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퀸과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 케일럽은 데마시아 북동쪽에 위치한 구석진 산골 마을 유웬데일에서 태어났다. 유웬데일은 사냥과 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마을이었다. 마을을 보호하는 기동대원들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먹잇감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오는 괴물들을 처치하곤 했다. 쌍둥이의 어린 시절, 자르반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둘러보던 중 유웬데일을 방문했다. 퀸과 케일럽은 기사들이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따르는 왕의 행차를 구경하게 되어 신이 났다. 마을에서 무기를 만들던 퀸과 케일럽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후에 영토 지키기 놀이를 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놀 간단한 무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되었다. 퀸과 케일럽은 자라며 거의 모든 시간을 마을 기동대원 중 하나였던 어머니와 함께 야외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황야에서 살아남는 법과 숲속 괴물을 쫓는 방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이 흘러 퀸과 케일럽은 가공할 만한 한 쌍으로 성장했다. 적의 발자취를 찾는 퀸의 예리한 감각과 적을 유인하는 케일럽의 기술, 퀸의 화살 조준 실력, 사냥용 창을 다루는 케일럽의 기량은 둘이 하나가 될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의 탐험은 비극으로 끝났다. 유웬데일의 기동대원이 된 퀸과 케일럽은 두꺼운 가죽과 기다란 뿔, 흉포한 성미를 지닌 커다란 상아뿔괴물을 잡기 위해 수도에서 온 귀족들을 지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괴물을 죽이지 못했고 상처 입은 괴물은 그들을 공격했다. 쌍둥이는 재빠르게 반격했다. 케일럽의 창이 괴물의 한쪽 눈을 찔렀고 퀸은 화살로 괴물을 몰아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괴물의 날카로운 뿔이 케일럽을 들이받았다. 귀족들을 이끌던 바렛 부벨르 경은 케일럽이 쓰러진 곳에 그를 묻을 수 있도록 퀸을 도왔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케일럽의 죽음으로 퀸이 비탄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퀸은 동생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 기동대원으로서 느꼈던 즐거움은 희미해졌다. 실력은 점점 약해졌고 실수마저 하기 시작했다. 눈에 쉽게 띄는 적의 발자국을 지나치기 일쑤였고, 화살은 목표물을 빗나갔다. 몇 달 후 레스타라 부벨르 부인이 퀸의 가족을 찾아왔다. 부인은 퀸이 자신의 남편을 구해 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보답을 하면 좋을지 물었다.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퀸은 부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케일럽이 세상을 떠난 지 딱 일 년 되던 날에도 퀸은 여느 때처럼 산에 올랐다. 슬픔에 잠긴 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아뿔괴물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괴물의 한쪽 눈에는 케일럽이 남긴 상흔이 남아 있었다. 상아뿔괴물이 퀸에게 달려들었다. 퀸은 괴물을 겨냥해 계속해서 화살을 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새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오래전에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푸른날개수리였다. 푸른날개수리는 뾰족한 발톱과 부리를 이용해 괴물의 머리를 공격했지만 괴물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뿔로 새의 날개를 들이받았다. 괴물이 다시 달려들자 퀸은 마지막 남은 화살을 꺼내 활을 당겼다. 퀸의 마지막 화살은 명중했다. 괴물의 입속으로 날아간 화살은 단번에 괴물의 목숨을 끊었다. 푸른날개수리는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포악하고 길들일 수 없는 맹금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퀸은 푸른날개수리의 눈을 바라보며 그 눈빛에서 혈육의 유대감을 느꼈다. 퀸은 상처 입은 새의 부러진 날개에 붕대를 감아 주고 새와 함께 유웬데일로 돌아갔다. 퀸은 새에게 발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발러와 유대감이 생기자 퀸의 마음속에는 다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데마시아를 위해 싸우고 싶다는 의지도 다시 생겨났다. 퀸의 어머니는 그러려면 후원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으로는 퀸을 지원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퀸에게 보답하겠다고 했던 부벨르 부인을 찾아 수도로 가 보라고 조언했다. 퀸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기사가 쓸 만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 한 번만 활시위를 당겨도 여러 발의 볼트를 발사할 수 있는 정교한 연발 석궁이었다. 퀸과 발러는 위대한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부벨르 부인은 대원수 티아나 크라운가드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며 기꺼이 퀸을 위해 보증을 섰다. 일주일도 안 되어 퀸은 데마시아의 기동대 기사가 되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유웬데일 기동대원들의 명예를 드높인 퀸은 성곽 안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고 성벽을 벗어나 황야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다. 퀸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그들이 전장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만 따졌다. 퀸은 군대의 위계질서와는 동떨어져 있던 것이다. 퀸과 발러는 데마시아에서 복무하며 얼음의 땅 프렐요드와 녹서스 영토까지 곳곳을 모험했다. 임무를 떠날 때마다 퀸과 발러의 특별한 유대감은 향후 수 세기 동안 왕국의 경계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이바지했다. |
2. 생존의 법칙
퀸은 녹서스 병사들이 숲속 빈터에서 불을 피우고 포도주 두 부대를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 술에 취한 병사들의 행동을 예측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퀸은 그들이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그러나 난폭해지지는 않을 만큼 취해있기를 바랐다. 황야에서는 실수 한 번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들은 방금 큰 실수를 두 번이나 저질렀다. 불을 피움으로써 그들이 방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아무도 자신들을 추격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드러냈다. 법칙 1: 언제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라. 퀸은 진흙탕 바닥에 엎드린 채 팔꿈치를 이용해 몸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내며 썩은 통나무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숲 전체가 진흙탕이었다. 옷에 붙은 벌레들을 다 떼어내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릴 터였다. 법칙 2:품위는 결코 생존에 우선할 수 없다.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퀸은 녹서스 병사들이 피운 모닥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침착하게 그들의 머릿수를 세어 보았다. 