낸 에너지 때문에 환청을 듣고 있는 게 분명해. 게다가—” 나쿠리가 사라진 지 꽤 오래 지나지 않았나? 케인은 벌떡 일어나 인터페이스의 크로노미터를 확인했다. 나쿠리가 나간 후로 대략 한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이라고?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흐를 수 있지...? 시간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환상이지. “내게 ‘자격’이 있다면 말이지?” 케인은 말을 내뱉고는 돌아서서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무시한 채.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쿠리?”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신디케이트 놈들인가? 자고의 부하들인가? 그랬다면 케인이 총성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케인은 권총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죄수들은 여전히 침묵 속에서 두려워하며 동굴 안에 있었다. “병사들은 어디로 갔지?” 그들은 케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케인은 소나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무엇이 너희를 이곳으로 불렀는지 보았다. 난 그걸 직접 봤어. 아는 걸 털어놔라.” 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나,” 케인이 불렀다. “말해, 어서.” 그녀는 케인을 올려다보았다. 케인은 권총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녀를 죽이지 마라. 그러기엔 너무 귀중한 존재거든. 아직도 모르는 건가? 네겐 그녀가 필요하게 될 거다. 케인은 다시 소나를 밀치고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슬링트루퍼의 칼날이 케인의 목을 향해 스쳤다. 케인은 급히 몸을 낮춰 칼을 흘려보낸 후 탄환 두 발을 발사해 그를 쓰러뜨렸다. 리고. 나쿠리의 부하 중 하나다. 괜찮은 남자였다. 단 한 녀석도 쓸모가 없군. 넌 어떨까? 슬링트루퍼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광자 폭발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환히 밝혔다. 케인은 대응 사격하며 두 명을 더 쓰러뜨리고, 돌려차기로 한 명을 막아냈다. 슬링트루퍼가 금이 간 헬멧을 붙잡고 비틀거리자 케인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공격했다. 케인은 몸을 휙 돌렸다. 칼자루를 올려쳐 뒤에 있는 슬링트루퍼를 가격했다. ‘방향 전환’. 칼자루로 뒤를 덮치려던 대원의 복부를 공격했다. ‘회전’. 칼날로 그를 베었다. 누군가가 케인을 향해 총을 쐈다. 광자 탄환이었다. ‘방어, 방어, 방어’. 칼이 케인의 손안에서 빙빙 돌았다. 티타늄 도금이 탄환의 힘을 흡수하며 튕겨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케인이 고함을 질렀다. “네겐 자격이 없어!” 외침이 되돌아왔다. “네 것이 되어선 안 돼!” 나쿠리였다. 케인은 앞쪽으로 뛰어들었다. 달려드는 슬링트루퍼의 다리를 걷어찬 다음,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베키드가 측면에서 돌진했다. 그녀는 육중한 갑옷과 강화된 신체 능력으로 무장한 분대장이었다. 베키드가 주먹을 휘두르자 케인은 막으려고 했지만, 칼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케인은 이를 드러내며 뒤로 한발 물러서 다음 공격을 피한 후, 베키드에게 뛰어들어 부러진 날로 공격했다. 이번엔 스픽스가 달려들었다. 케인은 주먹으로 그의 코뼈를 가격했다. “부하들을 물러서게 해, 나쿠리!” 케인은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를 향해 걸으며 외쳤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건 시험이다. “나쿠리! 우린 친구잖아! 이건 네가 아니야!” “아니!”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나야 ‘진짜’ 나라고! 처음으로 드러내는 내 모습이지! 난 모든 걸 봤어!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도!” “나쿠리!” 육중한 주먹이 뒤에서 케인의 목을 졸랐다. 목이 조이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나쿠리의 말이 맞아.” 솔리파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그저 벼락출세한 애송이에 불과해, 케인! 그러니 보잘것없는 너 자신으로 만족해라! 이건 네 것이 아니야! 넌 자격이 없어!” 케인은 힘을 주어 솔리파스를 바닥에 세게 메쳤다. 케인이 물었다. “그래, 다음은 너인가?” “그렇다!” 솔리파스는 벌떡 일어나 칼을 꺼내 들었다. “그건 날 선택했어! 