桐生火葬場事件
1. 개요
1933년 일본 제국에서 발생한 사건.2. 사건 경위
1933년 4월 14일[1] 군마현 키류시 시영 화장장[2] 옆 쓰레기장을 뒤지던 개가 사람의 시체 2구를 파내었다.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한 것이 사건의 발단으로, 이 일로 키류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신고를 접수한 키류경찰서에서 수사관을 급파, 문제의 시신을 분석한 결과 두 구 모두 반 미라화되었고 절반 정도가 불에 탄 상태였으며, 양 팔다리가 없이 몸통과 머리만 남아 있었다. 이 점에 기인하여 경찰은 이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증거인멸을 위해 불에 태워져 유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계속하였다.수사 결과 화장장 전 직원이었던 마츠이 칸지로(松井勘次郎, 당시 45세)가 시신을 유기한 범인이었다. 그는 시신을 완전히 화장하지 않고 절반 정도만 불에 태운 상태로 화장장 부지 내에 암매장하는 수법으로 화장에 사용되는 연료비와 화장비를 편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놀랍게도 그가 화장장 직원으로 근무했던 17년 동안 수 차례 같은 수법을 되풀이했음이 밝혀졌다. 마츠이의 진술에 따라 계속 진행된 추가 발굴 작업 도중 화장장 뒤편 숲에서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적출된 처참한 몰골의 시신 38구가 추가로 발견되는가 하면, 화장장 인근의 다른 숲에서도 사후 5~6년가량 경과된 시신 85구가 더 발견되었다. 이 시신 중 20여 구는 어린아이의 것으로, 이 때문에 경찰은 당초에 유아 살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부검을 실시했으나 사인은 모두 병사로 타살의 흔적이 없어 유아살해 혐의는 일단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발견된 시신들은 무려 1570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은 마츠이 외에도 민영 화장장 당시 운영자였던 Y[3]가 범행에 연루된 것으로 보고 조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Y가 마츠이와 공모하여 시신 유기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추가 조사에서 마츠이와 Y를 포함해 14명이 범행에 연루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연루자들 중에는 당시 키류시청 위생과 화장주임도 포함되었다. 마츠이는 경찰 조사에서 '시신을 온전히 화장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매장한 뒤에 다른 뼈를 구해서 유족에게 전했다.'는 취지로 태연하게 진술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마츠이는 당시 그의 손을 거쳐간 시신 중 5분의 1 정도만 제대로 화장하고, 그 중 몇 명 분의 유골을 추려낸 뒤 화장하지 않은 시신의 유족들에게 고인의 유골이라고 속여서 인도했다. 또한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33년 4월 25일자 요미우리신문 기사에 따르면 시내의 한 상점[4] 주인이 마츠이에게 닭뼈를 판 적이 있다고 증언했으며, 유족에게 인도된 유골들 속에는 이 닭뼈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한편 화장장이 키류시 직영으로 전환된 4월 1일 이후에도 마츠이는 인수인계를 위해 4월 10일까지 근무했으며, 이 당시 마츠이의 후임자로 새로 들어온 화장장 직원이 마츠이의 협박으로 범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3. 범행 동기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주된 범행 동기는 금전적인 이득으로, 범행의 가장 큰 목적은 연료비 절감과 제반 비용 편취였다. 전 화장장 운영자였던 Y는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 마츠이는 시신 1구당 60전(12세 이하는 30전)씩 받는 화장 수수료를 힘들이지 않고 챙기기 위해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화장에 사용되는 연료는 화장장 측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었지만 시에서 조례에 따라 화장 요금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시신을 화장하지 않을 경우 Y는 연료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시에서 지급되는 화장 요금을 벌 수 있었고, 마츠이는 힘들이지 않고 수수료와 팁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게다가 당시는 연료로 장작이나 숯 또는 중유를 썼기 때문에 연기가 많이 발생했고, 이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불편을 고려해서 화장이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던 것도 범행이 쉽게 발각되지 않은 이유였다. 또한 이들은 시신에서 금니와 각종 귀금속 등을 빼돌려 고물상에 팔아 이득을 챙기기도 했다.여기에 더해 이 사건이 '쇼와 성대(聖代)의 크나큰 불상사', '세계적인 엽기 사건'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된 원인이 된 끔찍한 동기는 바로 뇌수를 적출해서 팔기 위해서였다. 마츠이가 시신을 완전히 화장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는데, 당시 사람의 뇌수가 매독 등 각종 성병과 폐병에 효과가 있다는 미신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시신에서 뇌수를 적출해서 약재로 팔아 돈을 벌었다는 것이었다.[5] 사건 당시는 소위 '에로·그로[6]' 붐이 일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신에서 뇌수를 적출했다는 부분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이에 따라 마치 범행의 주된 목적이 뇌수 적출인 양 호도되어서 전국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한 군마현 경찰 측에서는 1500구가 넘는 시신에서 적출된 뇌수를 구매한 사람이 고작 2명이라는 점과, 이 2명이 모두 실제로 병을 앓는 환자들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이를 일축했다. 설령 이 2명이 지속적으로 뇌수를 구입했다고 쳐도 그렇게까지 대량으로 구매하기란 여러 상황을 고려해도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전술한 대로 시신들 중 어린아이의 시신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모라이코고로시[7] 사건으로 의심되기도 했으며, 당시 언론에서 같은 해에 발생했던 모라이코고로시 사건인 이른바 '사이고우야마(西郷山) 사건[8]'을 거론한 시기가 잠시 있었다.