여섯 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섯밖에 없었다. 한 명은 어디 간 거지? 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멈췄다. 목덜미 털이 뻣뻣하게 곤두섰기 때문이었다. 조심하라는 하늘의 경고였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나무 뒤로 뭔가 휙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전사가 분명했다. 기름을 먹인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움직임이 노련했다. 그는 철사를 단단하게 감은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잠시 멈춰서 캄캄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퀸을 봤을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이, 버딘.”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병사 중 하나가 외쳤다. “포도주 맛보려면 빨리 오는 게 좋을걸. 올메도가 다 마셔 버릴 기세야!” 법칙 3: 침묵 을 지켜라. 버딘이라는 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퀸은 불만에 가득 찬 그의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조용히 좀 해.”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녹서스에서도 들렸겠다.” “아이고, 여긴 아무도 없어, 버딘. 데마시아 군인들은 갑옷을 입고 윤을 내느라 우릴 쫓아올 겨를도 없을걸. 진정하고 술이나 마셔!” 그는 한숨을 쉬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퀸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자는 동료들보다는 좀 나았지만 그곳에 자기들만 있다고 믿는 건 매한가지였다. 법칙 4: 멍청한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형체의 독수리가 비구름을 등지고 있었다. 퀸의 동반자인 발러는 날개를 아래로 내렸고 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함께해온 그들은 이제 아무 말 없이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퀸은 오른 주먹으로 원을 그린 다음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퀸은 발러가 그녀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칙 5: 때가 오면 단호하게 행동하라. 퀸은 저들을 소리소문없이 제거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데마시아 영토 한가운데까지 버젓이 쳐들어온 녹서스 병사들의 뻔뻔함에 분통이 터졌다. 퀸은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데마시아는 녹서스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쳐부술 수 있는 원시 부족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단단히 일러주고 싶었다. 퀸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마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모닥불 옆에 멈춰섰다. 퀸은 기름을 먹인 가죽 망토에 달린 모자를 뒤로 젖히고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훔쳐간 물건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지.” 퀸은 데마시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검이 새겨진 가죽 가방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녹서스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주변을 살피더니 검을 꺼내려고 손을 더듬거렸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에 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조금 전 퀸이 있던 곳 근처까지 왔던 전사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이들만큼 허둥대지는 않았다. 퀸이 데마시아 군대의 지원 없이 혼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먼 길을 왔군, 아가씨.” 그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먼 길 온 건 너겠지, 버딘.” 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얼굴을 구기며 한발 물러섰다. 퀸은 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았는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으리라. 녹서스 병사들이 흩어져 퀸을 둘러싸자 퀸은 다시 한번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가방 내놓으시지.” 같은 말 반복하기 성가시다는 어조로 퀸이 말했다. “잡아!” 버딘이 다른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그것이 버딘이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퀸은 망토를 어깨 뒤로 넘기고 왼팔을 뻗었다. 그녀의 연발 석궁에서 나온 검은 화살이 버딘에게 적중하자 그는 외마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두 번째 화살은 그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남은 네 명의 병사가 퀸에게 달려들었다. 발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맑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처럼 쏜살같이 날아 내려왔다. 그가 날개를 넓게 펴고 호를 그리며 급강하하자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발러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녹서스 병사 한 명의 얼굴을 덮쳤고, 뾰족한 부리로 그 옆에 있던 병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세 번째 병사는 용케도 무기를 잡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발러가 발톱으로 그의 어깨를 눌러 땅에 처박아 버렸다. 부리로 그의 목을 공격하자 그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다. 마지막 남은 병사는 돌아서서 나무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법칙6: 싸워야 할 대상은 신속하게 죽여라. 퀸은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서 석궁으로 두 발의 활을 쐈다. 화살은 도망가던 병사의 등에 박혔다. 그는 가까스로 나무에 도착했지만 이내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퀸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황야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적군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밤 숲에서 흔히 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퀸이 일어서자 발러가 그녀에게로 날아왔다. 발러의 발톱에는 녹서스 병사들이 훔쳐갔던 데마시아 군의 공문서 가방이 들려 있었다. 발러가 가방을 떨어뜨리자 퀸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가방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발러는 퀸의 팔 위에 앉았다. 사냥에 성공한 흥분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듯했다. 발톱과 부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발러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승리의 기쁨에 젖은 발러의 금빛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발러와의 강한 유대감으로 이미 발러의 마음을 읽은 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게 궁금했어.” 퀸이 말했다. “대체 그 녹서스 놈들이 어떻게 데마시아까지 온 거지?” 발러가 끼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퀸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퀸이 말했다. “남쪽으로 왔겠지.” 법칙 7: 동반자를 신뢰 하라. |
