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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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 이름 | 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 Cristiano Lucarelli | |
출생 | 1975년 10월 4일 ([age(1975-10-04)]세)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리보르노 | |
국적 | 이탈리아 | |
신체 | 188cm, 83kg | |
가족 | 동생 알레산드로 루카렐리 | |
직업 |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 선수 | FC 그로세토 (1992~1993) AC 페루자 칼초 (1993~1995) 코센차 칼초 (1995~1996) 파르마 AC (1996) → 칼초 파도바 (1996~1997 / 임대) 아탈란타 BC (1997~1998) 발렌시아 CF (1998~1999) US 레체 (1999~2001) 토리노 FC (2001~2003) AS 리보르노 칼초 (2003~2007) FC 샤흐타르 도네츠크 (2007~2008) 파르마 AC (2008~2012) → AS 리보르노 칼초 (2009~2010 / 임대) → SSC 나폴리 (2010~2012 / 임대) |
감독 | AC 페루자 칼초 (2013) 에스페리아 비아레조 (2013~2014) US 피스토이에세 (2014~2015) AS 구비오 (2015~2016) ACR 메시나 (2016~2017) 칼초 카타니아 (2017~2018) AS 리보르노 칼초 (2018) 칼초 카타니아 (2019~2020) 테르나나 칼초 (2020~2022) 테르나나 칼초 (2023) 테르나나 칼초 (2023) 칼초 카타니아 (2023~2024) | |
국가대표 | 6경기 3골 (이탈리아 / 2005~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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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1992년에 데뷔한 이래 20년간 수많은 세리에 팀들을 전전한 저니맨이지만 AS 리보르노 칼초에서 활약했다.
2. 플레이 스타일
루카렐리는 188cm의 키에 83kg에 달하는 탄탄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진과의 몸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수비수 한 두명은 가볍게 제칠 수 있는 드리블 스킬을 갖췄다. 또한 왕성한 체력을 기반으로 한 대단한 활동량과 탁월한 개인기, 그리고 넓은 시야와 준수한 축구지능, 수준급 패스 능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강력하고 정확한 슈팅력을 갖춰 중거리 슛에 능했기에 프리킥을 전담했고 심리 싸움에도 능해 페널티킥도 맡았다.
3. 축구인 경력
3.1. 클럽 경력
3.1.1. 세리에의 저니맨
루카렐리는 어린 시절 리보르노의 유소년팀 Carli Salviano와 Armando Picchi에서 기량을 갈고 닦으며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1992년, 루카렐리는 17살의 나이에 아마추어 리그 소속팀인 Cuoiopelli로 이적함으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28경기 5골을 기록하였고 Aldo Bet 감독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U18 축구대표팀에 차출되기도 했다.이듬해, 루카렐리는 세리에C 소속 클럽인 페루자로 이적하였고 1993-94 시즌에 득점왕에 선정되는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세리에B로 승격시켰다. 이후 루카렐리는 2시즌 동안 55골을 기록한 뒤 1995년 여름 세리에B 소속 클럽인 코센차로 이적했다. 그는 코센차에서 15골을 기록하며 팀을 강등을 모면하도록 기여했고 체사레 말디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올림픽 축구대표팀에 소집되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이후, 루카렐리는 파르마로 이적했지만 곧바로 파도바로 임대되어 발테르 쳉가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주전 선수로 뛰면서 34경기 18골을 기록했고 이탈리아 U-21 대표팀에 차출되어 10골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에 주목한 여러 팀들이 파르마에게 접근했고, 결국 아탈란타가 영입에 성공했다. 루카렐리는 아탈란타에서 26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하며 장차 아탈란타의 공격진을 이끌 스트라이커로 주목받았다.
그러던 1998년, 루카렐리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이끄는 발렌시아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2경기 1골에 그쳤고 이듬해 여름에 이탈리아의 레체로 이적했다. 그는 그곳에서 2001년까지 2년간 활동하며 59경기 27골을 기록했다. 이후 루카렐리는 토리노로 이적해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았지만 2시즌 동안 56경기 10골에 그치는 부진에 빠졌고 결국 잉여선수로 낙인찍혔다.
3.1.2. 리보르노의 전설
"선수들은 대개 요트, 페라리, 개인별장을 자기 돈으로 구입한다. 하지만 나는 내 돈으로 이 리보르노 유니폼을 샀다."
2003년, 루카렐리는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리보르노의 축구팀인 AS 리보르노 칼초에 입단했다.[1] 그리고 2003-04 시즌, 그는 세리에B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43경기 29골을 기록, 30골을 기록한 팔레르모의 루카 토니에 이어 득점 2위에 선정되었다. 리보르노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55년만에 세리에A에 승격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에 주목한 여러 팀들이 그에게 거액의 이적료 및 급료를 제시했지만, 루카렐리는 이를 모두 뿌리치고 리보르노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리보르노 울트라스인 Autonomous Brigades Livornese와의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등번호를 울트라스가 설립한 해인 1999년에 맞춰 99번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0년 9월 인터뷰에서, 루카렐리는 사실 자기가 99번으로 정한 건 첫 아이가 태어난 해인 1999년에 맞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고백했다.