내가 선택받은 자라고 했어! 내가 똑똑히 들었어!” 섬광과 함께 솔리파스가 쓰러졌다. “거짓말이야.” 콜라가 말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권총으로 쓰러진 솔리파스를 겨눴다. “그건 나였어! 내 이름을 불렀다고!”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군.” 케인이 말했다. 콜라가 잽싸게 몸을 돌려 케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우리 모두야, 콜라. 우리 모두. 우리 머릿속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거짓말하지 않아.” 콜라가 말했다. “나한테는 말이야!”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몰라. 총을 내려놔.” 콜라가 으르렁거렸다. “난 뭔지 알아. 그건 내 진짜 모습을 찾게 해줘. 난 똑똑히 봤어. 그건 날 소유하고, 날 완벽하게 만들어줘. 옳고 그름을 깨닫게 해주고 누굴 믿어야 하는지,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그렇지 않아.” 케인이 말했다. “맞아! 내게 말했어! 내가 선택받은 자라고 말했어!” 콜라는 총을 발사했지만, 케인은 이미 움직인 뒤였다. 탄환은 허리춤을 스쳤고 케인은 아래로 파고들어 그의 팔을 후려쳤다. 콜라는 무릎을 꿇으며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케인이 권총을 낚아챘다. “그렇게 말했다고...” 그가 훌쩍였다. 케인은 콜라를 지나쳐 가려고 했지만, 그는 케인의 다리를 붙잡았다. 케인은 탄환 한 발로 그를 고통에서 해방해 주었다. 케인은 동굴 입구에 도달했다. “나쿠리?” 나쿠리는 손에 창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탓이야.” 나쿠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주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 널 부르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 자신이 없었던 거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뭘?” “그에 걸맞은 존재가 되는 것 말이지.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그건 너 같은 놈들을 원하지 않아. 넌 자격이 없어. 하지만 나 같은 베테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난 그것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나쿠리,” 케인이 말했다. “창을 주고 물러서.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하더군.” “우린 지금 모두 공간 간의...” “아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네가 도착하고 나서 이 모든 게 시작됐어. 난 여기 며칠이나 있었다고!” “그래, 놈이 나를 원하기 때문이야.” 케인이 말했다. “그건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지금 날 시험하고 있는 거야.” “널 시험해?” “내가 놈이 필요로 하는 만큼 무자비한지 보려는 거지. 그리고... 나쿠리... 넌 내 친구야. 넌 이용당하고 있어. 창을 이리 줘. 우리가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아니! 날 시험하고 있는 거야. 그놈이 원하는 건 네가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친구?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어? 네가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아? 선택받은 자? 자격을 가진 자? 그래, 그게 너지. 오만한 자식! 잘난 척 그만해!” 나쿠리는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케인은 연속해서 총을 발포했다. 하지만 창이 회전하면서 탄환을 쳐냈고, 탄환은 동굴 벽으로 튕겨 나갔다. 두 발짝 더 내딛자, 회전하는 창날이 광자 권총의 총열을 잘라냈다. 케인은 뒤로 재주를 넘으며 물러섰다. 창날이 케인이 서 있었던 바닥을 스쳐 갔다. 그 순간 케인은 나쿠리를 향해 몸을 던져 복부에 주먹을 날리고 목을 강타했다. 나쿠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뒤이어 케인이 그의 턱을 향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내가... 아니면...” 나쿠리는 쓰러진 채 쿨럭거렸다. “...너도 가질 수 없어... 다른 자들이... 올 거야...” “다른 자들? 그냥 가만히 있어. 의료 후송을 요청해야 해.” 놈을 죽여. “닥쳐.” 너 자신을 증명해라. 놈을 죽여. “닥치라고.” 케인은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햇빛이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 넌 선택해야 해. 