3. 추모패
퀸은 숲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고 민첩하게 이동했다. 태양이 동쪽 산봉우리에서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빛은 차갑고 창백했으며 모든 사물 위에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퀸이 조용히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공기에 김이 서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은 이불처럼 동쪽 산맥의 작은 봉우리를 덮고 있었다. 양치류와 담쟁이덩굴은 이끼로 뒤덮인 바위와 썩어 가는 나무, 얽힌 나무뿌리를 뒤덮고 있었지만 퀸은 어느 곳보다도 더 편한 기분이었다. 험한 길에도 이동 속도가 줄지 않았다. 퀸에게 훈련을 받은 데마시아의 기동대원 중에서도 퀸을 쫓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퀸이 우측에서 움직임을 감지하고서는 덤불 속으로 뛰어든 후 꼼짝 않고 있었다. 퀸의 눈은 또렷하고 한 번도 깜박이지 않았으며 강렬했고 모든 것을 포착해 냈다. 퀸은 열 번 정도 호흡하며 가만히 있었지만 덤불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퀸이 또 한 번 움직임을 감지하고 경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몸집이 크고 양팔을 벌린 너비만큼 큰 뿔을 가진 큰뿔 수사슴이었다. 수사슴은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은색으로 털빛을 바꾸고 있었다. 큰뿔 수사슴을 마주치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었다. 퀸은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데마시아에는 좋은 징조가 몹시 절박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퀸은 데마시아 북부 황무지에서 11대대를 도와 반역을 저지른 마법사들을 추적했다. 마법사들은 왕을 시해한 드레그본 출신의 사일러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과감한 움직임을 보였다. 퀸의 기동대원 수가 적기도 했지만 맞서 싸우지 않는 적을 쫓는 것 역시 11대대의 강점이 아니었다. 전투와 접전이 이어졌지만 연기를 손에 쥐려고 하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퀸은 최근 몇 주 동안 세 명의 기동대원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은 퀸을 무겁게 짓눌렀다. 퀸은 마법사들을 쫓는 것을 그만두고 가렌 크라운가드를 호위하여 불굴의 선봉대와 함께 데마시아 국경 너머로 외교 사절단 임무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못마땅했다. 사흘 뒤에는 푸른 송곳니 산맥 남쪽에서 그들과 만나야 했다. 퀸은 차라리 임무를 자신의 수하 중 한 명인 엘름하트에게 넘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일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빠른날개가 전달한 영장에는 정확히 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장에 찍힌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의 인장은 명령 불복종을 용납하지 않았다. 퀸은 커다란 수사슴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큰뿔 수사슴도 퀸을 쳐다보았다. 수사슴은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서 있었다. "명예와 존경을 표한다." 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푸른 송곳니 산맥까지는 긴 여정이었지만 하늘은 맑았다. 퀸은 예정보다 빠르게 예정된 장소에 도착할 것이라 확신했다. 마침내 태양이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자 황금빛이 나무가 우거진 숲을 뚫고 바닥까지 비추었다. 바람이 바뀌며 멀리서 친숙한 냄새가 실려 왔다. 연기였다. 울부짖는 소리가 아침 공기를 타고 선명히 들려왔다. 퀸은 숲의 지붕 위에서 거대한 전나무 나뭇가지 사이를 날고 있는 발러를 쳐다보았다. "뭐가 보이지, 발러?" 퀸이 숨을 내뱉었다. 발러는 원을 두 번 그리며 날더니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쏜 불타는 푸른 화살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퀸도 지체하지 않고 발러를 따라갔다. 잠시 후 퀸은 나무 사이의 틈으로 계곡을 드러내고 있는 산마루 위에 섰다. 계곡은 부분적으로 정리된 상태였고 돌담으로 구분된 들판에는 흩어진 가축들이 보였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평화롭고 그림 같은 광경이었겠지만 퀸의 시선은 오두막의 검은 형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이끌렸다. 퀸의 표정이 굳어졌다. 퀸은 가파른 경사를 조심히 걸어 계곡으로 내려갔다. 퀸은 경계하며 연기가 나는 오두막을 배회했다. 이런 식으로 불을 피워 무고한 대상을 꾀어내는 강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퀸은 함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가가기로 했다. 퀸은 손에 연발 석궁을 쥐고 볼트를 장전했다. 연발 석궁은 공들여 제작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무기였다. 기존의 무거운 석궁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한 손으로 들 수 있어 이동 중에도 사용할 수 있고 볼트를 발사한 후에 재장전을 할 필요도 없어 퀸에게는 천금 같은 무기였다. 퀸이 땅에 있는 자국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 이틀 전 오두막 근처에서 엄청난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이곳에 퀸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퀸은 석궁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오두막은 허름했지만 신경 써서 지은 티가 났다. 퀸은 경첩이 떨어져 나간 채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문턱을 넘었다. 불에 그을린 나무 식탁 위에 시든 들꽃 한 움큼이 담긴 단순한 도자기 병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타 버리고 얼마 남지 않은 커튼 조각은 창틀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커튼은 닫혀 있었고 덧문 또한 닫혀 있었다. 불은 밤에 시작된 것이다. 퀸은 견고한 떡갈나무 문틀에 새겨진 작은 표시를 발견했다. 표시를 보니 오래전 부모님이 자신과 케일럽이 자랄 때마다 키를 기록해 두던 일이 떠올랐다. 사냥 오두막이 아닌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표시였다. 의자와 수납장은 뒤집힌 채 부서져 있었다. 서랍은 박살 난 채 열려 있었고 서랍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값어치가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로 위의 벽에는 태양 빛에 바랜 상패의 윤곽이 보였다. 퀸이 돌아보자 타 버린 지붕 구멍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 빛에 잿더미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퀸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보았다. 동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난로와 검게 그을린 마룻장 사이에 박혀 있었다. 퀸은 석궁을 집어넣고 사냥용 칼의 끝으로 박힌 물건을 빼냈다. 벽에서 떨어져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다. 퀸도 불의 열기로 마룻장이 비틀린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박혀 있던 물건이 빠져나왔다. 데마시아의 날개 달린 검 문장이 있는 손바닥 크기의 은제 상패였다. 상패 뒷면에는 '3대대 말락 혼브리지의 공을 치하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임무 수행 중 전사한 군인의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추모패였다. 