2004-05 시즌, 루카렐리는 33경기에 출전하여 24골을 기록, 세리에A 득점왕에 선정되었고 리보르노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9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2005-06 시즌, 루카렐리는 19골을 기록하며 리보르노의 든든한 공격수로서의 면모를 이어갔으며 리보르노는 이에 힘입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로파 대회 진출권을 획득했다. 루칼레리는 2006-07 시즌에 리그 34경기에 출전해 20골을 기록했고 유로파 대회에서도 7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하며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렇듯 이탈리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거듭난 루카렐리는 리보르노에서의 4시즌 동안 통산 158경기에 출전해 101골을 기록했다.
3.1.3. 동생과의 짧은 재회
2007년 7월 13일, 우크라이나 리그 최고의 명문팀으로 손꼽히는 샤흐타르가 800만 유로의 이적료와 3년간 300만 유로의 급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루카렐리를 영입했다.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9경기 4골을 기록했고 리그에서 12경기 4골을 기록했다. 그후 2008년 1월, 루카렐리는 570만 유로의 이적료로 파르마에 이적했다.
루카렐리는 홈경기에서 아탈란타를 상대로 헤딩골을 기록하면서 데뷔골을 성사시켰고 3월 16일엔 리보르노와 경기를 치르면서 리보르노 팬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는 2007-08 시즌 후반기에 16경기 4골을 기록했으나 파르마는 세리에B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그는 팀에 계속 남아있기로 결정했고 마침 제노아에서 파르마로 이적해온 동생 알레산드로와 함께 파르마를 세리에A로 복귀시키기 위한 임무를 수행했다.
루카렐리는 2008-09시즌 전반기 6개월동안 주장 완장을 차고 선수단을 이끌며 29경기 12골을 기록했다. 그런데 2009년 2월 5일, 루카렐리는 허가도 받지 않고 안코나로 여행갔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감독의 눈밖에 났고 결국 이후로 선발 명단에 뽑히지 못하고 훈련도 수행하지 못한 채 잉여자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루카렐리는 이적을 결심하고 2009년 여름 파르마가 세리에A로 승격한 직후 리보르노로 이적했다.
3.1.4. 말년
2009년 7월 15일, 리보르노는 그들의 영웅을 임대를 통해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알렸다. 이후 루카렐리는 8월 23일에 칼리아리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다음 주 경기인 나폴리와의 원정 경기에서 첫번째 골을 기록했고 2010년 3월 14일엔 로마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는 리보르노에서 리그 28경기 10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고 결국 파르마로 복귀했다.2010년 8월 21일, 루카렐리는 나폴리로 임대되었다. 이때 나폴리에는 리보르노 시절 루카렐리를 지도한 바 있는 발테르 마차리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피오렌티나와의 리그 경기에서 교체 투입됨으로서 데뷔전을 치렀고 2010년 9월 16일 위트레흐트와의 유로파 리그 경기에서 두번째로 출전했으나 왼쪽 무릎의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4개월간 경기에 뛰지 못했다.
2011년 1월 1일, 그는 볼로냐와의 이탈리아 컵 대회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그리고 세리에A 마지막 경기인 유벤투스전에서 나폴리에서의 첫번째 골이자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2011-12 시즌에도 나폴리에 임대되었으나 3경기 출장에 그쳤고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선언했다.
3.2. 국가대표 경력
루카렐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 축구계의 미래를 책임질 공격수로 주목받았고 U18, U21 대표팀에 연이어 차출되어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올림픽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성인이 되어서는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팀을 여러번 옮기면서 꾸준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크리스티안 비에리, 필리포 인자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2005년, 루카렐리는 2004-05 시즌에 세리에A 득점왕을 차지한 덕분에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부름을 받고 29세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그는 세르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지만 2006 월드컵 선발 명단에 제외되었다. 이후 2007년 10월 17일,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친선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국가대표에 차출되지 못했다.
루카렐리는 국가대표로서 통산 6경기에 출전해 3골을 기록했다.
3.3. 지도자 경력
2012년 8월 17일, 파르마 회장 토마소 기라르디는 루카렐리를 유소년팀 코치로 선임했다. 루카렐리는 유소념팀을 이끌고 유소년 컵 결승전에 진출시켰으나 엠폴리에게 패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수페르코파 대회에서 알비노레페 유소년팀을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했다.그러던 2013년 6월 25일, 루카렐리는 페루자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루카렐리는 부임하자마자 선수 영입 문제로 보드진과 격렬하게 갈등을 빛다가 사보나와의 이탈리아 컵 홈경기에서 패한 직후인 8월 24일에 세리에B 개막전도 치르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이후 그는 같은 해 10월 30일에 세리에 B 소속 클럽인 비아레지오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팀을 13위에 안착시켰다.