4. 범인에 관하여
주범 마츠이 칸지로는 사기 전과 3범으로, 화장장에서 일하기 전까지 마에바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원래는 키류 시내 한 농가의 4형제 중 막내로, 20세 때 맹장염을 앓고 나서부터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건 발생 몇 년 전부터 이미 가족들과는 연을 끊은 상태였고, 그 와중에 사기죄로 수감되었다가 출소 후 화장장 운영자였던 Y의 부친[9] 밑에서 신세를 지며 약 행상을 하다가 화장장 직원으로 고용되었다.하지만 마츠이는 화장장에 취직한 이후부터 매일 밤 차를 몰고 키류시와 아시카가시를 오가면서 흥청망청 놀며 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화장장에서 일하면서 유족과 조문객에게 팁을 달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시신의 금니를 빼돌리는 등 항상 문제를 일으켜 키류 시민들 사이에서는 나쁜 의미로 상당히 유명했다.
5. 사건 이후
사건이 보도되자 분노한 지역 주민들이 "어떤 놈이 저런 것들에게 화장장을 맡겼느냐!"라며 시청으로 몰려드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사건을 접한 키류시 당국은 4월 15일 긴급 시의회를 열고 당시 키류시 시장과 시의원들이 사과를 표했으며, 화장장을 개축하는 한편 시신이 모두 발견된 후 위령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문제의 화장장은 폐쇄되고 1935년부터 시에서 직접 관리, 운영[10]하는 새로운 화장장이 건립되었다. 또한 이 때도 키류시 측에서는 대규모 위령제를 열어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6. 여파 및 유사 사건
전국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데다 사건의 내용이 내용이었던 만큼 그 여파는 상당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점은 유사한 사건들이 잇달아 적발되었다는 것으로, 당장 1933년 9월 6일 미에현 도바시의 한 화장장 직원이 시신의 뇌수를 적출해서 성병 특효약이랍시고 팔았던 사실이 적발되는가 하면, 11월 1일에는 사이타마현의 화장장에서도 직원이 무려 3년에 걸쳐 시신에서 뇌수를 빼내다가 적발되었다.이 사건의 여파로 키류시 출신 사람들이 한동안 '온보야키(おんぼやき[11]) 동네 키류' 출신이라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화장장에서 고인의 유품 중 고가의 귀금속이나 금니 등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일부 유족들이 화장장 측을 가장 먼저 의심하는 풍토가 생긴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컸다.
5ch 등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상에서는 당시의 화장장 터가 심령스팟으로 알려졌으며, 마츠이가 닭뼈를 샀던 시내의 상점에서 인육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돌았다.
7. 관련 문서
[1]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에는 시신이 최초로 발견된 날짜를 4월 14일이라고 보도되었으나, <군마현 경찰사>와 이를 근거로 편찬된 <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 사건·범죄 대사전>에는 4월 3일로 기술되어 언론보도와 행정기록의 날짜가 일치하지 않는다.[2] 원래는 개인이 운영하는 민영 화장장이었다가 1933년 4월 1일부터 키류시 직영으로 전환되었다.[3] Y의 부친이 마츠이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4] 정육점 혹은 닭고기 요리를 파는 식당으로 추정[5] 이런 류 미신은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어린아이 간 빼먹기 참조.[6]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의 줄임말로 선정적이고 엽기적, 자극적인 것을 추구했던 쇼와 시대 초기의 퇴폐적인 사회 풍조를 가리키는 말. 여기에 '넌센스'를 더해 '에로·그로·넌센스'로 칭하기도 한다.[7] もらい子殺し. 직역하면 '얻은 아이 죽이기'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나 부모 둘 중 하나가 행방불명되는 등 여러 사정으로 양육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을 데려와 친부모로부터 양육비 조로 얼마간의 돈을 받고 아이를 죽이는 영아살해를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일본에서 성행했으며, 코토부키 조산원 사건의 범인 이시카와 미유키도 이 수법으로 수많은 영아들을 살해했다.[8] 1933년 3월 10일 가와마타 하츠타로라는 남성이 영유아 16명을 살해하고 도쿄도 메구로구 사이고우야마에 시신을 암매장한 사건.[9] 사건 발생 당시에는 이미 고인으로, Y가 부친의 뒤를 이어 시영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화장장을 운영하고 있었다.[10] 민간 관리인에게 위탁하지 않고 시청 직원이 직접 관리했다.[11] 원래는 묘지기라는 뜻으로, 화장장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다. 현재는 공식 명칭인 화장기술원(火葬技術員, 한국의 화장기사에 해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