퀸도 슬픔에 빠진 배우자와 부모들에게 추모패를 전달한 경험이 있었다. 이런 폐허에 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 퀸은 상패를 주머니에 넣은 후 계속해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침실로 보이는 곳은 심하게 타지 않았는데, 섬세하게 엮어 만든 화관이 침대 위 서까래에 걸려 있었다. 모서리에는 더 작은 어린이용 침대가 뒤집혀 있었다. 퀸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이용 침대가 있던 곳 마룻장에는 숯 자국이 있었다. 데마시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야만적인 문양이었다. 룬 위에는 뼈와 작은 조약돌이 의도된 형태로 놓여 있었는데 퀸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룬이었다. 기이하고 불쾌한 룬 문양을 보고 있던 퀸은 공중에서 발러가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를 내자 시선을 돌렸다. 퀸은 몸을 숙여 오두막의 큰 방으로 돌아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타 버린 창문 너머를 재빠르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망토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오두막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길고 옅은 회색의 사냥개가 남자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사냥개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남자는 개를 조용히 시켰다. 퀸은 소리 없이 그을린 현관문 뒤 그림자 아래 숨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와 눈에 띄지 않는 포식자의 시선을 느끼고 경직된 사슴처럼 얼어붙었다. "대장님?" 남자가 빈방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물었다. 퀸은 미소를 지었다. "누가 알려 줬지?"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돌아섰다. 야외에서 주로 생활하는 사람인 듯 그을린 얼굴과 제멋대로 난 짧은 수염이 눈에 띄었다. 문턱 밖에서는 사냥개가 반가운 듯 낑낑댔다. "푸른날개수리는 이제 보기 힘드니까요." 남자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지." "오랜만이에요, 대장님." 퀸은 오두막 밖에서 무릎을 꿇고 사냥개의 귀를 쓰다듬었다. 푸른 송곳니 순찰대원 달린과 그의 충견 릭비를 만나게 된 건 일 년 만이었다. 달린은 퀸에게 자신이 정찰한 내용을 보고했다. 퀸이 오기 한 시간 전 오두막에 도착한 달린은 오두막을 빠르게 훑어본 후 근처 주민들과 대화를 하고 왔다고 했다. "산에 사는 사람이 지난밤에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무리를 봤다고 했습니다. 계곡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요." 달린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만월이 아니었다면 아예 보지 못했을 겁니다. 약탈자 무리 같습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오두막에 불 지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텐데." 퀸이 살펴보며 말했다. 릭비는 등을 바닥에 대고 구르며 퀸을 열렬히 바라보았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자신들의 침입을 알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아니면 빠져나갈 동안 불을 피워 시선을 돌리려고 했을 수도 있고요." 달린은 자신의 어깨 너머를 보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누가 질투하는 것 같네요." 발러는 고목의 나뭇가지 위에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퀸을 바라보았다. "발러는 내가 자기를 제일 아낀다는 걸 알아." 퀸은 드러누운 릭비의 배를 열심히 긁어 주면서도 웃으며 발러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이 지역에서 강도가 많이 출몰했나?" 달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 사건 전까지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합니다. 다들 수도에서 퍼진 불안감 때문에 초조해하지만 병사들이 많이 보이니 산적들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죠. 대장님은 서부에서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때가 좋지 않았네요." "때가 좋지 않았지." 달린의 말에 동의하며 이를 악문 퀸은 화제를 전환했다. "병사의 아내와 자식이 이곳에 살았어.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달린은 퀸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벌써 알아내셨다니 놀랍군요. 여자의 이름은 아스타라고 합니다. 남편은 위대한 도시에서 마법사들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아스타는 딸과 함께 이곳에 살았죠." 달린은 오두막을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이곳을 둘러볼 때 혈흔은 찾지 못했는데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스타와 딸을 데리고 있을 만한 친구나 가족은 근처에 없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스타는 타지 출신이라 남들과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서부의 리서스 출신이었고요. 이 지역에는 연고가 없을 겁니다." "타지 출신이라고?" "동부 독립국 중 하나일 겁니다.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퀸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자리에서 돌아서며 생각을 하더니 다시 숲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숲 쪽으로 걸어가며 땅을 살펴보았다. "여기." 퀸이 멈춰 서며 말했다. 달린이 다가오자 퀸은 이리저리 겹친 발자국 여러 개를 가리켰다. "숲에서부터 이어진 발자국이 여기에서 멈췄어." 달린이 쭈그리고 앉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침입하기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이런 자국이 있더군요." 퀸은 달린이 가리킨 발자국을 배회하며 자신의 발자국과 섞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 발자국은 다른 발자국보다 얕아 보이는군. 아스타와 딸의 발자국이야." 퀸이 중얼거렸다. "제 생각에는 아스타가 약탈자들과 마주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자들이 오두막을 약탈한 후 태워 버린 거죠." 달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스타가 집으로 돌아간 발자국은 보지 못했는데..." "없을 거야." 퀸이 엄숙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아스타를 데리고 간 것 같아. 딸도 함께. 저기 보여? 어린아이의 발자국이 멈춰 있어. 누군가 아이를 들어 올린 거야." 퀸이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오두막에 접근하지 않았어. 오두막을 태운 자들은 다른 방향에서 온 거야. 공격하기 전에 두 무리로 나뉜 걸 수도 있지." 달린이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 중에 아스타가 좀 남다르다고... 마법사였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퀸은 어린이용 침대가 있던 마루에 그려진 룬을 떠올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법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미신 같아 보였다. 이런 일은 퀸이 잘 아는 분야가 아니었다. "마을 소문에 따르면 약탈자들이 사일러스의 동맹이었다고 합니다. 마법사들을 모으러 온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거고요. 그런데 오두막은 왜 태운 걸까요?" 퀸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복수일 수도 있지." 