그의 눈에 ‘젠틀 리마인더’가 보였다. 나쿠리가 호출한 것이다. 하늘을 뒤덮은 전함은 서쪽 6킬로미터 거리에서 산맥 바로 위로 낮게 접근 중이었다. 거대한 전함이었다. 지표 초토화를 위해 모든 포구가 열려 있었다. 전함에 탑승한 모두가 부름을 받고 오고 있었다. 자신이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들 각자가 모두 똑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케인은 통신창을 열었다. “‘프랙털 쉬어’, 바서르 함장과 연결해 줘.” “말씀하십시오, 각하.” “상황 발생이다, 함장. 1급 상황, 반란이다. 즉시 ‘젠틀 리마인더’를 조준해.” “각하?” “들은 대로다. 모든 포문을 열고 조준 포격해.” “각하, 그건 우리 제국의...” “명령대로 즉시 포격해. 오디널이 죽도록 내버려 둘 텐가. 당장 쏴. 1급 상황, 반란이다.” “알겠습니다. 엔진 가동. 현재 포격 거리 내로 접근 중. 8분 후에 도착합니다.” 너무 느려. 나쿠리의 함선은 그 이전에 널 없애버릴 거야. “너도 그렇게 되겠지.” 케인은 중얼거렸다. 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다. 네가 자격이 없다면 말이지... “주인이 나타나면 부름을 멈추는 건가?” 이미 말했을 텐데. 케인은 돌아서서 동굴 속으로 다시 달려 들어갔다. ‘젠틀 리마인더’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한 3분? 그는 수직 통로로 가서 광택이 나는 분홍색 암벽 아래로 급히 내려갔다. 두 번이나 떨어질 뻔했다. 그의 발아래로 돌들이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케인은 적당한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낫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음이 바뀌었나? 생각할 시간을 더 줄까? “시끄러워.” 케인은 낫을 손에 쥐었다. 낫은 쉽게 들렸다. 그의 손에 쥐어지자 ‘번쩍’하고 빛을 냈다. 날 아랫부분에서 한 개의 눈이 떠졌고, 분홍색 불꽃이 그의 망막을 태우고 그의 심장을 응시했다. 그는 적막을 보았다. 거대한 시간의 우물을 보았다. 순간이 늘어나 영원이 되는 것을 보았다. 끝없는 정적과 얼음장 같은 고요함을 보았다. 어두운 별들과 검은 태양들이 무한한 그림자의 공허 속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타락한 우주에 숨어있는 너무나도 거대한, 말 없는 신적인 존재들을 보았다. 그는 하나의 이름을 들었고, 한숨 쉬듯 숨을 내뱉었다. 라아스트. 그는 그것이 이제 자신의 이름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황제 폐하께서 보고를 듣고자 하실 겁니다.” 바서르 함장의 말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자세한 보고를 말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던 케인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문 너머 슬링스페이스의 쉿쉿거리는 불빛이 선실에 기이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 정리하는 중이다, 함장. 자세하고 정직하게 말이야. 하지만 아이오난에서 있었던 반란, 그리고 ‘젠틀 리마인더’의 파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서야. 이해하리라 믿는다.” “네, 각하.” 바서르가 말했다. “다른 사항은?” 바서르는 고개를 저었다. “명령대로 로커스 아르마다로 귀환 중입니다. 최대 슬링스피드입니다.” “죄수들은?” “무사히 생포했습니다. 도착하면 바로 심문소로 이송될 예정입니다. 분명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 구역에서 벌어지는 기사단 활동에 대한 유용한 정보 말이죠.” “특히 그 여자를 신경 써서 관리하도록 해.” 케인이 대답했다. “소나라는 여자 말이야. 그 여자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그 여자는 분명 특별한 가치가 있어.” “네, 각하.” 바서르는 경례를 하고 케인의 선실을 나갔다. 뭐라고 말할 건가?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좋아. “넌 나한테 뭘 말해줄 거지?” 모든 걸. “좋아. 그럼 원하는 게 뭔가?” 음, 그건... 아니, 말해 주지. 어떤 관계에서나 신뢰는 필수니까, 케인. 내가 원하는 건... 케인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했다. 더 이상 인간의 움직임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키일로의 도끼가 비어 있는 창가 의자를 쪼개버렸다. 순간 낫이 번뜩였다. 오래되고 낡아빠진 전투병기가 반으로 잘려 바닥에 나뒹굴며 지직거리고 꿈틀거렸다. 키일로의 광학 장치가 빛을 잃었다. 케인이 말했다. “이게 기습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