2014년 여름, 루카렐리는 세리에C에 승격한 피스토이에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2015년 2월 9일에 상호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8일, 그는 세리에 C 소속 클럽인 Tuttocuoio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2016년 4월 26일 경질되었다.
2016년 10월 18일, 루카렐리는 세리에C의 메시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14위에 안착시킨 뒤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세리에C 클럽 카타니아에 부임해 C조에서 2위를 기록하며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플레이오프 준결승전에서 시에나에게 패해 세리에B 승격이 좌절되었다.
2018년 7월 6일, 그는 리보르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천명의 팬들이 공식 발표날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루카렐리는 그들 앞에서 팀을 세리에 A로 올려놓겠다고 선언했지만 11월 7일, 성적 부진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2020년 8월 8일, 그는 테르나나 칼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임 첫해, 테르나나는 세리에 C의 C조에서 1위를 기록하며 팀을 3년만에 다시 세리에 B로 승격 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2022년 11월 26일, 테르나나 칼초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2023년 2월 28일, 테르나나 칼초의 감독으로 3개월만에 다시 선임되었다.#
2023년 6월 21일, 테르나나 칼초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2023년 7월 14일, 테르나나 칼초의 감독으로 다시 선임되었다.#
2023년 11월 6일, 테르나나 칼초 감독직에서 또 경질되었다.#
2023년 11월 14일, 칼초 카타니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3년.# US 아벨리노 1912를 상대로 대패를 당한 후, 2024년 3월 7일에 경질되었다.
4.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리보르노의 선수이자 아이콘인 루카렐리는 자신의 휴대전화 전화 벨소리를 '붉은 깃발[2]'로 맞춰놓고 있다. - 더 내셔널
루카렐리의 고향 리보르노는 이탈리아 공산주의가 시작된 도시이며 이 곳을 연고지로 삼은 AS 리보르노 칼초의 서포터들은 공산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이러한 리보르노에서 태어나 자랐고 팬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는 루카렐리 역시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은 종종 많은 사고를 초래했으며 그가 국가대표로 중용받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2005년 5월, 칼초 이탈리아 매거진은 루카렐리가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리보르노 서포터들을 버스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비용을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이로 인해 루카렐리는 폭동을 자행해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비호한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또한 그는 골을 넣은 직후 세레머니를 할 때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제스처를 종종 취하곤 했으며 공산주의만이 이탈리아를 살릴 유일한 이념이라고 주장했다. 급기야 그는 "우리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리보르노가 심판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받고 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5. 여담
때는 2004년 4월, 리보르노는 세리에A 승격을 달성하기 위해 피아첸차와 맞붙었다. 이때 루카렐리는 팀의 3번째 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확고히 했다. 그는 자신이 골을 넣어 팀의 승격을 사실상 확정지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위와 같은 망측한 세레머니를 선보이다가 주심에 의해 퇴장당했다. 이후 국내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내 축구팬들로부터 '붕가렐리'란 별명으로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들도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1] 루카렐리는 지속적으로 리보르노를 원한다고 어필했으나 당시 리보르노는 루카렐리의 연봉(20억 리라)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구단주인 알도 스피넬리가 전화를 걸어 이를 설명했다. 그러자 루카렐리는 다음날 다시 전화로 리보르노에서 뛸수 있다면 연봉을 반으로 깎아도 상관없다고 말했고 그렇게 이적이 성사됐다. 당시까지 이정도 수준의 연봉삭감을 받아들인 선수는 드물었다. 거기다가 루카렐리는 세리에A서 뛰고 있었고, 리보르노는 세리에B였다.[2] Bandiera Rossa. 이탈리아의 혁명가요
분류
- 1975년 출생
- 1992년 데뷔
- 2012년 은퇴
- 리보르노 출신 인물
-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 이탈리아의 축구감독
- FC 그로세토/은퇴, 이적
- AC 페루자 칼초/은퇴, 이적
- 코센차 칼초/은퇴, 이적
- 파르마 칼초 1913/은퇴, 이적
- 칼초 파도바/은퇴, 이적
- 아탈란타 BC/은퇴, 이적
- 발렌시아 CF/은퇴, 이적
- US 레체/은퇴, 이적
-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은퇴, 이적
- 토리노 FC/은퇴, 이적
- AS 리보르노 칼초/은퇴, 이적
- SSC 나폴리/은퇴, 이적
- AC 페루자 칼초/역대 감독
- US 피스토이에세/역대 감독
- AS 구비오/역대 감독
- ACR 메시나/역대 감독
- 칼초 카타니아/역대 감독
- AS 리보르노 칼초/역대 감독
- 테르나나 칼초/역대 감독
- 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