퀸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스타의 남편은 마법사들과 싸우다가 죽었잖아. 앙갚음하려고 찾아왔을지도 몰라." "아내와 딸까지 죽이러요?" 퀸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됐든 그들을 뒤쫓겠습니다. 최소한 반나절은 먼저 움직였겠지만 아이를 데리고 있다면 빨리 이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퀸은 태양을 보며 가렌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할지를 따져 보았다.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타라는 여자는 마법사와의 전쟁으로 과부가 되었고 납치된 것으로 보였다. 퀸은 양심상 이 일을 지나칠 수 없었다. "같이 가지. 세어 보니 적어도 다섯은 될 것 같더군.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이렇게 대장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출발하자. 그리고 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마." 따지고 보면 퀸은 기동대 기사로서 달린의 상관이 맞았다. 하지만 퀸은 항상 엄격한 위계질서와 존칭이 불편했다. "대장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달린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퀸이 불편해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와, 릭비! 가자!" 릭비는 달린 옆에서 혀를 늘어뜨리며 달렸다. 발러는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들의 머리 위를 낮게 날았다. 달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앞으로 날아간 발러는 나뭇가지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넓은 날개를 접었다. 발러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후 퀸과 달린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발러를 발견했다. 발러는 자신의 밑에서 달려가는 두 사람을 무료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시야에 벗어날 때 발러는 다시 비행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가 그들을 제쳤다. 냄새를 쫓는 릭비가 있기에 약탈자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스타를 데리고 있는 약탈자는 다섯 명이었는데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이동하기에 급급했다. 퀸과 달린은 북쪽 산등성이를 넘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 인근의 계곡 쪽으로 약탈자들을 쫓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발자국은 산에서부터 굽이치며 흐르는 차가운 시내를 따라 동쪽으로 이어졌다. 퀸과 달린은 몇 시간 동안 달리며 거리를 좁혀 갔다. 언덕을 오를수록 땅이 점점 가팔라졌다. 그들은 발자국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멈출 뿐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릭비는 두 사람이 멈출 때마다 냄새를 맡으며 신이 나서 앞뒤로 껑충껑충 뛰어다녔고 발러는 그런 릭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을 막 지날 무렵 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바위 옆 부드러운 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한 바위에서 장화로 긁힌 듯한 이끼 자국이 보였다. 퀸이 자국을 관찰하다 평평한 돌에서 무언가를 떼어 내 자세히 보았다. "여기에서 식사를 했군. 한 시간 정도 전인 것 같아. 조금 더 지났을 수도 있고." "많이 따라잡았네요." 달린이 앉아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릭비는 휴식을 취하며 근처 시내에서 물을 마셨고 발러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해가 질 때쯤이면 완전히 따라잡을 겁니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 그때쯤이면 국경을 넘을 거야." 퀸이 낙담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데마시아를 벗어나려는 걸까요?" 퀸은 어깨를 으쓱였다. 퀸은 가방에서 비스킷을 꺼내 반을 자른 후 달린에게 던졌다. 달린은 잽싸게 비스킷을 받아 감사의 인사로 묵례를 보냈다. 배급품은 맛이 없었다. 퀸은 차라리 톱밥이 더 맛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힘을 보충하려면 먹어 두어야 했다. 잠시 뒤 퀸은 비스킷을 하나 더 꺼내 릭비에게 던져 주었다. 릭비는 공중에서 비스킷을 낚아채 턱을 열심히 움직이며 순식간에 비스킷을 먹어 치웠다. "그럴 수도 있지. 숨으려는 거였으면 북쪽으로 가는 게 나았을 테니까. 틈과 협곡이 많으니 수색하려면 몇 주는 걸리겠지." 달린은 맛없는 비스킷을 꼭꼭 씹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국경은 남쪽으로 반나절은 가야 하는데요. 그곳을 통과할 길도 없고요. 왕이 시해된 이후 문이 폐쇄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쪽에는 절벽과 감시탑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퀸은 달린 옆에서 숨을 헐떡이는 릭비를 내려다보았다. "릭비, 네 주인이 계속 갈 수 있을 거 같아? 아니면 버리고 갈까?" 릭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의아한 듯이 퀸을 바라보았다. "재밌네요." 달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잠시 후 퀸과 달린은 절벽 위에 서서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멀찍한 곳에서 숲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첨탑이 보였다. "저기 있네요." 달린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무리가 첨탑 둘레를 따라 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개미만 한 크기로 보여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들이 퀸과 달린보다 먼저 국경에 이를 거라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저들을 앞지를 수 있다면 속도를 늦출 수 있어." "그럼 유일한 방법은..." 달린은 말끝을 흐렸다. 퀸은 살며시 웃으며 달린을 쳐다봤다. "역시." 퀸은 발러에게 매달려 공중을 날았다. 발러의 칼날 같은 발톱이 퀸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퀸은 숲 위를 날며 얼얼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북쪽으로 가 줘." 첨탑에 이르자 퀸이 소리쳤다. 퀸이 북쪽으로 체중을 싣자 발러는 그쪽으로 하강했다. 약탈자들은 첨탑 남쪽을 돌아 나무 사이로 사라졌지만 퀸은 그들을 곧바로 따라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달린과 릭비가 따라올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 약탈자들의 이동을 늦추려면 그들의 앞으로 가야 했다. 두 명이 다섯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발러가 계속해서 하강하자 퀸은 높은 나뭇가지에 부딪히지 않도록 다리를 들어 올렸다. 첨탑에 다다르자 발러는 북쪽 측면으로 비스듬히 날아 상승 기류를 타고 살짝 올라갔다. 그러자 돌로 된 지형이 불쑥 나타났다. 착륙할 곳을 찾은 발러는 방향을 틀고 하강 속도를 낮추기 위해 날개를 세웠다. 발러가 강하게 두 번 날갯짓하자 퀸은 매끄럽게 착륙했다. "고마워, 발러." 발러가 놓아주자 숨을 내쉰 퀸은 다시 숲속으로 달려갔다. 몸이 가벼워진 발러는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퀸은 얽혀 있는 나무뿌리를 뛰어넘어 양치류와 이끼를 밀어젖히고 나아갔다. 쓰러진 나무를 다리 삼아 작은 폭포를 건넌 후 나무에서 내려와 반대편 오르막을 뛰어 올라갔다. 평소처럼 몇 시간 동안 이동할 수 있도록 거리를 좁혀 가는 속도가 아니었다. 전력으로 질주한 퀸의 심장이 가슴을 쿵쿵 때렸다. 언덕을 오른 퀸은 고사리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팔꿈치로 언덕 끝까지 기어간 퀸은 우묵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활을 쥔 형체가 드러났다. 수염이 있고 털옷을 입은 남자였다. 상완에 두른 청동 목걸이가 숲으로 들어오는 태양 빛에 빛났다. 퀸은 남자의 창백한 피부 위를 뒤덮은 물감인지 문신인지 모를 소용돌이무늬를 언뜻 보았다. 퀸은 남자가 데마시아 출신의 마법사나 강도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데마시아인이 아니었다. 약탈자는 멈춰서 앞을 살폈다. 퀸은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쳐 간 것을 느꼈다. 퀸은 기어서 뒤로 물러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식물이 움직이면 더 시선이 끌릴 테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다. 약탈자는 문제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앞쪽으로 손짓한 후 계속 걸어갔다. 퀸은 자리를 지키며 나머지 약탈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중 한 명이 등 뒤에 빛나는 데마시아 상패를 두르고 있었다. 아스타의 오두막집 벽난로 위에서 훔친 것이었다. 전쟁에서 전사한 고귀한 병사에게 수여된 상패였다. 약탈자가 상패를 전리품으로 취하여 지니고 있는 것을 보니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가 차올랐다. 아스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털과 가죽을 두르고 있었지만 아스타는 홀로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다리 위로 걷어 올린 상태였다. 털로 된 숄을 어깨에 두른 아스타는 실용적인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아스타는 지친 듯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휘청이며 걷고 있었다. 아이가 보이자 퀸은 안도했다.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아이는 약탈자의 굵은 팔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퀸은 조금 더 그들을 지켜보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며 천천히 뒤로 기어갔다. 몇 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어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퀸은 케일럽과 함께 고향 유웬데일 근처 야생 지대를 떠돌며 북서쪽으로 며칠이나 이동했다. 둘은 한 번 야생에 들어가면 몇 주씩 숲과 산언덕을 탐험하고 직접 사냥해 배를 채웠으며 별 아래에서 잠들었다. 아버지는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자립심과 자급자족 능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항상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퀸과 케일럽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냥을 따라가곤 했다. 두 사람이 돌아올 때마다 식품 저장고가 사슴 고기와 멧돼지 고기로 가득 찬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 아버지도 결국 생각을 바꾸긴 했지만 그의 걱정은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퀸은 케일럽이 죽기 한 달 전 이곳에 딱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침략자들이 이대로 계속 가면 1킬로미터 앞에 좁은 협곡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퀸은 오른쪽 오르막 위에서 낮은 자세로 빠르게 달리며 약탈자들과 평행으로 질주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먼저 협곡에 도착한 퀸은 경사를 달려 올라갔다. 협곡 위로 올라가 바위 뒤에 등을 대고 몸을 숙이자 첫 번째 약탈자가 협곡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숨을 뱉으며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킨 퀸은 연발 석궁을 꺼내는 대신 커다란 사냥용 칼을 들었다. 길고 넓은 칼날은 단검 크기와 비슷했다. 약탈자는 험한 협곡을 오르면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지만 퀸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약탈자가 마지막으로 가파른 곳을 오를 때 퀸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 그는 옆에 퀸이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활시위를 뒤로 당기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너무 느렸다. 퀸이 칼자루로 관자놀이를 치자 남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퀸은 빠르게 그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퀸은 빠르고 숙련된 동작으로 의식이 없는 남자의 손목을 묶은 후 뒤로 잡아당겨 그의 발목과 함께 묶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바위 뒤에 등을 대고 자리 잡았다. 석궁을 꺼낸 퀸은 칼끝이 아래를 향하도록 칼을 다른 손에 쥐었다. 퀸은 협곡을 빠르게 훑어본 후 다시 몸을 숙였다. 약탈자 세 명이 아래에서 아스타를 사이에 두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우두머리 같아 보이는 자가 맨 앞에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몸집이 크고 유일하게 털옷 아래 사슬 갑옷을 입은 자였다. 데마시아의 상패를 등에 맨 자이기도 했다. 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를 갈았다. 네 명이 있어야 하는데 한 놈은 어디 있는 거지? 후방에 있나? 아니면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오고 있는 건가? 퀸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마셨다. 계획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지막 한 놈이 나타나면 그때 처리해야 했다. 약탈자들의 우두머리가 다가오자 퀸은 그 앞에 나타나 목에 석궁을 겨누었다. 그는 잠시 뒤에서야 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멈춰 본능적으로 어깨에 걸려 있던 자신의 도끼에 손을 가져갔다. "멈춰." 퀸이 경고했다. 퀸은 그자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고갯짓을 보고 뜻을 이해한 우두머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우두머리는 덩치가 컸다. 키는 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몸무게는 퀸의 두 배를 가뿐히 넘어 보였다. 하지만 우위를 점한 퀸은 겁먹지 않았다. 전에 훨씬 큰 사냥감도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우두머리의 붉은 빛이 도는 장발은 섬세하게 따여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에는 뼈와 돌 장식이 달려 있었다. 우두머리는 석판 같은 은회색 눈으로 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육중한 몸 뒤에 반쯤 숨어 있던 약탈자들이 소리를 내지르자 우두머리가 어깨 너머 무리를 향해 딱딱하고 거친 언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두머리는 퀸의 뒤를 살펴보았다. 지원병이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우두머리는 다시 퀸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퀸은 우두머리가 볼트를 피하고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나? 내 말을 이해하나?" 퀸이 물었다. 그는 퀸을 잠시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와 아이를 풀어 줘.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혼자서 우리를 쫓아온 것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양이 강했다. "운이 좋으면 날 죽일 순 있겠지만 내 부하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텐데. 네 요구를 따를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난 요구한 게 아니야." 우두머리가 씩 웃자 금니 두 개가 보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군, 데마시아인. 맘에 들어."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정찰병은 어디 있지?" "아직 살아 있다." "다행이군. 그 녀석은 내 의형제다. 그 녀석을 죽게 내버려 두면 내 아내가 화를 낼 거야." "무슨 일이죠?" 아스타가 소리를 높여 물었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퀸은 그의 말에서 과부의 이름인 '아스타'라는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스타는 애원했다. "제발 그러지—" "조용히 해!" 우두머리가 반쯤 돌아서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 질렀다. 다시 퀸을 돌아본 우두머리는 화난 얼굴이었다. "혼자서 우리를 막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퀸은 곁눈으로 보이지 않던 약탈자가 왼편 산마루에 꿇어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에 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조용히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겨 퀸을 향해 겨누었다. 퀸은 우두머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웃었다. "내가 언제 혼자라고 했지?" 푸른색의 무언가가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자 궁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놓친 화살이 덤불에 처박혔다. 그는 넘어지며 피가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스타가 비명을 지르자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탈자 중 한 명이 손도끼를 던지자 도끼가 회전하며 퀸을 향해 날아왔다. 퀸은 옆으로 몸을 돌려 도끼를 피했지만 우두머리가 빠져나갈 틈을 내주었다. 우두머리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어깨에 걸어 둔 도끼를 빼 들었다. 퀸은 빠르게 두 개의 볼트를 연속으로 쐈지만 머리를 향한 첫 번째 볼트는 상처조차 내지 못하고 빗나갔다. 두 번째 볼트는 어깨에 맞았는데 그가 돌진하는 속도를 늦추지는 못했다. 우두머리는 포효하며 도끼를 매섭게 휘둘렀다. 육중한 양손 도끼 공격은 한 번만 맞아도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퀸은 날아드는 도끼를 뒤로 피한 후 반동으로 우두머리의 가슴을 공격했다. 퀸은 그보다 훨씬 날렵했다. 심장을 정확히 찔러 치명상을 입힐 만한 공격이었지만 우두머리는 사슬 갑옷을 입고 있어 깊게 찔리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팔꿈치를 휘둘러 퀸을 밀쳐 내자 퀸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도끼를 높이 들어 내리쳤다. 퀸은 옆으로 몸을 던져 구르며 가까이에서 석궁을 쐈다. 볼트가 무릎 위에 명중하자 우두머리는 고통으로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퀸은 재빠르게 위에 올라타 칼을 목에 겨누었다. 그러자 다른 약탈자들이 일제히 멈추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그중 한 명은 여전히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아스타는 앞으로 뛰쳐나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안 돼요. 제발 그 사람을 해치지 마세요!" 퀸은 눈을 깜박였다. "아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앞에서 기진맥진한 채 우는 여자를 바라보며 퀸이 물었다. "당연하죠. 제 오빠예요." "제 남편은 왕이 시해됐을 때 수도에 있었어요." 아스타는 딸을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앞뒤로 흔들어 달랬다. "남편은 왕궁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법사들이 남편을 죽였죠." "유감입니다." 퀸이 우두머리의 다리에 천을 감아 주며 중얼거렸다. 우두머리의 이름은 에그리드였다. 사슬 갑옷을 입은 덕분에 에그리드의 가슴에 남은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다. 에그리드는 어깨에 박혔던 화살을 직접 빼내기까지 했다. 나머지 무리는 근처 바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 상처를 입은 남자는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발러를 노려봤다. 퀸이 묶어 놓았던 남자는 관자놀이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달린은 퀸 옆에 서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6년 전 고향에서 데마시아 외교 사절단과 함께 온 말락을 만났어요. 스카고른의 족장 딸이었던 전 말락의 아내가 되어 데마시아로 갔죠." 퀸은 붕대를 다 감고서 물러앉아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았다. "빠르고 강하군. 상처도 잘 꿰매고." 에그리드가 웃으며 말하자 그의 금니가 빛났다. "나와 결혼해. 함께 스카고른으로 가자." 퀸은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데마시아를 떠나려는 겁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을 텐데요." 퀸이 아스타에게 물었다. "우리 부족은 수 세기도 전에 프렐요드를 떠났어요. 산을 넘어 스카고른에 정착했죠. 하지만 아직도 제게는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 할머니는 데마시아 사람들이 마법사나 마녀라고 하는 예언자였어요.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만 딸에게 능력이 있다면요? 데마시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도 들었어요. 제 딸을 빼앗기고 말겠죠. 서리 인도자는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거예요. 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 매를 보내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했죠. 우리를 데려가 달라고요." "마력척결관들 말이군요." 퀸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퀸은 눈을 감고 콧대를 꼬집었다. 아이가 신비한 능력을 발현하면 마력척결관들이 데려갈 것이다. 퀸이 아스타의 처지였어도 진작에 마력척결관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갔을 터였다. 퀸은 아스타가 벌인 일을 두고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당신들을 보내 줄 수 없다는 건 알겠죠." 달린이 말했다. "국경은 닫혀 있습니다. 누구도 최고 의회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없어요. 반역자 사일러스와 그 무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 남편은 그 반역자와 싸우다 죽었어요! 이곳의 모든 것이 말락을 떠올리게 한다고요. 그이가 없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요. 마을의 속 좁은 농부들도 절 싫어하고요. 다들 제가 마녀라고 생각해요." "떠날 때 집을 뒤지지 않았죠." 퀸이 말했다. 질문이 아닌 단정이었다. "불도 지르지 않았고요. 맞나요?" "불이요? 그런 적 없어요." 아스타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누군가 그런 짓을 저지른 건가요?" 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딸 침대 밑에 있던 표식은... 마법이 아닌 게 맞습니까?" 아스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를 기원하는 거예요. 스카고른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그리는 표식이죠." 퀸이 마침내 알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마법처럼 보일 겁니다. 저도 그런 의심을 했었으니까요." "저희의 전통인 만큼 비밀로 하려고 조심했는데 이웃들은 항상 절 경계했어요.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니..." 오두막으로 이어지던 두 번째 발자국은 스카고른에서 온 이들의 발자국이 아닌 것이 분명해졌다. 지역 주민들이 아스타가 마녀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숯으로 그려진 룬을 보고 위험한 마법이라고 생각해 집을 태워 버리려고 했을 가능성이 컸다. 퀸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데마시아인들은 전반적으로 선량하고 정직했지만 공포와 불신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바람에 겁을 먹은 시민들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끝을 맺어야 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만한 물건을 찾았습니다." 퀸이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찾은 물건을 기억해 내며 말했다. 추모패를 넘겨주자 아스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마워요." 아스타가 상패를 가슴에 꼭 쥐며 말했다.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두고 떠나는 게 마음 아팠는데." "미안하지만 당신들을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달린이 말했다. "우리는 떠날 거다, 데마시아인. 우리를 막으려 하지 마라." 에그리드가 으르렁거리며 불안정하게 일어섰다. "그만해, 에그리드! 이분들은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아스타가 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발요, 부탁할게요. 최소한 제 딸이라도 가게 해 주세요. 자신이 통제하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받게 할 수는 없어요. 오빠와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저는 당신들과 함께 돌아갈게요." 달린과 퀸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법은 단호했다. 누구도 데마시아를 벗어날 순 없었다. 아스타도, 딸도, 스카고른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요." 달린이 말했다. "저들을 보내 주면 우리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거예요." 달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퀸과 달린은 동쪽으로 걷고 있는 무리를 뒤따라 걸었다. "저들이 어떻게 국경을 넘었는지 알아야겠어." 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린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침묵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데마시아의 끝에 있는 절벽에 이르렀다. 스카고른 무리는 그들을 감시탑의 시야에서 벗어나 북쪽과 남쪽 사이에 있는 외딴곳으로 이끌었다. 수없이 많은 데마시아의 감시탑에서 절벽의 곳곳이 보이겠지만 이곳은 분명 사각지대였다. 퀸은 가장자리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절벽의 높이는 수백 미터 정도 되었지만 퀸은 높은 곳이 딱히 무섭지 않았다. 바위에 박혀 있는 쇠못이 보였다. "보초 눈에 띄지 않게 밤에 절벽을 올라왔습니까?" 에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퀸은 인상적이라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한낮에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퀸이 붕대가 감긴 에그리드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다! 스카고른은 강하다." 에그리드가 자랑하듯 말했다. "자네도 강하지.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 둘이 아이를 낳아 강한 전사로 키우는 거다. 어때?" 퀸은 아무 말 않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에그리드를 쳐다보았다. 결국 에그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다. "혹시 몰라 물어본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에그리드는 부하들에게 근처 덤불에 숨긴 밧줄을 회수하라고 명령했다. "눈에 띄지 않고 어떻게 데마시아에 넘어왔는지만 알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달린은 퀸을 옆으로 데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보내 주면 우리는 서약을 어기게 되는 겁니다!" "혈통이 특별하다는 이유로 여자를 이곳에 남겨 아이를 빼앗기게 둘 수는 없어. 게다가 우리의 첫 번째 서약은 데마시아를 보호하는 거야." 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들을 보내 주는 게 데마시아를 보호하는 건가요?" 퀸은 달린을 무섭게 쳐다보았다. "저들을 막으면 두 경우 수 중 하나가 일어나겠지. 저들이 우리를 죽이고 떠나면 데마시아는 가장 뛰어난 기동대원 둘을 잃게 되는 거야. 우리가 저들을 물리치면 데마시아에는 적이 생기는 거고. 우리가 족장의 딸을 억류하고 있다는 걸 스카고른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 달린은 스카고른 전사들을 쳐다보더니 퀸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범법자가 되는 거라고요." 퀸은 달린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일만 바란다면 일반 보병 부대에 있었어야지. 변두리에서는 모든 게 항상 복잡한 법이야." "법이—" "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저들을 보내 준다고 해서 데마시아가 위험해지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저들을 막으면 위험해질 수 있지." "하지만—" 퀸은 자신의 지위 덕분에 주어진 권력을 좀처럼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물러서, 달린. 저들을 보내 줄 거다. 이건 명령이야." 퀸이 으르렁거렸다. 달린은 잠시 얼어붙더니 절도 있게 경례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스카고른 무리가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할 때 해가 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밧줄로 엮었다. 아스타의 딸은 에그리드의 등 뒤에 잘 묶여 있었다. 퀸은 그들이 끝까지 내려갈 때까지 기다린 후 돌아섰다. 에그리드의 부하는 약속대로 절벽을 내려가며 바위에 박아 뒀던 쇠못을 제거했다. 가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까지 갈 시간이 사흘도 채 남지 않았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밤새 달려야 했지만 퀸은 제때 도착할 거라 확신했다. 퀸은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이어질 여정을 준비했다. 퀸은 떠나기 전 잠시 멈추어 달린을 쳐다보았다. 달린은 릭비와 함께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린의 시선은 퀸이 아닌 동쪽을 향했다. 스카고른 무리가 떠난 후 그들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하지만 보내 주는 게 최선이었다." 달린이 퀸을 바라보았다. "이해합니다.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간단하지는 않겠죠."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일이지. 우리는 기동대원이잖아." 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달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퀸을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발러, 잘 보살펴드려. 알았지?" 달린이 근처에 앉아 있는 발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데마시아에 필요한 분이니까." 발러는 부리를 딱딱거리며 대답했다. "지역 수비대에 이야기해. 이곳에 감시탑을 세워 틈을 메우라고 말이야." "지금 권력을 사용하시는 건가요, 대장님?" 퀸이 코웃음을 치며 릭비의 귀 뒤를 긁어 주었다. "그런 셈이지." 퀸은 달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항상 몸조심해, 달린. 너도 데마시아에 필요한 존재니까." 퀸은 돌아서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